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조성 선거이 섶나무
-왜가 두려워한 날아다니는 비장군
보성 선씨 시조 선윤지는 우왕 8년(1382)에 명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와 호남안겸사로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를 물리쳤고 보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 선윤지의 8세손 선거이(1545~1598)는 종5품 의금부도사 선상의 아들로 보성 조성에서 태어났다. 1569년 왕의 경호원인 겸사복, 1579년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북병마절도사 ‘이일’의 보좌관인 정3품 계청군관이 되어 종4품 조산 만호 이순신을 만났다. 이때 이일이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한 이순신을 옥에 가두었다. 선거이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데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했고 이순신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술은 마셔서 뭐 하겠나?’라고 했다. 또 선거이는 병조판서 정언신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1590년 선거이는 정3품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종6품 정읍 현감 이순신이 축하하러 전라우수영을 찾았다. 선거이는 이순신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고, 훗날인 1595년 이순신도 선거이에게 조선 칼의 명장 언복과 태구련이 함께 만든 장도를 선물했다.
1592년 3월 17일 선거이는 종2품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4월 13일의 임진왜란 발발로 임명장을 전달받지 못했다. 이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직을 이억기에게 맡기고 ‘진도군수’로 참전하여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에 크게 기여했다. 또 이해 11월 종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오산 독산성 전투에서 승전했으나 왜군 총탄에 맞았다.
다음 해인 1593년 2월 종2품 부원수 겸 전라도 병마절도사로서 종2품 도원수 겸 전라도 관찰사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 참전했다. 당시 권율의 병력은 전라 감영 소속 8백 명이고 선거이 병력은 전라 병영 소속 4천에 강화도 주둔 전라 병영 소속 8천을 합쳐 1만 2천 명이었다. 하지만 실질적 전투를 지휘한 무장 선거이의 행주대첩 공적은 문관 권율에 가려지고 말았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선거이는 ‘조선군의 병력은 적고, 왜군 병력은 많으니 조선의 모든 병력이 진주성 내로 진입했다가 포위 고립된다면, 조선군 전체가 섬멸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은 병력을 보존하여 북진을 저지하고 호남을 방위하는 것이 옳다.’라고 했고 도원수 권율은 허락했다. 그런데 전투 뒤 조정은 ‘명령 불복종’ 징계를 내리며 권율은 빼고 선거이에게만 적용했다. 당시 영의정 권철은 권율의 아버지, 병조판서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였으며 또 문관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에 지난 독산성 전투 총상 후유증과 풍습병에 시달리던 53세의 선거이는 다시 전쟁터로 나갔고 왜군은 날아다니는 비장군이라며 두려워했다. 1598년 1월 제2차 울산성의 왜란 마지막 육상전투 때 적의 수급 50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총탄에 순국했고 시신도 찾지 못했다. 이순신도 같은 해 1598년 11월 왜란 마지막 해상전투인 노량에서 순국했다.
태어남은 이순신이 1549년 4월, 선거이는 7월이니 이순신이 3개월 먼저고, 순국은 선거이가 1598년 1월, 이순신은 11월이니 선거이가 10개월 먼저다. 둘은 계급을 떠나 친구이자 전우였고 7년왜란에 육군과 해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왕과 문관들의 극심한 모함에 시달렸다.
고향인 보성 조성면 봉능리 주월산 줄기의 앞쪽 선거이, 뒤쪽 부인 여산 송씨 묘에 서면 가까이 봉두산과 저만큼 취령산, 더 저쪽 고흥 팔영산과 운암산, 펼쳐진 예당들과 바다이다. 또 땔감인 물걸이나무 등 섶나무들이 민초처럼 묘터를 지키는 건 장군의 애민사랑 뜻인가 싶다.
풍전등화로 세상을 이끄는 어리석은 혼군이 설치는 세태일수록 민초를 위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친 영웅이 그리운 법이다. 한동안 산과 들, 바다를 바라보니 더욱 장군이 그립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전남 보성 조성 선거이 섶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