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에서 이순신을 뵙다
한더위가 꺽일 무렵, 지진으로 한바탕 크게 흔들어주더니 태풍 ‘차바’가 제주와 부산을 거쳐 울산을 휩쓸었다. 만만하게 보았던 재해에 당한 꼴이다. 피해가 큰 울산은 호들갑만 떨던 보도매체와는 달라서 그들이 보여준 복구의 모습은 한국인다웠다. 지난 10월7일 즈음에 체전이 아산에서 열리는 것도 모르고 현충사와 이충무공 묘소를 다녀왔다.
사진 현충사에 참배 온 일본 어른여자들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충의와 구국의 위업을 선양한 충무공을 모신 현충사의 정문 앞 광장은 넓고 담장은 잡인의 범접을 막은 듯 높았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교육관과 전시관 두 동인데 공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은 조립식 같은 현대식 건축물이었다. 안으로 들자 해전도가 우리를 맞는다. 노량,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울포 한산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승리했지만 당시 나라는 울산을 휩쓸고 간 일회성 태풍보다 더 참혹한 7년 전쟁이 아니었던가.
전시장에는 공이 남긴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이 400여 년의 시공간을 버티고 그때의 사실을 간직하고 있었다. 눈에 띈 것은 忠武李公戰陣圖이다. 말로만 듣던 鶴翼陣圖, 曲陣圖, 圓陣圖, 下方營圖가 관심을 끌다.
스페인태권도라 쓰인 노란 유니폼을 입은 스페인 관객 20여명이 몰려들 왔다. 전국체전에 초청된 일행들인가 본데, 웅성 되는 모습들이 탐탁치들 않은 표정이다. 해설자가 없으니 그 공간에서 뭘 보고 느끼고 갈는지.
충무문을 나서자 정려와 연못이 있는 자리엔 펜션을 쳐 공사중이었고 멀리 우람한 반송이 객들을 맞이하다. 홍살문을 지나 충의문을 들자 높은 계단은 엄숙함으로 몰 듯 경사가 심했다. 참배를 드리자 공의 영정이 남은여생 어영부영 대지 말라 하신 듯 정적만 감돌다. 영정을 모신 닫집은 불전에서나 보던 것으로 좀은 어아 했다.
그때 일본 어른여자 3명이 사당을 살피다 돌아들 선다. 임란 때 왜군들의 후손일까? 끌러간 포로들의 후손일까 상상만하다 홍살문쯤에서 헤어졌다.
아산은 공의 외가와 처가가 있었던 곳이다. 공이 살았던 집은 21세에 혼인하여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이다. 口자형으로 안방에는 작은 쪽방이 있었다. 낮에는 침구장으로, 밤에는 요강을 두고 이용한가 보다. 고택 옆으로 공의 후손들의 유택들이 자리하고 가까운 거리에 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사진 공의 고택과 안방
공은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나 유년기는 아산 외가에서 자랐다. 공의 영특함이 상주 방씨 댁에 소개되어 장가들었다. 장인 방진(方震)은 문과보다 무과를 권해 무예를 배웠다. 28살 늦은 나이에 훈련원 별과에서 무관으로 뽑혔다. 그 후 얼토당토않은 모함에 관직도 삭탈하고 투옥을 당했어도 끝내 반역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다 1598년 11월19일, 54세로 전사했다. 시신은 남해도 가묘에서 고금도로 모셨다가 이듬해 아산 금성산에 안장하다. 1614년 응봉면 어라산으로 이장됐다 한다.
공의 행적이야 여수, 통영, 남해, 거제, 한산도 등 남해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아산 현충사에서는 공의 행적을 볼 수 있고, 공의 묘소에서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하였다. 현충사에서 10분 거리다.
송림에 에워싸인 공의 묘소가 한 눈에도 엄숙하고 시원스럽다. 묘소 어귀에 1998년, 순국 400주년에 후손들이 세운 비에 ‘贈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임란 후 1등 공신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와 공의 내외를 합장함을 알려주었다.
사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
묘소는 울창한 송림을 띠로 삼고 곡장을 둘렸다. 묘 앞으로 아담한 석등을 두고 좌우로 각각 동자상, 석양상, 문관상, 망부석이 자리하고, 특이한 것은 둘레석에 둘러가면서 전서체로 ‘向 有明水軍都督 朝鮮國 贈 領議政 德豊府院君 行 三道節度使 兼 忠武 德水李公之墓 貞敬夫人尙州方氏祔左’ 음각해 놓았다. 여느 왕릉에나 원에서도 볼 수 없는 사례로 희기한 모습이다. ‘有明’는 ‘명나라에 있어’ 란 뜻이다. 조선은 상위의 관직들도 명나라에 보고된 모양이다. 약자의 모습도 자랑스러웠던가 보다. 각자 방식대로 묵념으로, 큰절로, 합장으로 예를 표하고 휘적휘적 내려오니 안내소에 아산시 전국체전 개최기념으로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라는 학습지를 비치해 두었다.
내용인즉 1.장계란 2.이순신장군의 전투보고서 3.일기와 장계는 무엇이 다를까요? 다음 글들은 일기일까요? 장계일까요? 하고 물었다.
❉여러분은 오늘 현충사에 왔어요. 현충사에 온 과정, 현충사에 본 것들을 가지고 부모님께 징계보고서를 써 보아요.
❉이제는 현충사에 온 오늘 일기를 써보아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글과 내가 보는 글의 차이를 알았나요?
학생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고 노장들에게도 좋은 공부 거리가 아닌가 싶다.
일행의 반 정도는 무릎이 아프고 거동이 불편하여 참배 하지 못함을 헤아리지 않고 늦게 옴이 미안했다. ‘100세 인생’에 목청을 돋우어도 세월한테는 이길 장수가 없나 보다. 하지만 공의 충의만은 닮았으면 한다.
청원분기점로 접어들자 가을비가 또 내린다. 속리산휴게소에 들려 남은 정담들을 풀고 버스에 오르자 TV에 비친 영상들은 가을비처럼 스산하다. 언제쯤 공의 백의종군 마음처럼 닮아들 가려나. 파업들을 풀고 나라사랑의 철들이 들려나? 모두들 제 배만 불리겠다는 이기심이라, 온종일 공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