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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기지 전경과 지하벙커의 |
결국 북베트남군은 1,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슈안 작전은 실패하였다. 미군은 역사적으로 2차 대전과 한국전쟁 등 낮선 곳의 첫 전투는 패배하였는데 베트남의 첫 전투는 비록 24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승리하였다. 베트남 전쟁사에 있어서 미군이 베트콩하면 제일 진저리 친 것이 무엇일까. 미군은 베트콩과의 직접적인 교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를 굳힐 수는 없었다. 격전 끝에 적을 몰아내면 남는 것은 농민들뿐이었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농촌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정글 속에 숨어 있던 베트콩이 다시 나타나 농민들에게서 곡물을 거두어 갔다. 미군은 아무리 전투에서 이겨도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의 삼각 지대, 한국전쟁에서 평강(平康)을 정점으로 김화(金化), 철원(鐵原)을 저변으로 하는 지역을 철의 삼각지라고 명명했던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이공 20마일 북방에 있는 벤캇, 벤 쑤억, 푸 추옹 등 3개 지점을 연결한 약 40평방마일의 정글이 우거진 지역을 철의 삼각지라고 불렀다.
미군은 사이공 북쪽 20마일에 있는 벤캇, 벤 쑤억, 푸 추옹 등 3개 지점을 잇는 40 평방마일의 정글을 철의 삼각지대라 불렀다. 앞서 설명을 하였던 지금 관광코스로 가는 꾸찌 터널과 벤딘터널 동네를 말한다. 이곳은 월맹군이 대 프랑스 전쟁을 할 때부터 사용하던 곳으로 철의 삼각지대에는 수천 명의 군인을 수용하고 수개월치의 무기와 식량을 숨긴 지하터널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베트남군과 미군이 몇 차례 소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미군은 이곳에 고엽제를 살포하고 정글을 불사르는 등 온갖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으나 땅속에서 베트콩 1개연대가 순식간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발을 들여놓기 싫은 곳이 되었다.
1965년 미 173 공수여단과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이 이곳을 공격해 지상을 불사르고 수많은 적을 죽이거나 생포하고 발견된 터널 입구를 폭파하거나 휘발유를 붓고 불살랐다. 연합군은 엄청난 무기와 문서를 노획하고 지하요새를 분쇄했다고 선언했지만 불과 3일 만에 지하요새의 기능은 회복되었다. 1967년 1월 미군은 2개 사단과 1개 공수여단과 기계화 여단과 B-52의 융단폭격까지 동원해 지하요새 섬멸작전을 펼쳤다. 좁은 땅굴을 수색하기 어려웠던 미군은 터널을 폭파하고 불도저로 밀어 묻고 땅을 거대한 롤러로 다졌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북베트남군이 나타났고, 일주일 뒤에는 지하요새의 모든 기능이 복구되었다. 권투경기를 보다보면 공격을 하다 안 넘어지니까 공격하던 친구가 나중 지쳐 떨어지는 양 바로 이 철의 삼각지가 그런 형세였다. 당연 미군으로서는 난공불락인 이곳이 제일 두렵고 지겨운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트콩은 무엇이 제일 넌더리가 났을까. 적의 밀집부대 폭격으로 적의 공격 기도를 무산시키고 적의 침투를 차단하는 등의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는 전술적인 임무를 기상에 관계없이 주야 폭격이 가능한 B52 폭격기. B-52의 폭격은 베트콩에게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었다. 고공에서 폭격하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고 육안으로 식별할 수도 없었다. 과연 위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온갖 고통과 신고를 참고 견디었으나 B-52의 폭격에 의한 소름이 끼치는 공포보다 더 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폭격 중심지에서 1㎞ 떨어진 곳에 있어도 고막이 찢어져서 정글 거주자의 대부분은 영원히 청각을 잃었던 것이다. 중심지에서 반경 1㎞ 이내에서는 보강공사가 되어 있지 않은 엄폐호의 벽은 모두 무너져서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면 생매장이 된다. 가까이 가서 폭탄이 떨어진 곳을 살펴보면 직경 10m, 길이도 그 정도 될 성싶은 구덩이가 패어져 있다. 폭격 후 몇 시간 만에 돌아와 보면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식량, 의류, 보급품, 서류 등 본부시설에 있는 모든 것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 소련의 파견단이 찾아왔을 때의 일인데 그때 공습직전에 경보가 내렸다… 그들은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는데 경련이 일어난 증거임이 틀림없었다.”
1965년 11월 이아 드랑(Ia Drang) 전투 시에 B-52가 지상군 작전 지원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지원소요가 증가하자 폭탄 적재량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B-52를 개조하였다. 개조된 B-52D는 항공기 내부에 500파운드 폭탄 84발, 날개 밑에 500파운드와 700파운드 폭탄 24발을 장착하여 총 108발을 적재할 수 있었다. B-52의 지원 소요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태국 사타히프(Sattahip)에 있는 공군기지에 B-52기지를 설치하여 괌에서 12시간 걸리는 시간을 2~5시간 내에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1966년에는 월 800쇼티가 지원되었으나 1968년 2월에는 월 1,200쇼티까지 지원되었다. 실제로 북베트남군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B-52의 폭격이다. 이 폭격은 케산의 해병을 구했고 75년 베트남의 함락시 북베트남군이 수도 사이공의 진입을 스스로 늦출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미 해병대 최대의 격전지는 라오스 국경에서 10km 떨어진 고산지대의 작은 마을 케산 이다. 원래 이곳은 미군 그린베레의 훈련을 받은 산악부족이 지켜왔지만 67년부터 활동이 늘어난 북베트남군을 견제하기 위해 해병 3사단이 파견되었었다. 케산에 수송기 C-130까지 이착륙할 수 있는 방어기지가 구축되었다. 1년 내내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산악지역이 전략적으로 큰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구정공세가 바로 이 케산 전투와 관련이 있다. 68년 1월 21일 북베트남군은 구정공세를 은폐하려는 양동작전으로 2개 사단을 동원해 케산을 공격한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해병대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치열한 백병전도 일어났지만 구정 대공세 이후에는 간헐적인 포격만 했다. 남베트남 석권에 실패한 북베트남군은 마치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드는 양 케산의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겠다고 잔존병력을 집결시킨다. 미국 언론도 케산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보도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화력은 프랑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미군의 B-52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북베트남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B-52의 융단폭격은 1km 밖의 참호 속 병사가 내장파열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다. 폭격이 뜸해지면 북베트남군은 방어선을 뚫기 위해 자살공병까지 보냈고, 미군은 이들을 탐지하기 위해 지상감시 레이더까지 동원했다. 케산에선 첨단무기부터 대검까지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고립된 지역의 생명선은 보급이다. 케산의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미공군의 하루 150톤에 달하는 충분한 물자를 보급 받아 물량 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북베트남의 포격도 케산에 집중되었고 수송기의 피해도 늘어갔다.
미군 수송기는 착륙 시 활주로에 멈추지 않고 뒤쪽 해치를 열어 화물을 흘리고 그대로 출력을 높여 날아가는 방식을 채택했다. 2월 7일 새벽에 북베트남군 제304사단은 미 그린베레 24명과 약 900여명의 몽타냐(산악부족) 부대가 방어하는 랑베이(Lang vei) 기지에 대하여 베트남 전에서 최초로 소련제 PT-76 수륙양용전차 10대와 보병, 전차 협동으로 공격하였다. 미군의 106㎜ 무반동총이 3대, B-52 폭격기가 3대의 PT-76을 격파하면서 그린베레와 몽타냐 부대는 분전하였으나 북베트남군에게 밀려 몽타냐 부대는 분산되어 버렸다. 이들은 케산 기지에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북베트남군의 역 매복을 고려하여 미 해병은 증원 병력을 투입시키지 않고 북베트남군에 항공폭격을 가하면서 14명의 그린베레와 60여명의 몽타냐 부대를 케산 기지로 주간에 헬기로 철수시켰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에 협조하는 몽타냐 게릴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된 몽타냐 게릴라들.
나머지 전차는 얼마 안가 미군의 항공공격으로 격파되었다. 미 해병대도 2월 8일 M48 전차로 진지 외곽을 돌파한 북베트남의 공격을 분쇄하기도 했다. 치열한 케산 공방전도 3월 중순부터 한풀 꺾였는데 정글 아래쪽이 송두리 채 없어지는 엄청난 화력과 끝없는 소모에 북베트남군이 지쳤기 때문이다.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육군 대부대가 헬기의 공중기동으로 포위망을 뚫고 진격해 4월 6일에는 해병대와 만났다. 미군은 도주하는 북베트남군을 101 공수사단을 동원해 라오스 국경을 따라 추격했다. 사상자수로 보면 케산 전투는 미군의 승리였다. 미군은 250명이 전사한데 비해 북베트남군은 15,000명이나 사상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언론은 미군 사상자와 엄청난 물량전을 이유로 전쟁을 회의적으로 보도했다. 베트남 전에 수십만의 병력과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 4년이나 전쟁을 끌고도 이기기는커녕 적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20만명의 추가파병 계획이 큰 반발을 일으켰다. 이후 미국 시민들이 보는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양상은 지극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케산 본진의 외곽에 침투하려는 북베트남군에 해병대 팬텀기가 네이팜을 투하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