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5. 주일예배설교
잠언 1장 20~33절
이 현장과 지금의 현실을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 살면서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자본주의 사회니), 힘/권력(억울한 일을 당해보면), 건강(큰 병을 앓고 나면), 친구(심심하고 외롭다고 느껴질 때), 지혜(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등과 같은 막막한 경험을 하고 나면).
자, 이 중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필요의 정도에 따라 순번을 정해 놓으셨나요? 아마 각자의 경험에 따라 필요의 순위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순위도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의 정도는 상황적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일순위가 있습니다. 아니, 일순위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지혜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여부에 따라, 돈도, 힘/권력도, 건강도, 친구도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시대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가장 필요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일, 모든 법칙, 모든 흐름, 모든 일정, 모든 성격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은 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의 지혜이자, 유일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시대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가 돈도, 힘/권력도, 건강도, 친구도 좌우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혜가 무엇보다 ‘절대 필요’임을 인정했다면, 지혜를 얻고,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를 찾고, 구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매우 근본적인 길을 안내합니다.
■ 지혜서로 일컬어지는 ‘잠언’은 어떤 처신이 바르고 행복한 처신인지 안내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결정이 양심적이고 신앙적인 결정인지를 안내합니다. 이 모든 안내를 시작하는 1장은 지혜에 대해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개념을 7절 상반절에서 설명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지식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고, 이렇게 얻은 지식이 지혜다.’
그렇습니다. 지혜의 근본적 개념, 일차적 개념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를 얻는 데 필요한 첫 번째 태도/관문일 뿐입니다. 이어 필요한 태도가 있는데, 하나님의 지혜를 듣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지혜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혜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고, 성경이 지혜 문서이니 지혜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는 장소가 현장이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이 현장이고 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현장과 지금의 현실을 안내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하나님의 지혜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며 기독교를 이상주의자들의 종교로 치부(置簿)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지혜는 현장을 여기 세상이 아닌 저기 하나님 나라에 둔다며 기독교를 저세상의 종교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혹자들의 판단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상론자들의 저세상적 말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여기 길거리와 광장과 시끄러운 길목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지혜입니다.
이렇게 혹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비평하는 데는 속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확하고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22절입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이렇게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들키고, 자신들의 거만함이 들통나고, 자신들의 미련함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대단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떠들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 발각되니, 하나님의 지혜를 폄하하고 비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24~25절이 고발합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어리석고, 거만하고, 미련한 도덕적 결함자로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의 바르지 않은 비도덕적 지식과 지혜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24~31절이 이를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부적합 판단에 이어 심판까지 받은 자들이 내놓는 지식과 지혜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그리고 도덕적 결함이 있는 미련한 자들의 주변을 기웃거려도 안 된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23절 상반절입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참으로 우리가 긴장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이 소리 저 소리가 마구 섞여 있는 복잡한 길거리와 광장과 길목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긴장은 고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긴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긴장인 이상 여기에 부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3절입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자, 무슨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입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순간, 이 소리 저 소리가 마구 섞여 있는 복잡한 길거리와 광장과 길목이 하나님의 영광의 거리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소음 중에 하나님의 지혜가 선명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바르게 읽히고, 정확하게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치 ‘스크립투라 콘티누아’가 바르고 정확하게 읽히듯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책은 띄어쓰기가 정확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책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른 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모든 문자가 붙어 있는 형태)라고 합니다. 이는 7세기 이전까지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는 글이란 말을 옮긴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소리내어 음률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띄어 읽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소리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처럼 여겨집니다.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야 어디를 띄어 읽어야 할지가 보이고, 그래서 무슨 지혜의 말씀을 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이 약속을 주장해야 합니다. “내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옵소서!”
이렇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 듣고 그 지혜를 따라 살 때, 부어 주시는 또 하나의 선물이 있습니다. 32~33절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무슨 선물인가요? 그렇습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삶의 선물입니다. 재앙의 두려움 없이 안전한 평안의 삶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듣고자 하는 거룩한 긴장감에 주시는 복된 선물은, 두려움의 긴장에서 풀리는 은혜입니다. 이 선물은 긴장과 갈등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얻는 선물 중 가장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은혜의 삶을 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거룩한 긴장감과 신실한 태도를 고수해야 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그리고 도덕적 결함이 있는 미련한 자들이 내놓는 지식과 지혜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듣기 위해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거룩한 긴장감이고 신실한 태도입니다.
■ 오늘의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불투명한 시대를 올곧고 신실하게 살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이는 삶은 무질서와 불안으로 가득 찰 뿐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는 날 동안 분명히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영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아침에 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수 중에, 식사 중에, 출근 중에, 모닝커피 타임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혹시 지나야 하는 광장이나 시장통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듣게 될 것입니다.
아침이 아닌 점심때도, 저녁때도, 밤중에도 하나님의 영이 아침에 부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중에도, 회식이나 모임의 왁자지껄 속에서도, 깊은 잠이 든 중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어디서든, 언제든, 어떤 형편이든, 하나님의 지혜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시절의 혼란과 복잡함과 불투명함에 긴장하지 말고, 거룩한 긴장감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분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 졸이던 긴장된 삶에서 벗어나, 긴장을 푼 마음을 놓고 사는 삶, 매일 안녕을 누릴 수 있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