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word-아집과 독선
1.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분쟁에 대하여
역사적 배경
근대의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터키가 패배함에 따라 U.N.에 의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결의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20). 그후 계속해서 전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현재 팔레스틴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찌의 유대인의 대량학살(1939-1947)이 자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U.N의 팔레스타인 내 유태인 국가(Jewish State)와 아랍국가(Arab State) 양분 독립안이 결정되었고,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5일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이에 불가피한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지역에 두 국가가 존재하게됨으로써 두 민족 간에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공존할 수밖에 없는 화약고
두 민족 사이에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주변의 국가들이 모두 이슬람교국들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이집트와 국교를 정상화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리아나 이라크 등 강성의 反시온니즘(반이스라엘) 국가들이 존재하면서, 그들의 형제인 팔레스틴에 대한 배려를 이스라엘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사방이 이슬람교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육로로 유럽과 교역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쪽의 시리아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해상무역을 통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육로 교역은 경제적 실리가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리아와의 국교정상화는 실리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국교정상화를 조건으로 팔레스틴의 독립국가 인정과 안녕을 이스라엘에 먼저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에서도 강성의 정치집단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시리아의 팔레스틴을 위한 제안은 정치적으로 범 아랍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팔레스틴인들은 시리아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간의 전쟁은 곧 중동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과 범 아랍간의 전쟁인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전쟁은 곧 석유 생산의 감축을 가져올 것이고, 이것은 세계경제의 손실을 유발하기 때문에 세계의 강대국들은 그 지역의 전쟁이 억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지도자들이 두 국가간의 평화를 위하여 중재를 하는 것입니다.
2. 잘못된 신관(神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은 모두 神이 자기의 편이라고 믿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곧 신의 적으로 간주됨으로 그 전쟁은 "신의 전쟁"(또는 聖戰)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신관(神觀)이 해소되지 않는 한 두 민족 간에 싸움은 끊임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재차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곧 나의 편이라는 아집과 독선이 결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를 깨드리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나와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다고 하여서 소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정죄하고 "하나님과는 상관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빙자하여 상대의 존재를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평화의 하나님
신약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정신은 이미 구약성서의 핵심이었음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중심사상인 "이웃사랑"(마 19:19)은 구약성서의 오경에서 비롯된 사상입니다(레 19:34). 또한 구약성서의 사 2:2-5; 미 4:1-5에는 "칼을 쟁기로 변형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평화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여년전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본토의 인디언을 가리켜 그 옛날 가나안에 거했던 이방민족으로, 자신들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디언을 죽이는데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며,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부합하는 것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비록 전쟁기사가 등장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싸운다고 이스라엘은 믿었지만 이러한 생각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종교관이었을 뿐(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도 이러한 神觀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성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첨언한다면, 지금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틴과의 분쟁이 전쟁 직전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자기의 신들이 자기네를 도와 줄 것이며, 적은 곧 신의 적이므로 당연히 죽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것이 신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편협된 신관(神觀)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오도해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일관되게 평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아만(我慢)
산스크리트 아스미마나의 번역어. 불교 교의에서는 마음의 교만을 <만(慢)>이라 하여 번뇌의 일종으로 보는데 7종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나는 뒤떨어진 사람보다 뛰어나다>라는 것처럼 <나는…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오만이 좁은 뜻의 <만>이고, <오취온(五取蘊; 5가지 집착요소)은 나 또는 나의 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교만을 아만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자기를 믿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는 뜻으로 쓰여 그 의미에서는 아집과 거의 같다. 아집이란 본래 <나>라는 말의 뜻이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내가>하고 자기의 좁은 생각이나 소견을 주장하여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4. 아집
몇 년 전 스코틀랜드에서의 일입니다. 한 노파가 실, 단추, 구두끈을 팔려고 시골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길 표시가 없는 갈림길에 서게 되면 공중으로 막대기를 던져서 그 막대기가 가리키는 길로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파는 갈림길에 서서 어떤 길로 가야할 지를 알기 위해 막대기를 공중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던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파는 막대기를 계속 반복해서 던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그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막대기를 여러 번 던집니까?” 그러자 그 노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막대기가 지금까지 계속 오른쪽으로 가는 길만 가리키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왼쪽으로 가고 싶거든요. 그 길이 순탄해 보이니까요.” 그 노파는 그녀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막대기가 가리킬 때까지 계속해서 던졌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생각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5. 넘치는 찻잔
어떤 사람이 고민이 많았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유명한 수도사를 찾아가서 고민을 얘기하였다. 그런데 끝없이 자기 얘기만 하는 것이었다. 한시간 두시간을 들어도 끝이 없었다.
수도사는 가만히 상대방의 찻잔에다 물을 부었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찻잔에 계속 물을 부었다. 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러자 그는 이야기 도중에 물었다. "수도사님, 아직 잔을 비우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자꾸만 물을 붓습니까?"
수도사는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생각을 꽉 차서 이제 내가 할 말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내 말을 들을 여지도 없고 빈 방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 찻잔과 같습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고정관념, 내 편견, 내 욕심으로 꽉 차가지고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는 것이 없다. 미치는 것이 별것인가. 이렇게 되면 사람이 미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들리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이는 마지막 메시지이다.
6. 독선을 벗어라
자기밖에 모르는 한 부자가 유대교 교사인 랍비를 찾아와 삶의 기쁨이 없다고 호소했다. 랍비는 이 사람을 창문 쪽으로 데리고 가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부자가 대답하자 다음에는 거울로 데리고 가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저밖에 안 보 이는데요』 부자가 대답하자 랍비는 말했다.
『유리에 은이 칠해져 있을 때 는 밖을 볼 수 없지요.독선과 이기주의라는 은을 벗겨 내야지 이웃을 볼 수 있고 그 때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