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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4일(주일) 주일설교 시편 16:1~11 ‘주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새찬송가 446장 주 음성외에는
오늘 본문 시편 16:1~11을 통해서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마다 다를 텐데요. 어떤 분은 건강이라고도 말하고, 어떤 분은 돈이 많은 것이라고도 하고 다양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중국 유교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1편 홍범에는 사람이 누리는 오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수(오래하는 것) 2. 부(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것) 3. 강령(평안히 사는 것 4. 유호덕(덕을 쌓으며 사는 것) 5. 고종명(평안히 죽음을 맞는 것) 이라고 하고 있구요, 요즘에 어떤 설문기관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현대인의 5복을 정리한 자료가 있는데요. 1. 건(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서민들의 오복중에 치아의 복이 있는 것을 보면서 치아관리가 너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2. 처(서로 아끼며 지내는 배우자와 해로하는 것) 3. 재(자식에게 손 내밀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재산이 있는 것) 4. 사(백세인생을 살아가면서 적당한 일자리가 있는 것) 5. 붕(서로에게 진실이 통하는 참된 친구가 있는 것)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은 잠깐 왔다가 언젠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문장이 많이 등장하는 데요. 여기서 ‘헛되다’라는 말은 ‘헤벨’이라는 단어인데요. 이 ‘헤벨’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입김, 내쉬는 숨, 수중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변하지 않는 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으신 시편 16편의 표제는 ‘다윗의 믹담’입니다. ‘믹담’은 황금같이 귀중한 시라서 ‘황금시’(Psalm of Gold)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시편 16편 안에 신앙의 결정체가 담겨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시편 16편에서 다윗의 신앙의 결정체와 같은 고백은 바로 오늘 본문 2절에 나와 있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세상의 복은 잠깐 왔다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하며 이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가 가장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자임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 16편에서 하나님을 3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님’(2절)이라고 부르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세가지는 ‘하나님’과 ‘여호와’ 그리고 ‘나의 주님’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표현인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의 이름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그러한 민족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생각하면 뭔가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듭니다. 주인이 일을 시키고 종은 원치 않아도 그것을 해야 하는 관계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할 것은, 종은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주인에 따라 종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부하면 종도 부하고, 주인이 망하면 종도 망하며, 주인이 괴팍하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주인이 은혜롭다면 종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이 복을 주면 복을 받고, 주인이 해를 주면 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한 관계입니다. 다윗은 이런 주종관계를 인식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이 받았던 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첫째는 성도요, 둘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입니다.
첫째로 다윗이 받았던 복은 ‘성도’로서 받았던 복입니다(3,4절). 오늘 본문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윗이 성도들에 대해 표현할 때 사용한 “성도들”(거룩한 자들)은, 단수일 때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고, 복수일 때는 천사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즉 인간들을 말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언약의 자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시 8:1).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위엄, 영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지금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자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그들 안에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의 기쁨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진실로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라면 내가 얼마나 얼마나 죄악에 찌들어 있고 나의 마음과 의지는 얼마나 죄악에 물들어져 있고 길들여져 있는가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스스로 약한 자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모든 악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 나라에까지 아무런 차질 없이 도달하게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스스로 존귀한 체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자기가 존귀한 신분인 데도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비천하다고 불행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시편 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비록 부귀영화를 누리는 존귀한 사람일지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니다. 4절을 보면 그들과 전혀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4). 다윗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용) 나는 힘들 때나 평안할 때 성도로서 주님만의 나의 복이며 내가 주님 앞에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습니까? 아니면 다른 신에게 헛된 제사를 드림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로 다윗이 받았던 복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입니다(5,6절).
오늘 본문 5,6절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여기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인, ‘산업’, ‘소득’, ‘분깃’, ‘기업’ 등의 단어는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여호수아 15-19장에서 이스라엘 12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사용한 단어들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줄로 재워 준 구역”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업이 되십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믿으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그들의 경계를 정하시고 그들이 누릴 유업을 필요에 따라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나의 기업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아름답다’를 “즐거움”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즐거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업이 완벽해서 더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9절(13절 뒤)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풍성하신 하나님’을 58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통해 풍요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을 40번 이상이나 거듭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였으며,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였고,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였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고후6:10) 그래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고백 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윌버 채프만(Wilbur Chapman)은 빌립보서 4장19절을 "하나님의 백지수표"라고 말합니다. 풍성한 공급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all your needs)를 다 채워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needs)"(필수품)와 "우리의 욕심(greeds)"(사치품)은 근본이 다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적 욕심은 채워주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필요는 다 채워주십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유효합니다. 오직 신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풍성하게 공급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 큐티인 간증) ‘나의 아름다운 구역’ 류명기(여성도)
적용) 나는 내가 지금 처한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환경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풍성하신 은혜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요청하며 체험하고 있습니까?
세째로 다윗이 받았던 복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입니다(7,8절).
오늘 본문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에 대한 최고의 성경은 바로 시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굶주림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개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그 이름표에 적힌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왕의 강아지’ 밑에는 다음과 같은 작은 글자들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였던 것입니다. 왕의 부인이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 개를 잃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개는 왕에게 인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즉 우리가 어디를 헤매던지 우리에게 이름표만 분명하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보호가 주어지게 되며 확실하게 주인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 또한 그 개가 왕에게 속해 있었던 것같이, 우리는 속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아들, 딸)입니다. 할렐루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비록 지금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고백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다윗을 훈계하시고 권고하십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시 119:105). 구약에서 ‘밤’이라는 시간은 뭔가 생각하고 묵상하며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다윗은 밤마다 “양심이 나를 교훈”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율법’이자 ‘안전장치’요, 때로는 ‘경고등’과 같습니다(롬 2:14-15). 그리고 하나님은 양심 뿐 아니라 말씀으로도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8절에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절). 다윗은 그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또 그분이 나의 오른쪽에 있다고 말합니다. ‘앞에 계신 것’은 다윗을 인도하시는 것이고 ‘오른쪽에 계신 것’은 그의 힘과 능력, 보호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믿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경우가 있다면 말해봅시다.
그러면 이렇게 다윗처럼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주님만 의지합니다(1절) 1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니이다” 주님의 지켜주심을 확신하며 주님께 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다른 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나의 의지할 주님이 되시는 것이 최고의 복이요. 고난 중에도 나의 피난처되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는 자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둘째로, 흔들리지 않습니다(8절).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이 양치기로 있을 때부터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이 흔들릴 때마다 크신 하나님은 다윗을 굳게 붙드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기를 원했고, 심지어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을 때 조차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과 공동체를 통해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돌이킴으로 흔들림 속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하루 이틀에 끝낼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일평생 죽을 때 까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때 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거리 경주에 참가한 운동선수가 견디기 힘들다고 해서 도중에 포기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인이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다고 포기하면 영생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 운동선수는 경주를 포기했을지라도 다시 기회가 있게 되지만 신앙 생활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번 닫힌 천국의 문은 아무도 열 수 없기에 다시는 기회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 생활하는 과정 속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사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악해 짐에 따라 순수하고 진실한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악할 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 26: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심지란 말은 마음의 뜻을 의미합니다. 즉 의지를 말합니다. 한 번 정한 뜻과 마음을 굽히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9~11절). 다윗은 9절에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10절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죄 가운데 멸망시키지 않으실 하나님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다윗의 믿음은 나아가 그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보호해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스올와 멸망의 자리에서 조차도 구원해주시며 ‘생명의 길’(11절)로 인도해주십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덧입게 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다윗처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고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들이 다윗과 같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는 고백을 하면서 진정한 복이 세상에 말하는 돈과 넓은 집이 아니라 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존귀한 성도임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믿고,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흔들리지 않으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