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강물
임병식 rbs1144@daum.net
뒷 강물은 앞 강물을 밀어낸다. 장강의 앞 강물에 포인트를 맞춰보면 뒤에서 밀려오는 뒤 강물에 강물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흐르는 세월을 찰나의 순간으로 치면 그 현상은 마치 뒤 강물에 밀려나는 앞 강물과 다를 바가 없다.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고향마을을 떠올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늘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 있는데 그것은 읍내로 향하는 학교 길을 떠올리면서 발을 내 디딜 때마다 마주하던 돌부리나 실개천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방향을 바꾸어 다른 것을 더듬어 본다.
그것은 예전 한 동네에 살던 돌아가신 분들이다.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수가 만만치 않는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밖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우리 마을은 전래로 중촌(中村)에 해당하는 동네였다. 한 오십 여 호 정도로 인구가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손쉽게 명절날이면 돼지 한 마리 잡아서 고루 나눠 먹을 수 있는 규모였다. 서로 부대끼며 살면서 사람 사는 냄새도 많이 풍겼다. 한데 그런 마을이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빈집이 많아지면서 겨우 십 오 육 호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기는 고향의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삼십여 호에서 오십여 호가 모여 살았다. 그런 마을이 옹기종기 집성촌을 이루었다. 우리 고을은 3개리(里)가 뭉쳐져 있는데 마을별로는 모두 열일곱 곳이나 된다. 이것을 한 개리(里)로 배분에 보면 대략 여섯 개 마을로 모두가 그만그만한 마을들이다.
한데, 내가 타지에서 직장을 잡고 출장을 나간 어느 마을은 면소재지도 아닌 데도 무려 삼백여 호가 넘은 집들이 모여있어서 깜짝 놀랐다. 고흥군의 바닷가 마을. 남열리 고샅길을 접어드니 가득한 집들 속에 미로가 이어져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는 키우는 개 한마리라도 놓치면 찾기 어렵고 아이들도 놀다가 제 집으로 찾아가기 어려워보였다.
그런 곳은 사람을 가늠하기도 어렵겠지만 우리 마을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을 셈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해서 그간 돌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기로 한 것이다. 눈을 감고서 신경을 곤두세워서 열 손가락을 펴들고 천천히 꼽아본다. 헤아려 보니 그간 돌아가신 분들이 모두 일백 열 여섯 분이다. 그예 많이도 돌아가셨다.
내가 초동시절에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부모님 세대, 일찍 생을 마감한 동년배의 죽음이 포함한 숫자다. 그분들을 헤아리자니 조우하고 바라보며 옷깃 스친 면면들이 떠오른다.
농촌이다 보니 대부분이 농사일을 하던 중에 만난 모습으로, 푸나무 짐을 지고 올 때 비켜서던 모습, 소를 앞세우고 쟁기질을 하던 모습, 꼴망태를 메고 오던 모습, 머리에 수건 두르고 밭일을 마치고 오던 모습이 그려진다.
또래 중에서는 저수지에서 멱 감던 친구,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 들고 막걸리 사오던 친구의 모습도 떠오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사랑방이 아니면, 정자나무 밑이다. 어른들은 살포를 논두렁에다 꽂아두고 시절이야기를 하고 일꾼들은 숫돌에 낫을 간 후 뒷산 노거수 밑에서 한식경 낮잠을 청하던 모습이 그려진다.
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참으로 순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내기를 할 때와 벼가 수잉기를 맞아 무논에 물이 대야할 때, 물싸움으로 잠시 잠깐 다투는 일 말고는 서로 간 불화는 거의 없었다.
6.25를 전후하여 마을에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도 있었으나, 막상 조사를 나오자 ‘절대 그런 일 없다’고 가로막고 나선 사람들도 마을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이웃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여 사람이 죽어나가는 참상이 벌어졌으나 우리 마을만큼은 조그마한 불상사도 없었다.
어려서 보면 마을에는 미풍양속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서로 돕는 두레풍속은 마을사람들을 한군데 결속시켰다. 상조계(喪助契)을 조직하여 장례를 함께 치르고, 어느 가정에 환자가 생겨서 곡식을 거두지 못하면 마을사람 전체나 나서서 일을 도왔다.
십시일반이라고 한꺼번에 도우면 일은 손바람이 나서 금방 해치워졌다. 나는 그 협동의 위대함을 어느 집에 불이라도 나면 다투어 양동이를 들고 나와 불을 끄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붕에 오른 장정이,
“어여, 물을 올려요”
하면 밑에 늘어선 사람들은 릴레이로 양동이 물을 전달했다. 그래서 불은 나지만 전소가 되거나 폐가지경에 이르는 집은 없었다.
그런 분들이 지금은 거의 돌아가시고 아니 계신다. 아니 계신 것이 아니라 고향 산자락 양지 녘에 자리 잡고 영면해있다. 어느 묘지는 돌보는 이가 없어 봉분이 낮아지다 못해 흔적조차 없어지고 다른 사람 무덤도 잡초 속에 묻혀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아서 돌본 이가 있는 무덤만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무덤들을 생각하면 살아생전 순박한 웃음을 웃던 모습들이 스쳐간다.
“진지 자셨는가요?”
“이제 들어가 묵을라네”
먹고사는 것이 지상 최대의 숙제이던 시절. 입성 허술하게 지내면서도 서로의 배곪음을 걱정하던 모습.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당시 농가에서는 돈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논마지기 지어보았자 식량하고 나면 내다 팔 쌀이 귀하여 부업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전답이 많은 사람은 대마를 경작하여 삼궂을 놓아 삼을 쪄서 중간 형태로 내다 팔기도 했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직 새끼 꼬고, 가마니를 짜서 목돈을 마련했다.
그러느라 일꾼이 모인 사랑방에서는 한 뭇씩 물에 추 긴 볏짚을 들고 와서 새끼 꼬기에 나섰다. 그것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마분지에 침 발라 만 봉초담배를 입에 물고서 두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꼰 새끼는 가마니를 짜는데 주재료가 된다. 가마니틀에 새끼줄을 날고 홀짝수로 구멍이 다른 도리를 끼운 다음 바늘대에 볏짚을 끼어 밀어 넣으면서 한번은 앞으로 한번은 뒤로 방향을 바꾸어 베를 짜지듯이 수직으로 움직이면 부피가 늘어난다.
이것을 스무장씩 묶어서 지게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파는 광경이 볼만했다. 마을마다 그런 모습이 장사진을 이루는데 마치 티베트 대상들이 조랑말을 앞세우고 먼 길을 나서는 것과 진배가 없었다.
그런 일을 하느라 손가락 지문은 닳고 닳아 형체가 없어지고 손마디는 굳은살이 박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고달픈 노동의 일상은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새삼, 당시를 사신 마을 분들을 생각해 본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신들 때문에 후손이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생각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뒤 강물에 밀린 앞 강물처럼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지만 해방공간을 지나, 6.25참화를 견뎌온 산 역사라는 생각에 머리가 숙여진다. 가시적인 모든 흔적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활동하던 자취는 그대로 기억 속에 남아서 추억을 불러온다. (2025)
첫댓글 <앞 강물 뒤 강물> 1950~60년대 농촌의 삶이 주마등처럼 펼쳐집니다.
농촌의 일상이 그려집니다. 제가 사는 곡성에서도 그와 똑 같은 풍경이 있었습니다.
길쌈으로 삼베, 무명, 누에고치•••. 볏집으로 덕석만들고, 가마니치고, 새끼 꼬고, 망태만들고•••.농한기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 마당에 쌓아놓고•••. 모심기, 논매기, 보리•수확할 때 품앗이 눈에 삼삼합니다.
학교갈 때도 농네 회관 마당에서 땅 놀이하고 함께 책 봇따리 메고 딸랑딸랑 하며 갔던 학교 길, 정월 대 보름에는 집집마다 볏집을 거둬서 달집 태우고 사물놀이•••밤에는 친구 또래들이 마을 방에 모두 모여 얘기하고 장난치고 닭잡아 먹고, 여름에 수박 참외 설이 떠 오릅니다.저의 마을은 100여 가구가 조금 더 되는데 인구는 7~800명이었습니다. 지금은 100여명도 못되고 저 보다 나이 많은 남자 다섯명 정도이고 여자들은 한 스무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저도 소수 노인 대열에 끼였습니다. 80세 친구가 20여명이었는데 지금은 한 명 농사 짓고 있습니다.
옛날을 추억하는 좋은 글, 그 때 그 시절 그리워집니다.
서울가는 기차 안에서 잘 읽습니다.고맙습니다.^^♡
서울 가시는 장도의 길에서 글을 읽으시고 정감어린 댓글을 달아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달픈 농부들의 현실적인 삶과 서로 돕던 두레풍속의 미풍양속을 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고달픈 삶을 이어갔던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가마니틀을 마련하여 가마니를 짰는데 그것이 결코 한가롭게 보이지 않고 고달픈 삶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느껴졌습니다.
시장에 내놓고는 좀더 무게가 나가게 하기 위해 입에 물을 머금고 푸푸 품어대던 광경도 어려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옛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고 고향산천에는 여기저기 무덤만 남아서 인생사 허무함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작은 마을의 한 세월도 대하드라마로 엮어 낼 수 있읕 듯합니다 50여 호의 아담한 마을에서 선생님의 기억에 새겨진 고인이 된 이들의 수가 120이라니 장강의 앞 물결은 어디로 훌러갔는지 무심하기만 합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서로 도와가며 정겹게 살아가던 고향사람들의 면면이 덩달아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4, 50년대의 우리마을 풍경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손으로 꼽아보니 그예 돌아가신 분들이 126명이나 되더군요.
순박한 그분들이 한데 모여서 가난하지만 땀 냄새 풍기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모습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