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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531 아브라함처럼 믿어라(갈라디아서3장1-7절)
성경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7절까지 봉독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배경과 1장 2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들었거나 배웠거나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이다. 하는 내용을 1장 2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복음을 갈라디아 지역에 전했을 때 처음에 그 갈라디아인들 중에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방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고, 대체로 흩어진 유대인들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각 지역에서 회당에서 모이고 있는 그런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먼저 접한게 모세가 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꽉 배어 있는 거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맞는 거죠.
그런데 율법을 지키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것과 단지 그저 문자에 매여서 속에는 반발심이 가득해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것 차이가 나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시대에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의인이었어요.
가령 예를 들어 에스라라든지 모세 사무엘 다 이런 분들은 절대 율법을 무시한 분들이 아니거든요.
율법을 잘 지켰는데,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킨 거예요.
반면에 바리새인들 교훈을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거의 예수님의 평가대로라면 외식하는 자들이예요.
속으로는 전혀 믿음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면서 자꾸만 거기다가 누룩을 넣는 거야.
그래서 변질된 거야.
율법의 본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변질된 그런 율법주의가 된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변질 되었다는 거죠.
그 변질된 것이 외식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척 했다는 거죠.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차피 되지도 않는 외식주의 율법은 놔두고 그냥 돌아와.. 그냥..
그냥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오면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거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4백년간 있을 때 율법이 주어지지도 않았어요.
율법은 나중에 시내산에서 받을 것이니까, 율법 전에 모세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믿었죠. 물론 이적도 보고 애굽왕 바로가 얻어맞는 표적도 보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믿었다는 거죠.
모세의 말을 믿고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유월절 양고기를 먹고 믿음으로 삶의 터전을 다 뒤로 하고 따라나선 것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신 거예요.
호세아서 같은 곳에 보면 그 광야에 씨를 뿌리지 못하는 땅 사람이 거할 수 없는 땅에 그래도 따라와주었던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주신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은 죄가 하나도 없거나 아니면 율법을 다 지키거나 그래서 인정받는 것이 전혀 아니고, 그저 하나님은 하나님께 돌아온게 고마워서 묻지도 않고 받아줄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세계에 안 들어오고 계속 율법 지키지도 못하는 그것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들이예요.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꾄 사람들이 누가 속임수를 가지고 뭘 알지도 못하면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꾀더냐..
여러분 지금도 이단 사이비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 꾀는 거예요.
그런 것 보면 참 우리 진실된 진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이 없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진리가 없고 참 기가 막히는 일이야.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
물론 그 때 육신의 눈에 보이는게 아니라 그 엄연한 사실을 두고 딴길로 가니까 말이죠..
어떤 성경학자가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두가지가 확증된다는 거예요.
그 두가지가 뭐냐 하면, 도대체 우리 죄가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저렇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어야 했느냐..
그래서 그 십자가는 우리 죄가 크다. 실로 우리 죄가 컸던 모양이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 그렇게 죄 많은 인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까지 구원할려고 하셨느냐..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두가지가 함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 선명하고 분명한데 누가 와서 또 너희를 꾀었느냐? 그런 얘기죠.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아마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전도할 때 전혀 율법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죄사함의 복된 소식을 증거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했던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그 뒤에 할례당들이 가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 하고 선동을 했는데 거기 넘어갔다는 거예요.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래서 3절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영적인 일을 따라가다가 이제 육체를 따라갈려고 하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아마 바울이 전했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에도 끝까지 다 믿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역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 갈라디아 지역에서도.
그러면서도 일부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게 되었는데, 여러분 바울이 이고니온이라든지 루스드라에서 율법주의자들에게 얻어맞아가지고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그런 것 봤잖아요.
바울이 전했을 때 다 믿은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일부가 믿었을 것이고 이방인들 몇몇사람이 믿었을 것인데, 유대인이나 아니면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변질시켜서 율법을 지키고 할례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그런 잘못된 율법주의에게 송두리채 갈라디아 교인이 넘어갔다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아주 음성을 변하고 아주 내가 아마도 다시 너희에게 가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될 모양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5절입니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한번도 성령을 받거나 사람이 인격이 변화되거나 하는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바울이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이 임하셨고 그들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났었는데,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보통 그 이전으로 하면 아벨이라든지 므두셀라라든지 에녹이라든지 노아라든지 이런 분들이 있지만, 그래도 정말 하나님을 믿어서 의로 여기셨다 하는 공식적으로 그렇게 명시된 사람은 아브라함부터이니까,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는 거죠.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선택하기 전에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는 아브라함도 그냥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방인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선택이 된 것인데, 그와 같이 아브라함이 그냥 이방인처럼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처럼, 이방인들도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는,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러분 이 저주 아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레위기 26장에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을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를 받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한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었어요. 율법을 안 지키면..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현재 예수님을 믿는, 율법과 상관없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가지고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 율법 언약할 때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어요.
사실은 제가 율법을 지키자 하는 것이 율법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은 폐했으니까 지킬 것도 없고, 폐하지 않은 율법 중에 지키면 그것 지킨다고 하나님이 따로 무슨 복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 자체가 우리에게 유익하게 해 놓은 것이 확실해요. 그래서 지키자는 것이지, 이것을 구원과 결부시키거나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레위기에 있는 율법이라는 것은 원래가 그것을 지키면 의롭다함을 받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지키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건강하게 되고 건전하게 된다. 그런 원리밖에 우리에게 적용이 안 돼요.
그게 우리에게 의가 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 이 이야기는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 율법이 옳고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를 복되게 우리를 유익하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한 것이더라 하고 믿을 때는 그냥 율법 다 무시하고 율법 폐기론자처럼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완전히..
그러나 우리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율법 안 지켜도 결코 저주 아래 있는게 아닙니다.
또 저주 아래 있지 않다할지라도 율법에 먹지 말라 하는 것을 먹으면 반드시 몸에 해롭습니다.
저주 아래 있지 않다할지라도..
그 유대인들은 예를 들어 율법에 먹지 마라 하는 것을 먹었으면 먹은것 때문에 율법을 어겨서 저주도 받겠지만 몸에 해로운 것 말고도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유대인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기독교인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은 전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고, 율법과 상관없이 우리를 부르신 거죠.
그러나 바울이 말하기를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요 유익한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의로운 사람은 ‘충성되게 산다, 혹은 믿음으로 산다, 신실하게 산다.’는 것인데,
단지 신실한 그 존재 그 성품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그저 마음은 하나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지키는 그 행위 그것만 가지고는 전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해요.
그래서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존재와 성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를 사람을 믿는 것도 누군가를 잘 믿거나 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비교적 순진합니다. 비교적..
어떤 사람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의심하고 그런 사람치고 의인은 없어요. 좋은 사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물론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지만, 예수님뿐 아니라 사람이라도 속을 때 속더라도 잘 믿는 사람이 비교적 순진한 사람이예요.
너무 약아빠져가지고 ‘나는 안 속기 위해서 그 누구도 안 믿겠다.’ 그런 사람치고 좋은 사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죽지 않는다.
여러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신명기 28장 15절 이하에 있는 저주문은 레위기 26장 14절 이하에 있는 저주문을 해석을 한 것인데, 그 저주가 다 임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실제로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끔찍한 대환난을 겪었고 그런 징벌과 저주가 문자대로 다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오늘은 어때요?
그 율법 지키는 사람도 있고 지켜도 누가 온전히 지킵니까? 아예 율법 무시하고 있어도 전혀 그런 저주가 우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저주 임하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 율법을 무시할 수 있느냐?
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제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면 확실히 우리의 삶이 거룩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존칼빈은 ‘구원받은 이후에 성화의 채찍으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13절,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한국사람이나 중국사람이나 율법 지키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율법의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에서 먹지 말라 한 것을 먹으면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을 먹었기 때문에 그 물질 자체가 우리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거의 잘 모릅니다. 이것은 저 혼자 주장하는 건데,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해보세요. 그런가 안 그런가..
저는 많이 해 봤으니까..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그 율법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하는 것을 확증을 해요.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식품영양학이나 약학이나 의사들도 거의 공감을 합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맞다는 거예요.
얼마전에 황성수라고 하는 경북대학교 신경외과 의사라는 분인데, 이분이 MBC와 SBS에 나와서 작년쯤에 방송했는데, 우리 홈페이지에 동영상이 올려져 있어요.
거기에서 채소와 곡식과 과일로서 우리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강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 방송에 나와있는 여러 몇사람이 앉아서 패널처럼 같이 대화하고 진행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염소가 되라고 하느냐? 그러면 이마에 뿔이 나지 않겠는가?’ 하고 염려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에 유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해가 된다는 사실을 이 양반이 와서 증거를 하니까..
여러분 그래서 창조원리대로 하면 채소 곡식 과일만 가지고, 그분은 내가 볼 때 좀 지나쳐요. 무슨 말이냐? 멸치 대가리도 안 먹는다는 거야. 그분이 의사예요.
그래서 여러분 몸에 자꾸 알러지가 생긴다든지 하면 우유라든지 그런 것 다 빼고, 이분은 계란도 많이 먹으면 해롭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니까..
한번 해 보세요. 일정기간 동안 몇개월 동안 멸치 대가리도 안 먹고 채소 곡식 과일만 먹어봐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일평생 고기먹고 술먹고 담배피고 해도 80-90 사는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은 무슨 유전인자가 있느냐? 므두셀라 인자가 있어요.
므두셀라 인자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 먹어도 별로 문제가 안 돼.
여러분 담배 피우고도 80-90까지 사는 사람 있어요.
술을 매일 마시는데도 80-90사는 사람 있어요.
그런 경우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특수한 경우에 그런 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답니다. 유전인자 속에..
그런데 저는 그런 인자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지금 적용되는게 아닙니다.
유대인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저주 아래 있고자 하는 것이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고..
실제는 율법의 저주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저주는 임하지 않습니다. 지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을 설명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제일 쉽게 할려면 ‘먹지마!’ 아니면 ‘다 먹어!’ 그러면 쉽죠.
그런데 노목사 말 들으면 먹으라는 말도 아니고 먹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하니까 어렵다는 거죠.
이후에는 알리라..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율법보다 먼저 있었어요. 아브라함 때부터..
그런데 먼저 생긴 법이 있는데, 그 뒤에 생긴 법이 먼저 생긴 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언약을 할 때,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것을 그냥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사라의 몸의 죽는 것 같음과 자기도 아마 남자도 생리가 있는 거거든요.
남자도 생리가 자기 몸도 죽은 것과 방불하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진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런데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는 것을 믿었다는 거예요.
보통 믿음이 아니죠.
여러분 자신 있습니까?
사라의 생리가 끊어진지 10년이 넘었고, 아브라함도 몸이 죽은 자와 방불한데 내년 이맘때에 옥동자를 낳겠다. 해봐요. 아멘 하겠어요? 잘 안 될건데요..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사로 볼게 아니라고..
19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이 말은 아브라함처럼 믿고 아브라함처럼 순종하고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살아간다면 율법같은 것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예요.
여기에 율법의 목적이 나오는 거예요.
율법은 자꾸 옆길로 가니까 어떤 울타리를 치는 거예요. 우편 좌편에 한계를 정해놓고 아무리 까불어도 이 바깥으로 나가지 마라 하고 그 울타리를 따라서 쭉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올 때까지는 제발 이 바깥으로 나가서 죽지 말아라. 이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 수가 있다 하고 울타리를 쭉 쳤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가는 길이요 또 몽학선생이다. 그렇게 바울이 이야기를 합니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유효한 것이죠.
20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이 하나님에게로 인도해 가는 것이지, 율법이 거스리지 않습니다.
..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그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까지 모형과 그림자로서 그리고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 악을 행하지 않고 줄곳 그길로 가서 예수님 만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어려운 말인데, ‘파이다고스’라는 말은 가정교사 아니면 소년 보호자 유치원까지 데려다 주는 선생. 이런 뜻이예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말인데..
..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거기까지 인도한다는 말이죠.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우리가 대학교 들어가면 유치원 교사의 아래에 있는게 아니죠.
마찬가지로,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말이예요.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말을 세례받았다고 해요.
여러분 서양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세례받았다’ 하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신에 푹 빠졌다는 거예요. 거기기에 연합 되어있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께 푹 빠진 사람들,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들이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으면 예수님이라는 옷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을 볼 때 사람들이 여러분과 저를 말할 때 예수님을 먼저 말해요. 그렇죠?
우리가 조금 못 된 짓 해봐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 그러죠?
‘노우호가 왜 그러냐?’ 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안 보여도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고 있기 때문에 ‘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장]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더니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요셉처럼 유다처럼 이렇게 될 사람들인데, 그러나 아직은 어릴 때 같으면 청지기 아래에서 몽학선생 아래에서 훈련을 받는 거죠.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제가 목회를 하면서 어떤 분과 상담하다가 보면 세례 학습 문답을 할 때, 자기는 전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안 불러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례 못 받습니다.
혹 여러분 그런 분 없어요?
하나님을 아버지가 안 되고 남의 아버지처럼 도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지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야.
머리에 물이 떨어진 것이지 세례받은게 아니라고 사실은..
그래서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진다는 거야.
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렇게 불러지지 않아요.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만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우리 아버지 나라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때는 못 가는 거예요.
좀 착하다 그것 가지고 안 돼요. 좋은 일 더러 하더라. 그것 가지고도 안 돼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만 자기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 위해서 천국에 가는 거예요
8절입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러분 여기 바울은 율법주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고 믿음도 없고 외식으로 형식적으로 이렇게 유대교를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것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 정도가 아니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해요.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고 단지 겉으로 신앙생활 잘 하는 척 금식하고 머리를 헝클벙클 하고 큰 거리에 나가서 거룩한 척 하고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니까..
그런데에서 종노릇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런 것 다 해봐야 유대 민족의 기념일 정도밖에 아무 것도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 매여서..
그러니까 할례도 받고 날과 달과 절기 다 유대교 풍습을 지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실컷 했는데, 헛되게 될까 두려워 한다..
제가 밀양에 있는 무안교회를 9년 4개월간 섬기면서 뭘 잘못했는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 동네에 유명한 밀양돼지국밥 원조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 밀양돼지국밥 원조가 무안교회 바로 정문에서 50m밖에 안 떨어져 있어요.
삼형제가 그것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밀양돼지국밥이 체인도 아니면서 온 마산 창원 부산까지 다 있어요. 보니까..
그런데 그 돼지국밥 때문에 그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뇌졸증 중풍 이런 것에 걸려가지고 온 골목에 이상한 걸음을 걷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그 9년 동안 제발 돼지고기 많이 먹지 말라고.. 싸움 싸움 했어요.
제가 있을 때는 거의 안 먹었거든요.
제가 떠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동안 못 먹은 것 한이 맺혀가지고..
그냥 교회가 판이 벌어지면 그냥 돼지고기를 갖다가 먹는 거야.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아무 것도 아니구나..
모르겠어요.
샤론교회도 제가 떠난 후에 어떻게 될런지.. 온 교회가 돼지고기 다 먹을런지 모르지..
그 동안 못 먹은 것 한이 맺혀가지고..
그래도 저주는 임하지 않습니다.
뭐가 임하느냐?
고지혈증 고혈압에다가 뇌졸증 동맥경화에다가 순환기 계통의 질병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주한게 아니고, 스스로 저주를 자청한 거야.
율법 어겼다 해서 하나님이 저주한게 아닙니다.
여러분 돼지고기 먹고 병 걸렸다고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느냐?’
아닙니다. 자기가 그런 거예요. 그것을 잊지 마시라고..
그래서 저는 하도 소문이 좋게 안 나서 돼지고기 얘기할 마음이 없어요.
세상 싸울게 따로 있어야지 돼지고기와 싸워서 되겠습니까?
먹든지 말든지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왜냐하면 제가 실컷 못 먹게 해놨는데, 다시 먹는다 하니까 그 동안에 나를 얼마나 욕을 했겠나.. 이를 갈면서..
그러나 저는 자유해요.
저도 돼지고기 하나 먹는다고 해서 제가 거리끼는 것 없습니다.
병에 걸릴 위험이 있고 우리 몸을 더럽힌다는 거예요.
그래서 12절,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어쩌면 빨리 스쳐지나갈뻔 했는데, 어떤 지역에는 몸이 안 좋아서 요양차. 아니면 쉬면서 병 가료 중에 교회가 개척된 거예요.
그래서,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참 이것을 보면 바울이 대단한 거야.
몸이 안 좋아서 가서 드러 누워가지고 교회가 개척되는 거야.
이분은 지나가는 곳마다 교회가 개척되는 거야.
14절입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것은 학자들이 지금도 아주 고민하는 건데, 도대체 바울의 육체에 무슨 질병이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 있어서 이런 말을 썼을까?
즉 그 바울의 몸에 있는 질병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시험이 될 정도가 되는 무슨 병이 있을까.
그래서 학자들간에 추측을 하는데, 바울이 눈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라는 거예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 만났을 때 강렬한 빛에 의해서 눈이 아예 멀어버렸다고 했죠.
그리고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밝히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눈이 별로 좋지 않은 거야.
그래서 바울이 글씨를 쓰면 굵은 글씨로 쓰고 또 여기 뒤에 보면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가 눈이라도 빼어서 나에게 줄려고 했지 않느냐? 그런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의 눈이 약하니까..
저렇게 위대한 종이 눈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나 해서 그런 말들을 했던 모양인데..
안질은 그렇다손치고, 안질 그것을 가지고 시험되고 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아마도 이 바울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가지고 사람들 보기에 간질이 생겼다는 거야.
여러분 확인이 안 됩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학자들 간에..
여러분 간질 같으면 정말 시험 될거야.
설교 하다가 저처럼 서 있다가 거품을 흘리면서 떨면서 쿵 넘어져가지고 30분 있어봐요. 시험되죠.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 저럴 수 있나..’
또 바울이 기도하고 하면 앉은뱅이가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자기는 병이 치료가 안 되니까 시험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든,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런데,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눈이라도 빼줄려고 했던 사람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갔느냐 그런 말이죠.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여기뿐 아니라, 고린도후서에서도 봤잖아요.
바울이 자기 몸에 무슨 병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기 위해서 세번이나 주께 간구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너는 은혜 받은 것만 해도 너무 많이 받았어.’ 하면서 바울을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할려고 사단의 사자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셨다 그렇게 했는데,
육체의 가시가 되고 그리고 사단의 사자라고 했는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업신여길만큼 버릴 수도 있을만큼 이렇게 심각한 장애가 무엇이었느냐?
그런데 보세요. 이런 질병과 어떤 장애를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또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죽지도 않아요.
그것 때문에 일 못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다만 어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있음으로 해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항상 사람이 겸손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계시받은 것이나 은혜받은 것이나 좀 배운 것이나 뭐든지 조금 많으면 항상 교만할 소지가 있어요.
그래서 조금 모자라는 것 감사해야 돼요. 왜냐? 교만할 위험이 없잖아요.
조금 가지고 있거나 조금 알면, 하다못해 우리 한국사람은 방언의 은사 받았다고 그것을 가지고 교만해요.
별 것을 가지고 교만할 소지가 있는데, 바울은 받은 계시가 너무 많고 지식과 학문도 많으니까 교만할 소지가 있죠.
그래서 가이사랴에 있을 때 아그립바 왕이라는 사람이 그러잖아요.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 것 같다..’
대단한 학문이 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을 하는 거예요.
학문만 해도 교만할 수 있는데 거기다가 계시받은 것도 많고 능력이 나타나고 하니까 걸핏하면 교만할 수 있어요.
사도 바울 당대에 그 당시 지구상에 최고의 계시와 학문과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까딱하면 교만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시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안 들어주신 거예요.
16절,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러니까 바울은 참된 말만 했는데 어떻게 내가 말하는 것을 전부 다 집어던지고 그렇게 하나님 자녀도 아닌 사람들에게 종노릇 하고 있느냐?
17절,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이간 붙여’가 아니고 이간은 나누게 하는 것이니까 붙이는게 아니죠.
‘이간시켜’라고 해야 맞는 거죠.
이간 붙인다 그러면 말이 안 돼죠.
이간하여 혹은 이간시켜,
..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이게 진짜 이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있는지 바울이 의심이 간다는 거죠.
제가 가끔 달걀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달걀이라는게 어미 닭에서 한번 태어났어요.
태어났어도 여전히 껍데기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미닭이 품고 있으면 그 안에 병아리 형상이 새로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그게 달걀이예요. 굴러다니는 달걀이야. 그냥.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어요.
교회가 날개를 가지고 따뜻하게 품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생겨서 나중에 삐약하고 자기 껍데기를 깨고 나올 때까지 교회가 잘 품어야 돼요. 거듭나게 한다는 거죠.
바울이 ‘다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가 한번 더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될 모양이다.’
바울이 가서 한 번 더 갈라디아 교인들 다시 품어가지고 완전히 거듭나게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
21절,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것은 바울이 비유도 내가 볼 때 별로 어쭙잖은 비유인데, 이단 사이비는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장난을 치는지 몰라요.
다시 말하면 약속을 따라 난 자녀가 이삭이고, 그냥 육체만 따라서 난게 이스마엘을 말하는 거죠.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크니까 이삭을 핍박 했던 것 같이..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래서 약속을 따라 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내려오는 그 언약의 자손들이 진짜이지, 육체를 따라 난 유대인이 다 유대인이 아니다 이 말이죠.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 위에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율법의 저주가 우리에게 전혀 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성경에서 해롭다 하는 것을 자꾸 우리 몸에 취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가 우리 몸을 해롭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항상 이야기 하는 거죠.
우리가 여기까지 정리하면 아브라함처럼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어떤 율법도 더할 필요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 곁길로 나가기 때문에 저러다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저주를 받아 다 죽을 수 있겠다.
그래서 율법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리라. 죽지 않게 살리라 하는 것이지,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영생얻게 하는 것도 아니야.
영생얻게 하는 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아브라함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 하나님 믿고 사랑하는 성품과 그의 신앙과 그의 신실함 때문에 충성됨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해요. 그리고 율법을 다 지키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속에 율법에 대해서 반발하는 심성이 있어요. 죄성이..
그래서 어차피 다 지키지도 못해요.
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울타리를 쳐 놓으면 그 울타리를 따라가면 예수님 올 때까지 민족이 단절 되어서는 안 되니까..
민족이 단절되어 버리면 예수님 오실길이 막히잖아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인도한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더 읽어가면 나중에 바울이 율법도 법있게 쓰면 율법도 유익한 것이고 선한 것이다 하는 것이 바울의 교훈이예요.
그래서 지금 이런 시대에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바울 시대에 율법을 성도들에게 더군다나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지역에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내고 그 뒤로 다시 못간 것 같아요.
이게 왜냐하면 3차 전도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썼다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갈라디아 지역에 여행한 기록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보냈는데, 여러분 그 갈라디아가 지금 현재 예수님 안 믿어요.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전부 다 이슬람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가지고 세상 어떤 풍조와 어떤 바람이 밀려와도 어떤 물결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는 진리 위에 서야지, 어설프게 해가지고 자기 자녀에게로 신앙이 흘러가지 않는 신앙은 뭐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우리 중에 혹시 나는 믿는데 내자녀들이 안 믿고 있다 하면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돼요.
내가 제대로 믿어서 우리 자녀들에게 감화와 감동과 이것을 주지 못하면 다시 말하면 종적인 선교라고 하는데, 우리 한국교회가 횡적으로 선교하는 것은 열심히 강조하는데, 종적인 선교, 자기 자녀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심어주는 이것을 부모들이 잘 못하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잘못 지도했고 성도들이 자기 자녀를 잘못 지도했기 때문에 종적인 선교가 안 되는 거예요.
반대로 유대인들은 횡적인 선교 다른 민족에게 선교 이것은 잘 못하는데, 자기 자녀들을 철저하게 하는 것은 대단합니다. 정말..
어떤 세상 어떤 문화속에 어떤 민족에 휩쓸려도 자기 언어를 꼭 지켜내고 있고, 자기 신앙을 꼭 지켜내어서 ‘앉았을 때든지 누울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항상 우리 자녀에게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는 것을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잘 하는게 있어요. 실제로..
잘 하는 것은 배워야 되고, 잘못하는 것은 우리가 철저히 분석해서 그런 우를 되풀이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들로 착하고 신실한 종들로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 놓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게 속량하실 뿐 아니라, 우리 죄를 담당하사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이 은혜와 진리와 복된 소식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고 또 이를 증거할 수 있는 신실한 증인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