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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말씀의 제목은 "사가랴의 찬송"입니다.
본문에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6개월 전에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 본문은 사가랴가 아기를 안고 기쁨과 감격 속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도 의심하고 믿지 아니하므로 1년 동안 혀가 닫힌 채 지내다가 아들을 낳고 '응애'하는 순간에 자기의 혀도 열렸습니다. 자식 없이 지내다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 아이를 낳았으니, 게다가 1년 만에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백세에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만큼이나 기뻤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개인적인 감정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찬송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든 내 감정과 내 의지나 신념 충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눅1:15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눅1:41을 보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성령 충만했습니다.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오시는 길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임하셨고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나가셨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갈릴리로 돌아오셨고 성령으로 가르치셨고 성령으로 기뻐하셨고 성령으로 자신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히9:14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육체로 계실 때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했습니다(행10:38).
우리가 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눈물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마귀에게 훼방거리를 제공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귀를 도우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육신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을 따라 살길 축원합니다.
오늘 성령이 충만한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첫 마디가 바로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몇 달 만에 입이 열려 뱉은 첫마디가 '할렐루야!'입니다. 찬양 내용이 무엇입니까. 1. 67절에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아보시고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것을 찬양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이 태어났을 때 선포한 것인데, 그러나 내용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아보신 것입니다. 돌보다는 것은 내버려두지 않고 치료하고 싸매어 주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돌아보셨습니다. 땅으로 말하면 버려진 땅이 아니라 주인이 관리하는 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아니 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인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수 되었음에도(롬5:8~10), 우리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돌아보시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셨습니까.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헬라어 '리트로시스'라는 말인데 '해방' '자유' 속전'을 뜻합니다. 이것은 죄인을 풀어주기 위해 마땅한 값을 치르고 구해 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정당한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풀어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이전에 탈북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분들이 남한에 내려와 생활하면서 자신이 북한의 억압된 체제로부터 자유케 된 것을 기뻐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가치를 모르고 남한 정착에 실패하고 생활이 더 고단하다고 느껴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감시와 억압 속에 살다가 자유대한에서 통행증 없이도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실감하고 무엇이든지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음을 감사히 생각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고 단지 남한 생활이 고단하고 힘들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가치를 모른다면 짓밟을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누리는 자유도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면서 찾은 자유인지 모릅니다. 6.25때 이디오피아 왕이 왕의 근위부대를 파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워라.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고 오너라."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사망 권세자인 마귀로부터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딤전2:5,6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본문 69절에 보시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74절에서는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77절에서는 주의 백성, 곧 우리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가랴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셔서 죄 사함과 구원을 베푸신 것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성탄을 맞으면서 무엇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2.그리고 선지자의 입으로 예언한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한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삼하7장 전체를 보면 어느 날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가운데 있도다."라고 하며 탄식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 알고 감동하여 나단선지자를 통해 말씀합니다. 첫째,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 둘째, 이스라엘민족을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며 평강을 주고 은총을 빼앗지 아니하리라는 것, 셋째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을 통해 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의 씨를 통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맺을 것을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다윗에게 말씀한 구원의 뿔을 일으키신 하나님,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72절에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을 떠나라는 말씀에도 순종하였고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하였더니 하나님은 즉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습니다. 창22:17이하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너의 씨에 의해 원수가 정복되고 너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메시야가 아브라함 가문에 올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는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놓았고 예수님은 그 예언한 대로 오셨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유다지파를 따라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통해 오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이 와서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주님의 나심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생애를, 즉 죽음과 부활까지도 다 예언해 놓으셨고 그 예언을 따라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신 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는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를 통해 언약한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알고 신실하신 하나님, 거짓이 없으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약속을 망각하고 파기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맹세라고 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한 맹세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맹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맹세해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지킬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맹세하셨습니다. 맹세는 반드시 높은 분을 걸고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높은 분이 없으니 자신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하나님은 맹세하신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맹세한 것을 스스로 지키신다는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세상에까지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가랴가 기뻐하고 찬양한 것은 바로 이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맹세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신뢰하고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3.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74,75절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지금은 은혜시대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을 섬겨도 두렵고 떨림 속에서 저주받지 않기 위하여 종이 주인을 섬기듯 의무적으로 섬겼지만 이제 우리는 자식이 아버지 앞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가듯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결케 된 것은 율법을 지켜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성결함을 입었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의롭다고 믿고 주님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의로운 죽음임을 시인하고 믿을 때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순간만 허락하신 은혜가 아니라 '종신토록' 주셨습니다. 영원한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시온의 대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길 되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주님이 친히 등불이 되셔서 우리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아들을 통해 속량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맹세하신 것들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섬기도록 하셨고 우리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탄을 맞으면서 사가랴처럼 찬송과 감사를 드리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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