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국립한국해양대학 입학, 반탁운동
리영희 평전/[3장] 해방공간의 혼란속에서 2010/05/02 08:00 김삼웅해방의 환희와 감격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미군정에 끼어든 친일파, 기회주의자들과 간상배들이 날뛰는 ‘정글의 법칙’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18세 소년이 맨손으로 살아가기에는 서울의 환경은 너무 살벌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 제복을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한국해양대학 창설과 신입생 모집의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다.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먹고 살기도 힘겨운터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리영희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7월에 입학하여 인천에서 1년쯤 다니다가 1947년 봄에 학교가 군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군산에서 교육을 받았다.
새로 창설된 4년제 해양대학은 변변한 교사도 없이 가교사에서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을 뽑았다.
제 1기생이었다. 교수진은 지극히 빈약했다. 전공학과를 제외한 교양학과는 대부분 서울의 타대학 강사들에 의존하였다. 리영희는 항해과를 지원하였다. 초기 1년 동안 인천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인천 해안가의 낡은 큼직한 일본요정 건물에서 합숙하고, 하루 세 끼 식사는 멸치국물에 밀가루 우동을 띄운 한 그릇이었다. 소수의 과거 친일파나 해방 후의 미군정청 주변에 붙어서 해방된 나라의 동포를 먹이로 삼고 반민족적 호화를 누리는 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민중은 그런 우동 세끼를 먹기도 쉽지 않을 때였던 것을 감안하면 반드시 나무랄 만한 형편도 못 되었다.” (주석 8)
1년뒤에 내려간 군산의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호남미를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도시로 번창한 도시였지만, 해방 뒤에는 여느 항구도시처럼 황량한 모습이었다. 교수들의 가르치는 것이나 식사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리영희가 생활에 쫓겨 국립해양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하고 있는 동안 해방정국의 정세는 신탁통치 문제로 국내가 소연해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시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29일 최초의 미국발 보도는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는데,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은 탁치를 주장하고 소련은 즉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 반대로 소개되었다. 진위는 어쨌거나 신탁통치 소식은 전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이 1946년 1월 2일 3상회의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 좌익의 통일전선을 이루고 우익은 환국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준비회를 열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에 합세,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면서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반민족 친일세력 대 민족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좌익.우익간의 대립구도로 바뀌었다. 친일세력은 어느 틈에 반탁세력의 중추가 되었다.
1947넌 봄이 되면서 찬반탁운동이 지방에도 번지고 군산에서도 거세게 전개되었다.
리영희는 반탁운동에 적극나섰다. <신탁통치 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를 타고 시가지를 다니며 확성기로 ‘반탁’을 외쳤다. 이것이 리영희로서는 첫 ‘대중연설’이었다.
나는 ‘반탁’데모의 대열에 자진해 나섰다. 대학생이라는 자격 때문에 이 지방도시의 학생집회에서 열렬히 신탁통치 반대와 ‘즉시독립’을 외쳤다. 무슨 연설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방된 조국의 독립을 갈구하던 18세의 청년으로서 말했으리라는 연설의 내용은 짐작이 간다. (주석 9)
뒷날 리영희는 ‘신탁통치 반대’에 관해 이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씨 집권과 그의 타락,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 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 (주석 10)
학생 신분인 리영희는 찬반탁 투쟁이나 정세의 흐름에 깊히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학교 수업에 열중하여 천문항법과 기상, 선박의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익혔다. 그리고 전공과는 다른 취미에서 영문 소설작품에 심취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영문 소설과 영시를 읽는 것으로 보냈어요. 제법 영시에 대한 실력이 붙어서, 화창한 날에는 갑판에 나와 앉아 바다나 섬이나 육지를 바라보며 책을 읽고 영시를 짓는 즐거움으로 살았지요. 엄격한 작법에 따른 것은 물론 못 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멋을 부리노라고 했던 것이에요. 19세 때구만.” (주석 11)
주석
8) 리영희, <역정>, 106쪽.
9) 리영희, 앞의 책, 107~108쪽.
10) 리영희, 앞의 책, 108~109쪽.
11) 리영희, <대화>, 92쪽.
그러던 어느날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 제복을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한국해양대학 창설과 신입생 모집의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다.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먹고 살기도 힘겨운터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리영희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7월에 입학하여 인천에서 1년쯤 다니다가 1947년 봄에 학교가 군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군산에서 교육을 받았다.
새로 창설된 4년제 해양대학은 변변한 교사도 없이 가교사에서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을 뽑았다.
제 1기생이었다. 교수진은 지극히 빈약했다. 전공학과를 제외한 교양학과는 대부분 서울의 타대학 강사들에 의존하였다. 리영희는 항해과를 지원하였다. 초기 1년 동안 인천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인천 해안가의 낡은 큼직한 일본요정 건물에서 합숙하고, 하루 세 끼 식사는 멸치국물에 밀가루 우동을 띄운 한 그릇이었다. 소수의 과거 친일파나 해방 후의 미군정청 주변에 붙어서 해방된 나라의 동포를 먹이로 삼고 반민족적 호화를 누리는 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민중은 그런 우동 세끼를 먹기도 쉽지 않을 때였던 것을 감안하면 반드시 나무랄 만한 형편도 못 되었다.” (주석 8)
1년뒤에 내려간 군산의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호남미를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도시로 번창한 도시였지만, 해방 뒤에는 여느 항구도시처럼 황량한 모습이었다. 교수들의 가르치는 것이나 식사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리영희가 생활에 쫓겨 국립해양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하고 있는 동안 해방정국의 정세는 신탁통치 문제로 국내가 소연해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시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29일 최초의 미국발 보도는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는데,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은 탁치를 주장하고 소련은 즉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 반대로 소개되었다. 진위는 어쨌거나 신탁통치 소식은 전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이 1946년 1월 2일 3상회의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 좌익의 통일전선을 이루고 우익은 환국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준비회를 열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에 합세,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면서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반민족 친일세력 대 민족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좌익.우익간의 대립구도로 바뀌었다. 친일세력은 어느 틈에 반탁세력의 중추가 되었다.
1947넌 봄이 되면서 찬반탁운동이 지방에도 번지고 군산에서도 거세게 전개되었다.
리영희는 반탁운동에 적극나섰다. <신탁통치 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를 타고 시가지를 다니며 확성기로 ‘반탁’을 외쳤다. 이것이 리영희로서는 첫 ‘대중연설’이었다.
나는 ‘반탁’데모의 대열에 자진해 나섰다. 대학생이라는 자격 때문에 이 지방도시의 학생집회에서 열렬히 신탁통치 반대와 ‘즉시독립’을 외쳤다. 무슨 연설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방된 조국의 독립을 갈구하던 18세의 청년으로서 말했으리라는 연설의 내용은 짐작이 간다. (주석 9)
뒷날 리영희는 ‘신탁통치 반대’에 관해 이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씨 집권과 그의 타락,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 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 (주석 10)
학생 신분인 리영희는 찬반탁 투쟁이나 정세의 흐름에 깊히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학교 수업에 열중하여 천문항법과 기상, 선박의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익혔다. 그리고 전공과는 다른 취미에서 영문 소설작품에 심취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영문 소설과 영시를 읽는 것으로 보냈어요. 제법 영시에 대한 실력이 붙어서, 화창한 날에는 갑판에 나와 앉아 바다나 섬이나 육지를 바라보며 책을 읽고 영시를 짓는 즐거움으로 살았지요. 엄격한 작법에 따른 것은 물론 못 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멋을 부리노라고 했던 것이에요. 19세 때구만.” (주석 11)
주석
8) 리영희, <역정>, 106쪽.
9) 리영희, 앞의 책, 107~108쪽.
10) 리영희, 앞의 책, 108~109쪽.
11) 리영희, <대화>,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