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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인도 무굴 제국(1504~1605)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이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이때 바부르는 화약과 대포를 이용하여 10배의 상대군을 격파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무굴제국의 역사를 역대 왕들의 흔적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바부르 (Babur, 1526∼1530)
1526년에 바부르가 인도로 침략할 당시에 로디(Lodi)왕조가 아그라와 델리를 통치하고 있을때였으며 로디왕조는 아그라와 델리 그리고 펀잡의 일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의 주인으로서 군림하고 있을때였다. 그러나 로디왕조는 바부르에 의해 패배당했으며 1526년 4월 21일의 파니팟트(Panipat)의 세번째 전투에서 로디는 사망했다. 이 유명한 전투이후에 바부르는 그의 아들 후마윤(Humayun)과 크와자 키타칸(Khwaja Kitakhan)의 지휘아래 아그라를 점령하기위해 서둘러 그의 군대를 파견했다. 동시에 바부르 자신은 델리를 점령하기위해 델리로 진군했으며 1526년 5월 10일에 로디의 궁전에 입성했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아그라에서 바부르를 맞이하였으며 그에게 유명한 다이아몬드인 코히누르(kohinoor)를 바쳤다.
아그라에서 초창기 바부르가 머무는 동안에는 그는 인도에 머물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얼마지나지 않아서 바뀌었으며 결국 인도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인도에서의 무굴 제국은 그의 통치기간동안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그는 전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만을 단지 아그라에서 보낼수가 있었다. 바부르의 통치기간당시에 아그라는 길이로는 2마일정도였으며 넓이로는 반마일에 이르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안에 그는 아그라에 "구이에 아프간(Gui-e-Afghan)"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으며 후에 이 정원은 "아람박(Aaram Bagh)"이라고 불리어졌다. 이 정원은 야무나강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심으로부터 3킬로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바부르는 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람박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 정원안에는 화려한 건축물과 욕탕과 사원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정원은 자신이 죽은후에라도 이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런 정원이었으며 이런연고로 바부르의 사후에 그의 시신은 한동안 아람박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카불(Kabul)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그는 잠들고 있다.
후마윤 (Humayun,1530∼1556)
바부르의 죽음 이후에 그의 아들 후마윤은 확실한 자신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1530년에 왕좌를 물려받았다. 이때에 후마윤은 경험면에서 그리고 행정적인 면에서 그의 능력으로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어려운때였다. 그는 유명한 아프간 지배자인 세르사 수리(Shershah Suri) 에 의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결집해서 1539년에 후마윤을 공격했으며 결국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야 할 상황으로 몰렸으며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약 15년간의 인도에서의 생활기간동안 후마윤은 하미다 바노(Hamida Bano)와 결혼을 했으며 후에 그녀는 위대한 무굴의 황제인 악바르를 낳게 된다. 후마윤은 카불의 지배자의 힘을 빌어서 아프간으로부터 그의 왕좌를 다시 얻으려는 노력을 했다. 후마윤은 카불왕의 도움으로 아프간을 공격했고 시르힌드에서 그들을 패배시킬수가 있었고 아그라를 포함한 자신의 제국을 재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후에 후마윤은 델리에서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소유의 아름다운 도서관을 갖고 있기도 할정도였다. 하루는 그가 그의 도서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에 불행하게도 미끄러지는 바람에 1556년에 그의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무덤은 후에 그의 아들과 부인에 의해 델리에 지어졌으며 무덤안에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함께 묻혀진것으로 알려진다.
악바르 (Akbar the Great, 1556∼1605)
잘라우딘 모하메드 악바르(Jalauddin Mohammad Akbar) 는 1542년 10월15일에 아마르콧트(Amarkot)성에서 태어났다. 악바르는 야무나 강둑의 서쪽편을 따라 도시를 확장했으며 도시의 방어와 장식을 위해 6개의 높은 성문과 성주위를 흐르는 도랑을 만들었으며 하루만에 성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악바르는 단지 14세의 나이에 왕족의 확실한 계승자로 낙인을 받았으며 그는 1556년에 그의 스승이자 장군 바이람 칸(Bairam Khan)의 도움으로 칼란누르(Kalanoor)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바이람칸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그 유명한 빠니팟트의 5섯번째 전투에서 아프간을 패배시켰으며 1558년에 악바르는 처음으로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아그라는 바부르와 후마윤에 의해 이미 무굴제국의 정권아래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도시는 정치적인 세력과 문화적인 성숙도 그리고 건축적인 영화에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악바르를 비롯하여 그의 연이은 계승자인 자항기르와 샤자한에 의한 통치기간동안에 비로서 아그라의 진가를 갖추게 되었으며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1566년에 악바르는 오래된 바달가르(Badalgarh) 성을 부수고 아그라에 새로운 성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아그라성은 예술과 건축의 아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악바르는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아그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많은 쓰러져가는 건물들을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악바르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사람들과 유능한 관료들의 도음으로 그는 행정전반을 잘 처리해 나갔다. 또한 악바르는 무슬림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인들의 존재가치 또한 인정했으며 이웃하고 있는 라자스탄의 라지푸트들과의 혼인관계에 대한 허용을 선포했으며 그뿐아니라 자신이 직접 라자스탄의 지배계급의 공주인 조다 바이(Jodha Bai)라는 여인과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악바르는 자신의 관료를 무슬림뿐만이 아니라 힌두인들에게서도 기용하였으며 거기에는 어떤 계급과 신앙의 차별이 없이 오로지 국가의 이익만을 고려할 뿐이었다.
그는 행정부 전반에 걸친 행정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9명의 행정관료들(9개의 보석으로 불리기도 한다)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인도에 매우 효율적인 행정시스템을 도입했으며 그 자신이 인도의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1568년에 악바르는 칫토르가르(Chittorgarh)를 공격해서 점령했으며 그곳에서 승리의 표시로 그성의 높은 성문을 운반해서 아그라에 보존시키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그 성문을 볼수가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악바르는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고 그의 관료중의 한사람이 악바르에게 유명한 수피 성자 쉐이크 살림 씨스띠(Sheikh Salim Chisti)를 소개해 줬고 이 때가 1569년의 일이었다. 그 성자는 악바르가 사는 아그라로부터 37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파테푸르 씨크리(Fathepur sikri)에 살고 있었다. 악바르는 걸어서 그 성자에게 가서 그를 영접했으며 그 유명한 성자는 악바르에게 아들의 축복을 내려주었으며 이와 같이 해서 악바르는 아들을 얻게 되었다. 악바르는 그때 그 성자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고 1569년에 제국의 수도를 파테푸르 씨크리로 선포하였으며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건설을 명령하였다. 많은 건축물들이 새로운 수도에 지어졌으며 그는 구자랏트(Gujarat)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높은 문을 건축했으며 그것의 이름을 불란드 다르와자(Bland Darwaza) 또는 승리의 문이라고 지었다. 1575년에서 1586년까지 악바르는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인도를 지배하였으며 유명한 성자 살림의 사망후에 그는 파테푸르 씨크리에 그 성자를 기리기 위해 하얀색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 성자는 죽기전에 악바르에게 파테푸르 씨크리를 떠나서 아그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조언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그 성자의 건의에 따라서, 그리고 심각한 마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악바르는 1586년에 아그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악바르는 "디네 라이"(Din e Lahi) 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교를 널리 전파했으며 그 당시의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거의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악바르는 마음과 정신이 하나된 통일인도에 대한 전망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두개의 주류 공동체인 힌두인들과 무슬림인들 사이의 문화적 융합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위하여 "술라이 쿨(Sulha-I-kul)"이라는 정책을 선포하기도 했다. 따라서 악바르 통치하의 아그라는 문화적 통합의 중심지가 될수가 있었다. 50년간의 위대한 통치후에 악바르는 1605년 10월 25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시칸드라에 마련되었다. 이 무덤은 이미 악바르 자신에 의해 그의 생애동안에 지어진 것이며 그의 사망후에 그의 아들 자항기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자항기르(Jahangir, 1605∼1628)
자항기르는 1569년 8월에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태어났으며 악바르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수피성자의 이름을 따서 술탄 무하마드 살림(Sultan Muhammad Salim) 으로 이름을 지었다. 악바르는 그를 애정으로 쉐쿠 바바(Shekhoo Baba)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하였다. 어린왕자 시절의 살림은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1573년에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페르시아어와 터키, 아라비아어, 힌디 그리고 역사와 지리 수학등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훌륭한 힌디, 아라비아, 터키, 페르시아어의 학자가 되었으며 악바르의 사망후에 1605년 11월 3일에 아그라에서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왕관을 머리에 취했다. 자항기르는 쉐르 아프간(Sher Afghan)을 살해했으며 나중에 누르마하이(Noor Mahai)와 결혼을 했으며 그는 그녀를 누르이 자항(Noor-I-Jahan) 혹은 세상의 빛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후로 여인과 술에 빠졌으며 따라서 그의 통치기간동안 전적으로 누르이자항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는 단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그의 부인인 누르자항은 당대의 풍속의 유행에 대단히 민감했으며 또한 그녀는 미술을 장려했고 자신의 부모들에 대하여는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난후에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건축물을 야무나 강둑 동쪽편에 지었으며 이름을 잇트마드우드 다울라라고 지었다. 그건물은 아름다운 하얀대리석의 무덤이며 훌륭한 상감세공작품과 여성의 우아함등이 어우러져 있다.
샤자한 (Shahjahan, 1628∼1658)
샤자한의 어린시절이름은 꾸람(Khurram)이었으며 1592년 라호르(Lahor)의 꾸람에서 태어났다 . 유능한 장군으로서 수많은 유명한 전투에서 이름을 날리던 어린 왕자 꾸람은 인도의 미래의 황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꾸람은 자신의 다른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나서 모하밧트 칸(Mohavat Khan)과 누르자항의 오빠이자 꾸람의 장인인 아사프 칸(Asaf Khan)의 도음으로 1628년 2월에 인도의 제황이 되었다. 이후에 아사프칸은 수상이 되었고 모하밧트칸은 7000의 군사와 7000의 기마병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샤자한은 거대한 건물과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궁전 ,기념비등을 건설하는것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그라를 빛나고 찬란한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1612년 4월에 아르주만드 바노(Arjumand Bano)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샤자한으로 하여금 사랑의 덫에 걸리도록 하기에 충분했으며 샤자한은 그녀가 죽은후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뭄타즈마할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뭄타즈가 1631년에 죽었을 때 그는 상당한 충격에 빠졌으며 얼마후에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던 그리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하얀대리석의 꿈으로 불려지는 타즈마할을 건축했으며 그것은 세계7대불가사의로 불리게 되었다. 샤잔은 오늘날의 델리로 알려진 지역인 샤자하나바드를 조성했으며 이것만이 아니고 그는 레드포트, 마스지드 그리고 타테 타우스로 불려지는 아름다운 공작왕좌등을 만들었다. 그 탁테타우스는 상당한 양과 가치의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왕좌의 아름다운 공작상은 밝은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왕좌의 천장 역시 금과 귀금속, 그리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으며 에머랄드색의 많은 기둥들로 받쳐지고 있다. 또한 왕좌로 오르는 계단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놀라운 물건은 1736년에 나디르에 의해 페르시아로 옮겨져갔으며 나중에 페르시아에서 녹여졌다고 한다. 샤자한은 그의 노년기를 혐오와 심한 고통속에 보내게 되었다. 그것에 관한 이유는 많이 있을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의 중반에 그의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 인생의 기간동안 병속에 지냈다는 것이고 세번째로는 그는 그의 막내아들에 의해 아그라의 성에 갇혔다는 것과 샤자한의 나머지 아들들이 모두 자신의 막내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그 이유들일 수 있다. 오로지 그의 사랑하는 딸인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만이 아버지와 함께 보냈으며 심지어는 아그라성에 함께 갇히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워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자신의 사랑과 함께 그옆에 묻히는 것이라고 표현했으며 이후에 그는 1666년 1월 31에 하늘로의 영원한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잔인한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할수 없었으며 위대한 샤자한은 시종들에 의해 옮겨져 뭄따즈옆에 묻혔고 아우랑제브는 한달가량뒤에 아그라에 와서 그의 아버지 기념비 근처의 대리석 울타리 설치의 형식적인 절차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후에 샤자한의 딸인 자하나라역시 1681년 즉 아버지가 죽고난후 15년후에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그녀는 델리의 니자무딘의 한 장소에 묻혔다.
뭄따즈 마할 (Mumtaj Mahal 1592∼1631)
뭄따즈 마할이라는 이름은 샤자한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워졌던 이름으로서 실제의 그녀의 이름은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이며 왕자인 꾸람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이 꾸람왕자가 나중에 무굴제국의 5번째 황제인 샤자한이다. 결혼당시의 그녀의 나이는 19살 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야민우다울라 아사프 칸으로서 그는 자항기르 관료로서 낮은 직위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누루자한의 오빠였다. 샤자한은 그녀의 독특한 매력과 진실로 인해 그녀에게 크나큰 사랑을 느꼈으며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 뭄따즈는 샤자한의 통치기간동안 행정분야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주요한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이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기민한 여인인 뭄따즈는 샤자한과 18년 동안 결혼 생활을 보냈으며 이 기간동안 많은 행정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침착하게도 그 일들을 훌륭히 잘해내었다. 그녀는 또한 사회 복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많은 수의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훌륭한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뭄따즈는 14명의 아이들을 나았으며 부르한푸르(Burhanpur)에서 14째의 해산에서 심각한 병을 얻었으며 이때의 샤자한은 칸자한(Khan jahan)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때이다. 모든 노력이 뭄따즈를 살리기 위하여 시도되었지만 실패에 그쳐졌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서 자신의 딸인 자하나라에게 샤자한을 잘 보필할 것을 책임지워줬다. 그리고 그녀의 죽임이 가까이 옴에 따라 그녀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하는지 물었고 그때의 뭄따즈는 그에게 결혼을 하지 말것과 아이들을 잘 돌보길 부탁했다. 그녀는 1631년 6월 17일에 사망했으며 그때의 나이 39살 이었다. 뭄따즈의 죽음과 동시에 온 제국이 수의를 입었고 숭고한 여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샤자한은 그가 뭄따즈와 약속한 것들을 지켰으며 자식들에게는 사랑과 애정을 나눠 주었으며 뭄따즈가 죽고난 후 바로 타즈 마할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나라의 축제 기간동안에는 샤자한은 뭄따즈의 무덤에 와서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곤 했으며 그의 수염은 회색빛으로 자라났으며 그의 심신은 매우 약해졌다. 샤자한은 뭄따즈를 잊으려고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뭄따즈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우랑제브 (Aurangzeb, 1658∼1707)
무히우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Muhiuddin Muhammad Aurangzeb)는 1618년 11월3일에 우짜인(Ujjain)근처 도하드(Dohad)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업에 매우 열중했으며 후에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경전코란의 학자가 되었으며 1634년에 그는 1만명의 수장인 만사브다르(Mansabdar)가 되었으며 오차(Orcha)지역에 대한 공격이 맡겨졌다. 그리고 데칸(Deccan)의 수베다르(Subedar)로 임명되어서 1636년부터 8년간을 머물게 되었다. 1637년 5월 18에 그는 딜라스 바노베굼(Dilras Bano Begum)이라는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을 했으며 1644년에 그는 수베다르직에서 사임을 했으나 후에 그는 다시 구자랏트의 수베다르(일종의 총독의 직위)가 되었다.
그는 더욱이 1648년~1652년까지 물탄의 수베다르로서 임했으며 1649년, 1652년에 두번씩이나 칸다하르를 정복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나 두번다 실패를 했으며 이런한 일로 샤자한은 그의 아들을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다시 그를 데칸의 수베다르로 임명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1652년에서 1658년까지 머물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1655년부터 1706년까지 거의 51년의 기간동안 통치를 했으며 악바르처럼 관대하지도 않았고 건축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는 확고한 수니 무슬림 신자였으며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서는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건축물 조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었으며 그것을 위한 지출은 절대적으로 낭비라고 믿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아그라를 꾸미기 위해 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또한 종교적 감정에 있어서 너무나 비판적이어서 아그라의 기존의 기념비등에 대해서도 그러한 생각을 했으며 특히 건축물등에서 사진이나 새, 혹은 어떤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간에 그는 그것들을 부수는 것은 물론이고 철거해 버렸다. 또한 그는 힌두이즘과 다른 종교에 대하여서도 무척이나 배타적이 었던 사람으로 일컬어 진다. 아우랑제브는 자지야(Jazia)라고 부르는 종교세를 부과하고 증가시켰으며 마투라(Mathura)와 바라나시(Varanasi) 그리고 다른 지역의 유명한 신전들을 파괴했으며 그 잔해물들로 회교사원을 건축했다. 그는 힌두인들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며 시크교(Sikh)의 구루(Guru)인 태그바하두루(Teg Bahaduru)와 구루 고빈드씽(Gobind Singh) 두아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산채로 매장을 해버렸다. 그는 힘으로써라도 이슬람이 전파되길 바랬으며 이런 혹독한 종교정책의 결과로서 그의 지배기간동안에 제트족과 마라타 그리고 모든 시크교인들이 그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었다. 힌두인들은 실제로 무굴제국의 등뼈와도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점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원과 협조 없이는 악바르대제라 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까지 무굴제국은 힌두인들을 믿었고 존중했던 것이며 인도에서 적절히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부부터 힌두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무굴제국은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부는 결코 그의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조차도 믿거나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왕이 되도록 많은 힘이 되어준 그의 여동생 로샤나라(Roshan ara) 조차도 역시 그로부터 어떤 호의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딸인 제분니사(Zebun Nissa)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한동안의 긴 전제정치 후에 그는 1707년 3월 3일에 남쪽 지방인 아흐마드나가르(Ahmad Nagar)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의 나이가 90살 이었다. 그는 평범한 무덤에 묻혔으며 그의 죽음은 제국의 수도인 아그라의 많은 불행을 몰고왔다. 정치적인 불안들이 아그라로 하여금 젯과 마라타 심지어는 이국의 침입자들의 위협에 노출되도록 만들었으며 아그라의 성은 그들에 의해 몇번씩이나 약탈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18세기 말엽에 아그라는 위대한 무굴제국 기간동안의 영광과 찬란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한편, 무굴제국은 영지(領地)를 직할지와 봉토(封土)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봉토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봉록으로 주는 토지였으나, 관할지를 자주 바꾸어 같은 토지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없게 하였다. 직할지와 봉토의 비율은 약 1:3으로 봉토가 훨씬 많았다. 무굴령은 악바르 시대에는 12주(州)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7세기 중엽에는 정복지의 증대에 따라 22주가 되었다.
각주에는 주장관과 주 재정장관 등이 배치되어 각각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였다. 주 밑에는 현(縣) ·군(郡)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행정상 중요한 단위는 군이었다. 군은 획일적인 행정단위라기보다는 소재지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던 지역단위로서, 무굴제국은 종래의 사회관계를 지배의 말단조직으로서 그대로 이용하였다.
무굴제국의 관위제도(官位制度)는 만사브제(制)이다. 이 제도는 악바르시대에 정비되었는데, 만사브는 10단위에서 1만 단위까지 33의 위계(位階)로 나누어 있었다. 1600년경 만사브 보유자수는 1,600명 정도였으며, 그들이 무굴 중앙정부 권력의 지배자집단을 이루었다. 특히 만사브 1,000 이상의 고위 위계 보유자는 137명이었는데, 만사브 5,000 이상의 위계는 거의 황족에 국한되었다. 이 만사브제의 기본원리는, 모든 관료는 맨처음 만사브수(數) 10의 위계가 주어지고, 그 후 능력과 공적에 따라 순차적으로 높은 지위의 위계가 주어졌다. 또 만사브수에 맞추어 그에 딸리는 코끼리나 말의 수, 병사의 수효가 정해졌으며, 봉록도 만사브수에 따라 정해졌다.
무굴제국 최대의 재원(財源)은 토지로부터 징수하는 지세(地稅)였다. 이 지세는 하라주라 하였고, 이것을 바치는 농민은 라이야트라 불렸다. 라이야트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권리는, 최근의 여러 연구에 의하면, 농민이 자기 경작지를 상속할 수 있었고, 또 저당 ·매매도 할 수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강력한 사적(私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무굴 왕조는 본래 시아파(派)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악바르 황제는 특히 힌두교의 신앙 ·습관 등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황제는 점차 수니파 이슬람교로 기울어졌으며,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신적인 이슬람교 신앙을 가져 힌두교를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시대의 피정복민이었던 힌두교도 민중 사이에서는, 엄격한 카스트제도에서 벗어나 신을 열렬히 숭배하는 바크티파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펀자브 지방에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시크교의 세력이 확대되어갔다.
아우랑제브 황제를 제외한 역대의 무굴 황제는 모두 그의 통치시대에 장려한 건축물을 건립하였다. 무굴시대 초기에 악바르가 건립한 건축은 페르시아 양식과 인도 재래의 형식을 합친 모티프를 지닌 힘찬 것으로 황제의 호방한 성격을 나타내는데, 악바르의 도성(都城) 파테푸르 시크리와 아그라의 성 등이 대표적이다. 샤자한 황제는 그보다 화려한 외형과 정교하고 치밀한 장식을 중요시하였다. 아그라의 타지마할묘(廟)나 델리성의 황제접견소(알현소)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뒤 궁정 문화의 중심은, 그때까지의 델리보다도 라크나우와 하이데라바드의 태수(太守) 궁정으로 옮겨가 이 지역에 궁전·사원 등이 건립되었다.
무굴시대의 그림은 주로 미니어처(細密畵:장식이나 서적의 삽화로 그린 정밀한 채색화)였으나, 페르시아의 전통에 인도 재래의 수법을 가미한 무굴파(派)나 라지푸트 토후국(土侯國)의 궁정에서 번성하였던 라지푸트파의 그림이 성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