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아프리카의 문명(African
Civilizations)
Chapter 30. 소와 금(Cattle and Gold)
소는 들판의 풀을 소유하거나 교환할 수 있고, 상속할 수 있는 부(富)로 바꾸어 주었다. 남 아프리카의 넓은 초원지역에서 새로운 가치질서가 생기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대표되는 다층화된 사회적 특징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에서 소는 기원후 1세기부터 점점 더 인간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유목 목축민들이 사헬지대와 덜 건조한 지역을 개발할 수 있게 하고, 동 아프리카 대호수(빅토리아호수) 지역에서는 사회 경제적 발전에 기여한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 무렵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소와 관련된 분쟁이 늘어 나는 것이 보인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소를 기르기 전에는 서로 싸우거나 지켜야 될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런 여건에서는 분쟁이 생긴다면 다투기보다는 분산되었다. 그러나 소가 달리 소용이 없던 풀을 소유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고, 상속할 수 있는 재산으로 바꾸어 주었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가 나타나고, 사회 계층화가 이루어 지면서 집단간에 충돌이 늘어나게 된다.
아프리카 남쪽에서 소는 사헬지역이나 대호수 근처와 다르게 이용된다. 아프리카 남부는 소가 처음으로 가축화 되었던 남부 유럽이나 근동지역의 온화한 기후와 비슷한 지역이다. 소는 온화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사헬지역이나 대호수 근처는 대단히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다. 소는 더운 곳 보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건조한 지역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어났던 온화한 지역에서 물려받은 특성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을 마시는 것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외에도 체온을 유지하는 역활도 하게된다. 소의 물 섭취는 온도에 비례해서 늘어나게 된다. 한 연구에 의하면 기온에 따라 소의 오줌의 양이 5배까지 많아 지는데 하루 배출량이 25리터에서 125리터까지 늘어 나는 것이 관찰되었다. 또 선택 교배를 통해 이틀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살아 남을 수 있게 개량되었지만 그 경우 먹는 양이 줄고 급격히 쇠약해 졌다.
짐바브웨에서 남 아프리카에 이르는 남위 15도에서 35도까지의 지역은 풀이 무성한 사바나 기후 지역이다. 오래된 화강암으로 된 토양은 대호수 지역의 화산 토양보다 덜 비옥하지만 소가 좋아하는 사료가 풍부한 곳이라서 '진짜 최고의 풀밭'으로 불린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수렵, 채취가 이루어져 왔던 곳이다.
림포포 계곡의 마풍구브웨는 AD 300년 경 부터 정착이 시작된 곳이다. 그러나 발굴된 내용에 의하면 10세기 쯤부터 농업활동이 활발해 졌고, 그 바탕에는 소가 있었다.
AD 900~1300년 간은 이 지역의 기후가 온화한 시기였다. 20세기 들어서 '격심한 가뭄'으로 사람이 살기 어렵게 변했지만 그 시절에는 수천명의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늦어도 1175년에는 인근 여러 지역을 차지한 국가의 수도였다.
거주지 안에서는 계층별 구분이 확연하였다. 97구의 유골이 발굴된 언덕 아래 쪽에서는 거주지와 가축우리, 잿더미 등의 흔적이 함께 발굴되었다. 따로 발굴된 12구는 거주지 언덕 위쪽에서 발굴되었는데 부장품과 여러가지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큰 차이는 당시에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던 계층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체체파리가 없어서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사헬지역의 유목 목축민들과 달리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는 우유보다 고기를 얻는 것이 소를 기르는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가축 관리방식은 물론 관련된 사람들의 특징 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소가 태어 날 때 성비(性比)는 1:1인데, 우유를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들은 불필요하게 된다. 마사이족의 한 가정은 8명 정도인데 필요한 우유를 얻기 위해 최소 40마리의 암소가 필요하지만 수컷은 한 마리만 있으면 족하다. 유제품 중심 목축민의 경우에는 암소 50마리당 숫소 한 마리가 보통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숫송아지의 40%가 생후 1년 내에 '사라지는데', 암송아지는 5%에 불과하였다. 우유생산을 위해서는 수컷에게 먹일 사료가 대부분 낭비일 따름인 것이다.
반면에 고기를 얻기 위해서 목축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제약이 따르지 않는다. 태어난 것들은 다 컬 때까지 키워지고 도축되거나 팔려 나가는 수는 그 해 태어난 수와 다르지 않았다. 노동력도 덜 필요하다. 우유를 얻기 위해서는 소가 유순하게 길들여져야 한다. 아이들은 송아지를 돌보고, 어른들은 소떼를 풀밭에 몰고 가고 물을 먹이면서 맹수의 공격을 막기도 한다. 여인네들은 젓을 짜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한 사육의 경우에는 맹수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 말고는 훨씬 적은 노력이 필요하다. 젓소 목축과 육우 목축은 환경과 명백한 관련이 있다. 육우 목축은 주요 서식지에서 생산을 극대화하는 반면 젓소목축은 한계 서식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이다.
마풍구브웨 인구의 증가는 아랍상인들이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 들어 오면서 시작되었다. 10세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케냐와 탄자니아 지역에 있던 '잔지의 땅'에는 노예, 표범가죽, 거북껍질, 상아 등을 아라비아와 인도에 수출하였다. 아랍상인들은 다우선(아랍의 연안항해용 범선)을 타고 몬순 계절풍을 이용해서 잔지바르에서 300km 아래의 킬와까지 내려왔다. 그 너머로는 중개상들이 "황금밭"으로 불리던 소팔라까지 갔다. 소팔라는 아랍어로 여울목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항해에 위험한 연안을 가르켰지만 나중에는 여러 군데의 교역 거점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10세기 마풍구브웨는 이러한 교역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고, 금은 가장 수요가 큰 물건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일대에는 금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당초에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형성된 것은 금이나 무역때문이 아니었다. 금무역은 육우 교역의 부산물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루어진 발굴의 결과 총 140,000 여 점의 짐승뼈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20,359점을 정밀하게 조사하였는데 263점은 소의 뼈였다. (그 밖에 양, 염소, 개의 뼈와 야생동물의 뼈 약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뼈 가운데 80%는 가장 맛이 좋은 2년 내지 2년 반 사이의 나이에 도축된 것들이었다. 이는 당시에 육우를 생산하고 일정시기에 도축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육우는 성체가 되면 더 이상 풀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축된다. 그러나 우유를 위한 목축은 특별한 행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이가 많은 것들만 도축하였다.
젊은 소의 뼈는 짐바브웨의 건축물 인근의 패총에서만 발굴되었고 일반적인 거주지역에서는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에 사회적 차별이 있었음을 말해주며, 지배계층 혹은 왕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성안에 따로 떨어져 살면서 최고의 고기를 자주 즐기던 계층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전성기 시절 넓이가 78ha(약 23만평)에 이르고 인구가 밀집하였는데 13세기 들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14세기 들어서 큰 담장을 세우는데 평지에서 60m의 언덕에 길이 244m, 두께 5m, 높이 10m의 불규칙한 타원형 건축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지름이 89m였다. 이것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선사시대에 지어진 가장 큰 건축물이다. 교역의 거점으로 토산품들과 함께 금을 수출하던 중간상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철기 시대 후기에
짐바브웨 왕국의 수도였던 폐허 도시이다. 이 유적은 11세기에 건축이 시작되어 14세기까지 지어졌는데, 그 넓이는 722 헥타르에 달해
전성기에는 18,000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
15세기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절정기에는 최소 11,000명에서 최대 18,000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성은 거주지의 중심이었지만 그 인근의 둘레 7km까지 사람이 살았으니 도시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집들은 하도 조밀하게 들어서 있어서 처마가 닿을 정도로 밀집해 있었다.
그렇게 인구가 밀집해 있으니 엄청난 자원을 주변지역에서 공급해야 되었다. 결국 지나친 경작으로 토질이 나빠지고, 물은 부족하고 오염되었다. 화목을 공급하기 위해서 인근의 숲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에는 사회체제가 무너지고 정치권력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단지 100여년 정도 번창하였고, 15세기 이후에는 버려진 상태로 남겨져 있다. 겨우 3, 4세대 정도의 세월에 걸친 환경파괴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몇 몇 수종(樹種)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라지 않고 있다.
출처(더 많은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bhuh123/221851201603
첫댓글 아프리카 구경 잘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