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크와 헤어
지금도 의료 해부용 시신 기증에 많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당연하게도 19세기에는 이런 거부감이 더 심했다. 당시에 해부용 시신을 구하는 합법적 방법은 사형당한 범죄자의 시신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쯤에는 범죄자의 무분별한 사형 역시 줄어들었기 때문에 의과 대학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시신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에딘버러 의대의 로버트 녹스 교수는 해부용 시신을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의 시체 도굴꾼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라는 2인조였다. 버크와 헤어도 처음에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를 도굴하여 교수에게 조달하는 일을 했다. 시체 한 구당 7파운드 정도의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기에 꽤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체 도굴도 얼마 지나지 않자 유족들이 장례를 치른 후 무덤을 지키기 시작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가족들의 죽은 것도 억울한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파내어져 해부당한다는 이야기가 떠도니 당연한 방편이었다. 이에 수익에 차질을 빚게 된 두 사람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바로 시체를 훔칠 수 없으면, 시체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그들은 연고가 없는 노숙자나 여행객 등을 노려 살인을 저질러 녹스 교수에게 공급했다. 이들의 살해 방법은 오로지 코와 입을 막아 질식사시키는 것으로, 그렇게 해야만 온전한 시체를 얻을 수 있고, 또한 녹스 교수에게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들의 범죄가 발견된 것에는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가장 극적인 이야기로는, 헤어와 버크의 희생자 가운데 매리 패터슨이라는 매춘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체가 해부대에 올랐을 때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의과대 학생 중 하나가 그녀의 단골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적을 알아보던 중 헤어와 버크라는 인물이 걸려들었고 경찰은 곧 그들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시체로 인해 구속되게 된다. 윌리엄 버크는 일기에 언제, 누구를 얼마에 팔았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16명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문제는 이 둘 가운데 오로지 버크만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헤어가 버크의 살인에 대해 증언하는 댓가로 불기소되었기 때문이다.
1829년 버크는 2만 5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법률에 따라 그 시신 역시 에딘버러 의대에 넘겨져 해부용 시신으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그 피부로는 책을 만들고(당시 영국에서는 범죄자의 피부로 책을 만드는 일이 많았다) 그 해골 역시 교재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질식시켜 죽이다(to burke)'라는 영어 동사형으로 쓰이게 되었다.

교수형 당하는 윌리엄 버크

버크의 해골, 에든버러 왕립 의과 대학이 소장하고 있음

인피로 만들어진 책, 당시 영국에서 만든 범죄자의 살가죽을 벗겨 만든 책이다(버크의 피부로 만든 책은 아님)
공범이었던 헤어의 그 뒤의 행적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들에게 속았던 의과대 로버트 녹스 교수는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첫댓글 서프라이즈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유죄답변거래로 풀려난 헤어는 아마 제명에 못 살았을듯 합니다. 그리고 저 인피로 만든 책... 느낌이 스산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