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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와 밀화(蜜花)
박 화 성
섬머스클 최종일의 마지막 시간을 끝낸 신정균은 바른손에 돌돌 말아쥔 신문으로 왼편 손바닥을 가볍게 때리며 대학의 정문을 나섰다. 맞은 쪽 주차장에는 각색 각 모양의 자동차들이 따가운 칠월 정오의 태양 아래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정균이 자기의 아파트를 향하여 정문 앞길을 건너 주차장 모퉁이를 막 돌려니까,
“닥터 신!”
고운 목소리가 쨍 ㅡ 귓속으로 든다. 돌아보니 타는 듯한 새빨간 자동차를 둥지고 꾀꼬리처럼 샛노란 원피스를 입은 줄리였다. 미끈한 흰 팔을 높이 쳐들어 손을 혼들며 활짝 웃고 서 있는 줄리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웬 일야? 줄리!”
그도 마주 웃으며 몇 걸음 다가갔다:
줄리는 그 자리에서 손만 내밀었다.
“점심 사드리려고 아까부터 와 기다렸어요.”
“그래? 고맙군. 그럼 먼저 내 아파트로 가지.’
정균은 줄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름인데도 줄리의 손은 싸늘하게 차다.
“거긴 싫어요. 어머니가 계시는걸요. 시내로 나가요, 우리.”
“어쨌건 차를 가져와야지 않아?”
“여기 내 차 있잖아요? 자 일루 오세요.”
줄리는 제가 먼저 새빨간 차 속으로 들어가 운전대에 앉으며 뒤따라온 닥터 신을 곁자리에 앉혔다.
“오늘은 어디든지 제가 안내 하는 거니까 순순히 들으셔야 해요.”
차는 이내 주차장을 빠져서 행길로 나섰다. 스카프를 매지 않은 줄리의 금발이 나부끼는 대로 그윽한 향취가 풍겼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란 걸 용케 알았군.”
“그럼 모를까봐? 내 온 신경과 지혜를 거기에 총 집중하구 있는데요.”
“줄리의 여행은 어떻게 됐어?”
“저도 어제까지 끝났어요. 이제부턴 완전 자유예요.”
차는 벌써 긴 다리를 건너는 중이고 강바람은 시원하게 양쪽 창으로 밀려들었다.
“귀국 정말 틀림없어요?”
“그럼, 날짜까지 정했는데.”
줄리는 잠깐 말을 끊고 앞을 보며 핸들만을 조종하고 있었다. 선명한 윤곽이 조각같이 고요했다. 다리를 다 건넌 차는 밀림처럼 솟아 있는 고층건물의 길로 파고들었다. 어느 길목을 슬쩍 돌아들 때 줄리는 물었다.
“어느 때쯤?”
“이달 말경에…….”
“정확한 날짜는요?”
“이십구일.”
“꼭 열흘 남았군요.”
주말인 토요일이라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아 거리는 한산했다. 줄리는 차이나타운의 어느 중국 음식점으로 정균을 안내했다. 중국인들은 주말이나 시간 제한에 아무런 관련이 없이 언제나 어느 때나 음식과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별수도 없지만, 닥터 신도 저도 이 집 음식을 좋아하니깐 됐죠?”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줄리는 어리광 섞어 말하면서 빤히 정균을 건너다보았다. 정균은 긍정하는 표로 싱그레 웃어주었다. 각각 즐겨하는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한 후 줄리는 또 정균을 똑바로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에서 새파란 광채가 이는 듯했다. 이윽해서 꼭 다물렸던 연분홍 입술이 열렸다.
“귀국 후의 스케줄은요?”
“뭐 별 거 있어? 십오 년 만에 돌아가는 거니까 일가친지들이나 찾아뵙고…….”
“다음엔요?”
“…….”
“왜 있잖아요? 어머니께서 추진하시는 중대한 일 말예요.”
“그게 뭐든가?”
“아이 밉살스러워!”
그러는데 음식이 왔다. 그것들을 먹는 동안에 줄리는 화제를 백괄십도로 바꾸어 집안 얘기 따위의 그런 저런 일을 재미나게 표현해가며 유쾌한 식사시 간을 보내게 했다.
‘총명하고 상냥한 기집애야.’
십 년간을 사귀어왔지만 소녀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명랑하고도 속이 찬 여성다운 여성인 줄리였다. 그러면서도 활발하고 침착하고, 소박하고 참을성 있는 성격을 보일 때는 동양적인 여성미마저 풍부한 것이다.
“자 인제 어디루 간다?”
정균이 차에 오르면서야 물었다.
줄리는 능숙하게 차를 뻬서 돌리며 방그레 웃었다. 줄리는 두고보라는 듯이 차의 방향을 잡았다.
“어디루 가는지 짐 작해내세요.”
“가만 있어. 좀더 있다가…….”
정균은 둥그렇게 큰 눈을 더 크게 떠서 어린애처럼 두리번거렸다. 그게 우습다는듯이 줄리는 낭랑하게 소리내어 웃다가 깜짝 생각나는 듯이 머리를 정균에게로 돌렸다.
“참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죠?”
“어머닌 오늘도 쇼핑이야. 본국에 가신다는 기쁨에 들떠서 요샌 쇼핑만 하시느라고 나는 관심 밖에 있지.”
줄리는 또 잠잠했다. 하늘이 낮아라고 좌우에 높다랗게 솟은 돌무더기 건물에서 발산하는 뜨거운 김 때문인지 날씨는 홧홧하게 더웠다.
“알았어. 리 버사이드라인으로 몰려 는 거지?”
“그래요.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게 터져오는 거 같아서 강바람이나 쐬면 날까 하구요.”
툭 터진 하이웨이에 나오자 줄리는 악셀레타를 밟는 발에 힘을 주는 듯하더니 차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른편으로 높직이 숲과 이름난 건물들이 뒤로 뒤로 빠르게 물러나고 왼편으로는 나직이 허드슨 강이 은빛 물줄기를 번뜩이며 번개같이 달려들며 지나쳤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가족이나 애인을 태운 각색 각 모양의 자동차들이 열심히 달려가고 따라오고 하여서 마치 말없는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줄리는 거대한 워싱턴 브리지로 접어들었다. 강바람이 금발을 자유로 난무시켜서 줄리의 옆모습이 머리칼로 덮였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은 말이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뉴저지로 갈려구?”
“글쎄요. 맘 내키는 대로…….”
“설마 납치하진 않겠지.”
“호호 두려우세요? 정말 납치해버릴까 봐. 귀국 못 하시게…….”
“하하 그럴 용기가 있을까?”
“어머!”
줄리는 후딱 얼굴을 돌렸다. 금빛 머리칼 속에서 커다란 눈이 순간적이나마 번쩍 빛났다.
“참말 단행 한다면?”
“그건 그때 당해봐야 알겠지.”
“그렇겠죠. 네, 잘 알아 모셨습니다.”
줄리는 다시 정면만을 보고 핸들을 놀렸다. 다시 좌우로는 쩜점이 떠있는 배가 한가롭게 보였다,
다리 건너서 줄리는 녹지대 한쪽으로 차를 세웠다. 거기에도 쌍쌍이 놀러온 연인들이 너무 그늘에다 강가 난간에서 그들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정균이 먼저 내려서 운전대 쪽의 문을 열고 줄리의 손을 잡아 내렸다. 울긋불긋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화단 가를 돌아 그들도 짙은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닥터 신!”
무심코 풀잎을 뽑아 던지고 있던 정균은 억양과 음색이 달라진 줄리의 부르는 소리에 눈을 들었다. 새파란 광채가 이는 그리고도 호수처럼 맑고 깊숙한 눈이 정균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 본국에서 약혼이나 결혼을 하구 오실 거라구요.”
“누가 그런 말을 해?”
“어머니께서 그러시던 걸요.”
“언제?”
“어머닌 나를 대할 때마다 그런 암시를 주셨어요. 그래서 난 어머니를 무서워하죠.”
“…….”
하기야 어머닌 줄리를 늘 꺼려한다. 어머니나 어머니의 친구들이 미국에서나 본국에서 얌전한 규수를 아무리 천거해와도, 사진이건 실물이건 한 번만 보면 씻은 듯이 그 사실을 잊고 마는 정균의 그 이면에는 튀길 듯이 발랄하고도 총명하고 아름답고 의젓한 줄리가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저 여행 떠나기 전날 왜 거기 들리잖았어요? 그때 분명히 그런 언질을 주시던결요.”
“그런 말 할 틈이 그때 있었나?”
“닥터 신이 학교에서 좀 늦게 오지 않았나베?”
“참 그랬군.”
“어머니 말씀에 본인의 의사는 얼마쯤이나 첨가됐죠?”
줄리의 푸른 눈동자가 정균의 눈을 파고드는 듯했다. 정균은 그 눈을 그윽히 마주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뒷 숲속에서는 이상한 새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줄리! 모든 결론은 오직 시일이 정해주는 거라고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과학자다운 대답이시군요.”
비꼬는 듯이 한 마디 던지고 줄리는 아까 정균이 하던 대로 풀잎을 뽑아 던지곤 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고 정균을 일별한 후에 조용히 일어섰다. 벌레 소리가 갑자기 두 사람을 감싸는 듯 왁자하게 일어났다.
“인제 가보실까요? 어머니께서 기다리실 거에요.”
줄리는 제가 앞서서 차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줄곧 대화가 없었다. 줄리는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했고, 워낙 말수가 적은 정균은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떠나시기 전에 아버지가 한 번 초대하신댔어요. 그때 뵙기로 하죠.”
정균의 아파트 앞에서 헤어질 때에야 줄리는 그런 말을 했다.
“아니 그대루 가기야? 싱겁군.”
별수 있느냐는 듯이, 길에 내려서 있는 정균을 후딱 돌아보고 줄리는 떠나버렸다.
그들의 예상대로 어머니 신 여사는 정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이 아니라 소파에 팔짱을 끼고 잔뜩 긴장해서 따질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너 줄리랑 어디 갔었니?”
“가긴 어딜 가요?”
“아 내가 봤는데 그래? 창에서 내다보니까 주차장에서 줄리가 널 태우구 달아났단 말야.”
“리버사이 다인으로 드라이브만 했지요 뮐.”
“그게 그리 오래 걸려?”
성질이 괄괄하고 개성이 강한 어머니의 눈빛이 완연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점심 들구 돌다가 왔을 뿐인데요 뭘.”
강의실에서는 사자라는 별명을 돋는 물리학박사(理學) 신정균도 칠십이 가까운 어머니의 앞에서는 어리숙한 막내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너 주의해 괜시리. 이번에 본국에 가면 약혼시키고 말 테니까 말야. 줄리를 위해서도 지나치게 친밀해선 안 된단 말야. 알아듣겠니?”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셔요? 줄리는 은인의 딸이고 어려서부터 남매처럼 정답게 지내왔지 않아요?”
“은인의 딸인 줄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넌 국제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남성이란 말야. 알아듣겠니?”
어머니는 절대란 말에 강한 악센트를 붙였다. 일생을 조국을 위해 바쳐온 애국자의 아들이 외국인의 아내를 얻는 것은 수치요 배신이라고 어머니는 입 버릇처럼 뇌이며 은근히 줄리와의 사이를 경계해왔던 것이다.
“어머닌 남녀 교제가 꼭 결혼을 목적으로 한다는 그 관념을 버리셔야 해요. 이번에도 그렇죠. 어떤 여성을 혹 소개받는다면 교제로 그친다거나 우정으로 이어간다거나 그렇게 자연스러운 발전에 맡기셔야지 강제로 결혼과만 결부시키려드시면 또 실패하시고 말 겁니다. 일생을 반려로 살아갈 상대를 어떻게 한두 번 상면에 결정지을 수 있어요? 그 점을 미리 머리에 두시고 귀국하셔야 합니다.”
신 여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앉아 있는 정균과 딱 마주 서서 선량하게 생긴 아들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훤칠한 이마에 빚은 듯이 오똑한 코, 시원한 저 큰 눈 어디에 그런 옹고집이 들어 있는가. 매사에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게 받드는 효자라고 칭찬받는 아들이지만 결혼에만은 제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엔 감쪽같이 들어버린 처녀도 정균에게 보이기만 하면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으니까…….
“난 오직 너만을 믿고 살아온 어미야. 행여 객지에 네 고생이나 덜어줄까 하고 만리 타국에서 늙은 몸이 오 년간이나 네 시중을 들어주지 않았니? 이번에 봐란 듯이 널 데리고 나가 좋은 배필을 짝지어서 미국에 보내자는 것도 다 널 위해서지 내가 봉양을 받자는 거냐? 나야 홀로 본국에서 살다가 언제 죽을는지…… 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다구…….”
어느새 어머니의 목이 메이며 눈물이 비축대는 것을 보고 정균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는 어머니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쇼핑하시느라고 많이 걸으셨을 테니까 좀 편히 쉬시도록 하세요.”
정균은 어머니의 등을 밀어 침실로 안내한 후에 거실로 돌아왔다. 최대형의 선풍기가 서서히 좌우로 돌아가며 서늘한 바람을 방 가득히 채워주었다.
정균은 팔베개를 하고 소파에 벌렁 누웠다. 줄리의 우울해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여름에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키겠다코 하더니만 어머니에게서 그런 정확한 계획을 듣고 갑자기 다음날 부모들이 있는 피서지로 갔던 모양이라고 정균은 혼자 짐작했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게 터져오는 거 같아서 강바람이나 쐬면 날까 하구요.’
그만큼 줄리는 괴로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계시니까 아파트로는 오지 못하고 학교 앞 그 뜨거운 자동차 속에서 오래도록 기다리던 줄리였지만 또한 싱겁게 드라이브만 하다가 돌아가고 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의혹과 쓰라림을 안고…….
‘가엾은 줄리!’
줄리는 대학 동창인 토마스의 누이동생이다. 정균이 열다섯 살 때 피난지 부산항에서 큰 배를 타고 미국 뉴욕 땅에 도착한 후부터의 고생이란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노동이란 노동은 다 했고, 심지어 여학교 기숙사의 소제부 노릇까지 치러냈던 것이다. 펭키칠 조수, 식당의 그릇닦기 그런 것들은 상류 노동에 속하는 것이었다.
몸이 건강하고 천재에 가깝도록 머리가 좋은 정균은 학문을 계속하기 위하여서는 어떤 가혹한 대우라도 비천한 고역이라도 다 견디어냈고,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학업성적을 뛰어나게 올렸던 것이다.
사실 토마스는 하이스클 때부터의 동창이었다. 몸이 허약하고 자칫 아둔한 토마스는 언제나 정균의 도움을 받았다. 시험 때는 토마스의 머리에 박혀지도록 정균이 지도하고 가르쳐주었고 그래서 대학에도 함께 진학하게 되었다고 토마스 부모의 사례도 놀라웠던 것이다.
큰 은행의 은행장인 토마스의 아버지는 대학 일학년 때 정균을 자기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줄리는 여고 일학년인 십오 세였던 것이다.
고학에서 벗어난 정균은 토마스와 줄리의 학과를 보살펴주는 그 외에는 전심전력으로 학문에 몰두하였다. 대학에서 정균은 물리학을, 토마스는 경제학을 각각 전공하였으나 아깝게도 토마스는 대학 사학년에 진급하자 마자 요절하고 말았다.
비통에 잠긴 토마스의 부모는 정균을 친자식처럼 놓지 않으려 하고 줄리는 더욱 정균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착하고도 과단성이 강한 정균은 토마스의 몫까지 성공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원 재학시에 이미 박사논문을 제출했고 이십사 세에 당당히 젊은 이학박사가 된 것이었다.
훌륭하게 독립생활을 하게 되면서 닥터 신은 아파트를 얻어 따로 났다. 토마스의 아버지 테일러 씨와 그 부인이 모든 것을 주관하여준 것은 물론이었다. 줄리는 학교의 틈이 나는 대로 정균의 아파트로 와서 가정부나같이 매사를 돌봐주었다.
줄리는 철학을 전공했다. 자기 말로는 박사까지 바라볼 수 없다면서 석사학위만으로 현재 모교의 강사로 나가고 있지만 집에는 서재 외에 굉장한 연구실까지 가지고 있어 장래의 박사로 누구나가 지목하고 있는 터이다.
하루에 한 번씩은 기어코 찾아들던 줄리가 어머니가 온 후부터는 발이 떠지기 시작한 것이다. 줄리로서야 정균의 어머니인 만큼 각별한 호의로써 갖은 정성을 다 바쳤지만 날이 갈수록 신 여사에게서 풍기는 적의 비슷한 표현이 줄리로 하여금 그 집과의 거리를 만들게 한 것이다.
“재크! 당신 어머닌 좀 이상해요.”
정균이니까 영자르 ‘J’ ‘K’ 의 머릿자의 발음을 따서 재크라는 애칭을, 줄리는 둘이만 있고 자기의 감정이 절박할 때 정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설마 질투는 아니시겠죠?”
고개를 갸우뚱하고 예쁘고 동그란 눈을 치떠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정확히 말해서 피해의식이라는 것일 거예요.”
하고 저 혼자 고개를 까닥거리면 정균은 웃지도 않고 특 내뱉었던 것이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줄리는 그 이상 그런 투의 발언은 하지 않았으나 차차 그 저의(底意)가 어디에 속한 것인가를 알게 된 뒤로는 스스로 자제를 해오다가 드디어 정균의 귀국이라는 막다른 길목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줄리의 그런 심정을 정균은 잘 알고 있었다. 줄리가 정균을 얼마큼이나 사랑하고 부모 이상으로 의지하고 싶어하는가를 절실하게 감득하는 정균의 가슴도 도저히 평온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둘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그 강 때문에 돌진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여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의 표면을 밟았다는 이십이일의 뉴욕의 거리는 온통 축제 기분으로 전 시가가 벅적벅적 들끓는 도가니 속에 들떠 있었다.
그 소란기가 약간 가신 이십오일 저녁에 테일러 씨는 정균의 모자를 그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에 초대하였다. 천평 남짓한 정원 식탁! 갖은 꽃과 나무가 고운 무늬를 이룬 비단결 같은 푸른 잔디밭! 만반의 진수는 신기할 것도 없으나 진분홍빛 드레스에 널찍한 연분홍 리본을 맨 줄 리가 그들의 서비스로 정원을 내왕하는 선연한 자태는 참으로 요정인 듯 선녀인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장래 사위감이라는 신념이 짙게 내비치도록 테일러 씨 내외의 자애로운 환담은 신 여사의 오장을 뒤틀리게 했다. 신 여사는 건성건성 상대를 하고 있다가 정균과 줄리 단둘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조용하고 친절한 웃음을 담뿍 담고 부인이 쳐다보았다.
“인제 가봐야죠.”
“오 쟤들이 나오면 곧 가실 겁니다.”
“뮐 허러들 갔어요?”
이번에는 테일러 씨가 온화한 풍채로 호인다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둘만의 속삭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인? 참 좋은 땝니다. 우린 쟤들을 축복해줘야 합니다.”
신 여사는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으나 축복이라니 어림도 없다고 속으로 타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자가 돌아올 때 테일러 씨는 정균의 손을 세게 흔들며,
“정균 아니 닥터 신! 넌 바로 금의환향이다. 십오 년 만의 환국인데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라니. 좌우간 잘 다녀오너라. 팔월말에 오겠지?”
하고 막대한 전별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정균은 내일 밤 여덟시까지 줄리와 학교 정문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다음날 저녁밥을 먹은 후에 정균은 신 여사에게 학교 사무실에서 처리할 서류가 있으니까 좀 늦게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외출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들처럼 반갑게 만나서 줄리의 차는 주차장에 두고 정균의 차로 푸로스팩 공원까지 몰아갔다. 그들은 호숫가의 언덕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만월이 아닌 달빛이 호수에 고요히 내리고 있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발자국이 박혔던 저 달을 봐요. 호호 재미있죠!”
“몇천 년의 전설도 파괴됐지.”
“무슨 뜻이에요?”
정균은 달 속에 박혔다는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전설을 설명해주고 달노래의 내용도 해명 해주면서 달노래까지 나직이 불러 들려주었다.
“정말 재미나요. 나 재크의 나라 풍속 모두 알구 싶어요.”
“차차 알게 되겠지. 그런데 줄리! 나 오늘밤에 아주 중대한 얘길 할 텐데 잘 들어줘요.”
“뭔데요. 재크?”
줄리는 정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심히 묻다가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약간 멈칫했지만 줄리는 다시 말했다.
“어서 들려주세요. 재크!”
“난 한 살 때 이미 고아가 됐었어.”
중대한 얘기라면서 너무 평온하게 시작한 첫마디에 줄리는 좀 당황했다.
“무슨 말이죠 그거?”
“조용히 듣기나 해요. 선비이고 애국자이던 아버지가 먼저 병사하시고 두 달 후에 어머니가 유행병에 결려 갑자기 돌아가신 후에 난 맏누님의 젖을 얻어먹 고 목숨을 이어갔대요.”
‘어머 그럴 수가?’
그렇게 줄리는 속으로만 놀라고 있었다. 정균은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맏딸을 일찍 낳으셨기에 그 덕을 내가 본 셈이지. 단산하신 줄만 알고 있다가 우연히 늦게야 나를 얻으신 부모님은 퍽 기뻐하셨다지만 돌아가셨으니 그만이고. 난 누님의 첫애기의 젖을 땟어먹은 거야.”
‘어쩜 그럴 수가…….’
“줄리도 내 생일 알고 있지? 이월생인데 칠월에 아버지를, 구월에 어머니를 잃은 거야. 남의 젖을 나눠 먹으면서 겨우 돌을 넘겼을 때 그 소문을 듣고 지금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셨더래. 어머닌 후취로 가셔서도 생산을 못 하시고 전처의 소생만 삼형제를 키우시면서도 나를 욕심내신 거지. 그때부터 난 어머니의 막내아들이 되어서 이날까지 지극한 사랑을,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아오는 거야. 줄리 듣고 있었나?”
‘그럼요. 듣구말구요.’
담담하게 얘기를 끝낸 정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줄리를 돌아보았다. 경악해 있었던 것은 오히려 줄리였다. 속으로는 정균의 말대꾸를 하면서 입은 떼어지지 않아 잠자코 있는데,
“줄리 ! 왜 말이 없어? 들어주었느냔 말야.”
하고 정균이 또 채근했다. 줄리는 나직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재크! 안심하세요. 주의 깊게 잘 들었으니까요.”
정균은 부스스 일어나 바로 앉으며 줄리의 손을 잡아 자기의 무릎 위에 얹고 또닥거렸다.
“줄리! 난 그런 전력(前曆)을 가진 사람이야. 이번에 본국에 가서 첫번째로 할 급선무는 그 누님을 찾는 일이거든. 그래서 골육 상면을 하는 거란 말야. 난 이 비밀을 두 달 전에야 친구에게서 듣고 어머니께 추궁했더니 죄다 얘기해주시더군. 줄리! 내 과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전보다 백 배나 더 친절하게 해드려야 하겠다고 결심 했어요. 재크!”
‘고마워, 줄리!’
정균은 그 고맙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불행하고 초라한 과거를 털어서라도 줄리의 자기에게 대한 집념을 감소시키려 했던 정균은 도리어 줄리의 강력한 결의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정균은 무릎에 줄리의 강한 손힘을 느꼈다.
“누님을 꼭 뵙도록 축원하겠어요.”
“고마워 줄리! 그 동안 잘 있어, 응?”
정균의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는 줄리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해주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남녀에게 부어졌다. 둘은 서로 마주보았다.
“재크!”
“응?”
“아아, 그만두겠어요.”
줄리는 저 먼저 발딱 일어나 정균을 잠아 일으켜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장마철이라 하루도 비 없는 날은 없었지만 테일러 씨 말마따나 금의환향하는 정균을 위해서인지 말일인 그날에만은 비가 내리지 않고 맑다가 흐리다가 하기만 했다.
피난지 부산항구에서 배로 떠났던 소년 신정균은 닥터 신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까닭에 일가들은 많이 나온 모양이나 본래 번거로움과 허세를 싫어하는 정균인지라 귀국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친척 외의 출영인은 아무도 없었다.
까다로운 세관 통과를 끝내고 출구에 나오자 아버지와 형님들이 몰려오고 뒤쪽으로 미소를 머금은 젊은 여성들이 반가운 낯빛으로 정균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정균이 외국에 있는 동안 불어난 가족들 즉 형수들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낯선 친척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처음부터 꼭 구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여인 둘이 있었다. 처음부터 멀찌감치 정균의 눈에 띄었던 것이나 정균은 무심코 지나쳤다. 공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곳이니까…… 어머니가 잠깐의 틈을 타서 정균에게 속삭였다.
“전엔 꽉 덮어두었지만 네가 알고 난 다음에야 숨길 필요가 없어서 내가 미리 네 누님에게 알려두었으니까 저기 가서 만나자.”
어머니는 얼떨떨해 있는 정균을 데리고 두 여인의 앞으로 가서 오십쯤 되어 보이는 조촐한 부인을 가리켰다.
“이분이 네 누님이다.”
정균은 부인을 보았다. 울어서 눈이 부어 있기는 하나 미목이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정균의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꿈틀 움직이는 듯하더니 뻐근하게 숨결이 벅차왔다. 이 여인이 내게 젖을 먹이던 내 골육인가? 두 달 동안 밤낮으로 그리워하던 그 이가 귀국의 첫번 목적이 꿈 아닌 지금 이 자리에 이루어져서 영상만으로 그려보던 그 이가 실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누님!”
울고만 서 있는 누님의 팔을 정균이 먼저 붙잡았다. 눈 속이 시큰하더니 눈물이 돌았다. 누님은 가만히 정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또 울었다.
“자 이젠 상면이 끝났어. 내일 누님댁으로 갈 테니까 그때 실컨 울어요. 그런데 이 아가씬 누구야? 참 잘도 생겼다. 이봐요 누님! 울지만 말고 소개를 시켜야 하지 않소?”
어머니 신 여사가 과장스레 떠들었다. 심각한 장면을 부드럽게 하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비로소 누님이 미소했다.
“참 인사드려. 앤 내 시가댁 조카딸 되는 아이예요. 유수정이라구…….”
누님은 신 여사에게 곁에 서 있던 여성을 소개했다.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고 좀 화려하다 싶은 양장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는 신 여사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정균에게는 머리만 약간 숙였다. 말은 없었다.
“미스 유로구만. 참 희한하게 잘 생긴 처녀도 봤다. 우리 집에 놀러와요. 자 정균이 이젠 가봐야지. 저기서들 기다리니까 누님 그럼 잘 가요.”
정균은 누님을 돌아보고 신 여사에게 끌려가면서 생각했다. 어머닌 딱하다. 그 여자가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모르면서 미스니 처녀니 단정을 내리다니. 그러나 인물이 뛰어나기는 했다. 처음부터 그쪽이 눈에 띄었던 것은 그 여자 때문일까 혈육인 누님 때문이었을까 하고…….
다음날 오후 네시쯤 해서야 정균은 누님댁으로 향했다. 밤늦게까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환영을 받았고 이날도 아침부터 하나둘씩 찾아드는 친척들과 담소하다가 어머니의 명령대로 큰형의 전용차에 실려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본국에서도 이미 누님댁과 연락이 있었던 모양으로 운전수은 익숙하게 외관이 당당한 주택 앞에 정균을 내려놓았다.
미리 신 여사의 전화를 받은 두님과 조카애들은 대문까지 정균을 마중나왔다. 집 안은 꽤 넓었고, 가구나 실내장식도 윤택한 것으로 누님의 생활이 여유 있다는 것을 짐작한 정균은 미국에서 준비해온 선물을 쏟아놓았다. 누님에게는 특별히 고급 시계를 주었다.
정균은 누님에게서 형제간의 상태를 알았다. 매부의 성씨는 유씨이고 현재 모회사의 상무역에 있으며 정균의 본래 성씨는 안씨라 하였다.
형 한 분과 정균을 업어서 기른 누님이 있는데 형은 회사원으로 출장 중이고 누님은 경상도에서 살고 있어 곧 둘이 다 모여들 것이라고 했다.
정균은 십분 다행하게 여겼다. 본국에 와보니 시가의 건물과 번영은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으나 삼선개헌 반대를 위한 학생들의 데모 때문에 시국은 평온하지 못한 모양이라 은근히 불안해지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던 터에 가정적으로나마 모두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 같아 적이 맘이 놓였다.
“정균이랬지? 갓난애 땐 만득이라구 불렀었는데.”
“만득이요? 안만득! 재미 었군요.”
“너 어제 걔 봤지. 어때? 수정이 말야.”
맥주로 목을 축이고 난 동색을 대견한 듯이 바라보며 누님이 물었다.
“인물은 훤칠하더군요. 체격도 당당하구요.”
대답은 짤막하게 했지만 사실 정균은 처음 볼 때부터 그만하면 미국 어느 거리에 내놓아도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인물뿐 아냐. 매사에 나무랄 데가 없어. 성격도 머리도 취미도…….”
“뭘하고 있는데요? ”:
“S대학 영문과를 나와서 지금은 미국 상사에 있는데 어떻게 사방에서 구혼이 밀려드는지 집안에서도 정신이 없다구들 야단이시지.”
“그런 잘난 여성에게 남자가 없을라구요?”
“절대로 없지. 얼마나 얌전한데.”
“하하하 누님도, 참.”
정균은 너털웃음을 치며 안주 콩알을 한 개 집어, 던지듯 입에 넣었다.
“어찌나 놓치기 아까운지 나 혼자 안타까워하는 판에 떠억 미국 사모님에게서 편지가 왔군. 이러이러하게 되었으니 그리 알구 색시감이나 미리 구해놓으라구 까딱하면 큰일이 난다면서…….”
누님은 잠깐 말을 끊고 정균을 말끄러미 노려보았다. 정균의 가슴이 뜨끔했다. 순간 줄리의 천진스러운 웃는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미국 여자가 있다며?”
“글쎄요.”
“될 뻔이나 한 소린가. 아버진 애국자시고 선비이셨어. 일찍 돌아가신 것도 항일운동하시며 지독한 고문을 당하셨던 까닭이지. 그런 집안에 외국 며느리라니. 돌아가신 부모님 혼령도 슬퍼하실 거야.”
누님은 머리를 숙이고 숙연하게 앉아 있었다. 정균도 그 분위기에 횝쓸렸다. 철들면서 처음 당해보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누님은 한숨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딱하긴 할 거야. 애정도 맘대로 안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네 양부모님은 어떠냐? 거기야말로 너무나 쟁쟁한 애국자 집안이다. 사모님께서 널 얼마나 애지중지하신다고 그분께 불효를 해서 되니? 뚜 설혹 당자끼린 서로들 좋았다고 해두자. 그렇지만 자녀들은 언제까지나 튀기란 명칭을 못 면할 뿐더러 가족끼리도 물에 기름 돌 듯 어울리지 못한다니 그런 불행이 어디 있어?”
정균은 줄리에게 아무런 결혼의 전제를 보이거나 어떤 언질도 준 일이 없었지만 굳이 변명 할 필요도 없으리라고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절절하게 가슴에 울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부턴 수정이에게 온 관심을 쏟아왔는데 아인 정말 넘버원이야 하하.”
누님은 속언 쓴 게 우스운지 제풀에 웃었다. 정균도 따라 웃으며 손수 맥주 한 캔을 따서 죽 들이마셨다.
“그런 완전히 훌륭한 여성에게 제가 어찌 감히 배필이 됩니까?”
“너야말로 천생연분일 거야. 너 지금 삼십 세지! 수정인 이십오 세. 나이도 딱 들어맞구. 참 수정이 아버진 대학 교수시니 좀 좋으냐?”
과연 모든 조건은 신기하게도 우수하게 맞춰졌다고 할 수 있다. 거짓 같은 참의 현실이 정균에게 걸려든 것이다. 대청에서는 잔잔한 소리를 내며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부자가 울리고 대문이 울리더니 정원이 환하게 수정이 들어섰다. 누님이 깜짝 반겼다.
“이제야 퇴근하는 길이군. 이리 올라오너라. 자 여기 여기!”
누님은 수정을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 했다. 수정은 손에 꽃을 들었다. 연분홍과 흰빛의 카네이션 묶음이었다.
“가만. 이 꽃 좀 꽂아놓구요.”
음성이 맑았다. 정균의 곁을 살짝 스쳐가는 수정에게서 카네이션 향기인지 그윽한 향내가 풍겨왔다.
정균과 수정의 교제는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비오는 날은 그대로, 맑은 날에는 또 그대로, 그들의 대화에는 서로 통함이 있고 애정에도 막힘이 없었다.
그러는 어느 날 테일러 씨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다. 줄리가 매우 아파서 입원 중인데 헛소리로 재크만을 찾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급보이었다.
정균은 당황해하였다. 테일러 씨는 아버지 이상의 은인이요, 누이동생보다 더 귀중한 줄리인 것이다. 만리 타국에서 쓰라린 눈물을 닦아준 사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아닌 토마스였고, 그를 오늘의 성공의 길로 밀어준 사람도 아무도 아닌 테일러 씨였다. 또한 외롭게 쓸쓸한 때나 신변의 잡다한 일까지도 도맡아 처리해주고 위로해훈 따뜻한 손길 역시 아무도 아닌 줄리의 것이다.
어머니는 모르는 척하라 하였고, 형들 아버지는 우선 위문 전화를 하고 차차 떠나도록 하라 하였다. 누님과 형수들은 어서 약혼을 하고 가라고 했다.
“약혼을 어떻게 그리 쉽게 합니까?”
“요샌 보름치기로 약혼에 결혼을 치르는 세상인데 뭘 어때?”
정균과 수정은 보름 동안 사귀어온 것이다. 무리라면 강행 할 수도 있지만 줄리의 목숨이 경각에 있다는 지금에 정균으로는 차마 못 할 비정(非情)의 행위인 것이다. 정균은 수정에게 직접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가셔 야죠. 어서 줄리 양의 병을 먼저 회복시켜주셔야 해요.”
“수정 씬 좋은 신랑감 나서면 결혼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저야 아무래도 좋아요. 닥터 신 좋두룩만 하심 되잖아요? 감정을 어떻게 막습니까? 빨리 가시도록 하세요.”
관대하고 고마운 격려라고나 할까. 조금도 비꼬거나 허위의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 않은 진정이 서리었다.
정균은 드디어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삼일 후에 도착한다는 전화도 테일러 씨에게 직접 걸었다. 떠나기 전날 정균은 누님에게 갔다. 긴히 전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거 가지고 가거라.”
누님은 갸름하고 납작한 상자갑을 정중하게 정균에게로 밀었다. 열어보니 산호와 비취와 밀화가 한데 엉겨 있었다.
“이건 할아버니께서 아버지께 남겨주셨던 거야. 수정이랑 밀화로 꿰어 만든 이 기다란 것은 할아버지의 갓끈이었다. 끝에 달린 이 밀화구슬들을 봐라 얼마나 화사한가. 여름이면 쓰시던 거야.”
누님은 숨을 돌리고 이번에는 산호 구슬로 목걸이처럼 길게 만든 것을 집어 들었다. 양쪽에는 천도(天桃)와 나비 모양의 파란 비취 네 개와 비단실의 수술이 달려 있었다.
“이건 할머니께서 쓰시던 아염의 장식이래. 요샌 이런 보물이 썩 귀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것 가엾은 만득이에게 꼭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지성껏 간직해뒀던 거야. 네 색시에게 주려구 말이지. 그렇지만 이걸 그 외국 여자에게 주라는 건 절대 아니야. 잘 보관해두었다가 꼭 이걸 가져야만 할 신부감에게 직접 전하라는 거지. 너도 이걸 볼 때마다 조상님과 내 나라를 잊진 못할 거다. 알았지. 귀중한 유물이니까 잘 간수해!”
정균은 누님에게서 받은 할아버지의 유물을 소중하게 들고 일어났다. 정균은 비로소 함부로 끊지 못할 어떤 줄에 묶인 듯한 자신의 중량을 헤아리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섰다.
(1969년)
2016년 12월 1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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