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 성취와 자기중심성의 시대에서 인생의 비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비전이라 말하지만 비전의 출발을 자신의 욕구, 자신의 원함에서 찾기 때문이다.
참된 비전은 욕구와 원함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생의 비전은 하나님의 슬픔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을 향한 , 온 피조세계가 탄식하고 있는 시대를 향한 아픔은 그를 기도하게 하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이 홀로 가지고 계셨던 슬픔을 조금 분양해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2.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분노하시며 눈물흘리셨다.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 비통이라는 말은 분노에 가까운 말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죽음과 사망의 저주를 향한 분노였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살기로 선택된 존재들인데, 죄로 인해 죽음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슬퍼하고 분노하셨다. 죽음의 세력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혈과 육을 지니고 오셔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4) 라고 설명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5)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었다. 그 은혜의 감격이 있을 때 더이상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고 싶기 때문이다.
기도원에 2박3일 정도 기도도 하고 안식을 누리려 다녀온 교회 자매가 정오기도회 때 북한을 향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많아 나서 당황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홀로 이 슬픔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고, 둘째는 내가 너무 나를 위해서만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은혜를 나누어 주었다.
4. 예수님이 홀로 이런 슬픔을 감당하고 계셨구나 하는 고백은 어찌보면 잘못된 문장인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슬픔에 내가 동참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슬픔을 분양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걱정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그 슬픔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자매의 그 고백이 며칠 나의 기도제목이 되었다.
바울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우고 싶다고 고백한 바울의 심정이 아마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5. 온 피조세계가 탄식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이 땅은 아직도 고통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영역들이 있다. 내가 속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슬픔에 동참하여 그것을 조금이라고 해소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참된 비전의 출발이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좀 더 고생하고 싶은 마음, 그리스도를 위해 내 삶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건간한 비전의 특징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남들이 인정하는 것으로 비전을 삼는 것은 때로는 위험이다. 나의 원함 자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울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다.
6. 온전한 사랑의 추가 하나님의 무게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인생의 비전이 내 삶을 송두리채 뽑아가게 된다. 비전은 하나님의 슬픔을 분양받으면서, 그 슬픔에 동참하면서 시작된다. 인생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슬픔에 동참할 때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어두운 세상에 작은 빛이라도 비추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필요하다. 언제나 신앙의 출발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