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87) 티토에게 보낸 서간
현세에서 선행에 힘쓰며 교회 가르침에 맞게 살아야
- 티토에게 보낸 서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생각해 현세에서 함부로 살지 말고 선행에 힘쓰며 교회의 건전한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티토 성인.
성경학자들은 경전 내용과 교리 가르침이 비슷한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이하 티토서)을 ‘사목 서간’으로 분류합니다.
이들 세 서간은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개인 서간일 뿐 아니라 원로 사목자가 젊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직분과 실천해야 할 삶의 지침을 제시한 ‘공적 서간’입니다. 아울러 사목 서간들을 바오로 사도의 친필 서간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 대다수 성경학자는 이들 세 서간을 바오로 사도의 제자나 협력자가 쓴 ‘제2 바오로 서간’으로 규정합니다.
티토에 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티토는 바오로 사도가 쓴 서간에 몇 차례 나오지만,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티토는 헬라스 곧 그리스 사람으로 바오로 사도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49년께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예루살렘 사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날 때 티토를 유다인이 아닌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서 데려갑니다.(사도 15장 참조)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티토가 안티오키아 출신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고 어머니가 유다인이었던 티모테오와 달리 티토는 온전히 이방인이어서 바오로 사도에게서 할례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도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티토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주장을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됩니다.(갈라 2,1-3)
티토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그리스 철학과 시학을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세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통역자이자 비서·협력자로 활동하게 되지요. 에페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바오로 사도를 대신해 코린토로 가서 코린토 신자들이 겪는 갈등과 교리적 의문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뿐 아니라 할례와 정결례 등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자들과 자신들의 광신적 생각과 이론을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힐난하고 바오로 사도의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코린토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 일로 티토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큰 호감을 얻습니다.(2코린 7,7 참조) 그래서 마케도니아에서 티토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티토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가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한탄, 그리고 나에 대한 여러분의 열정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위로 말고도, 우리는 티토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이 여러분 모두 덕분에 안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티토는 여러분이 모두 자기를 두려워하고 떨면서 맞아들여 순종한 것을 회상하며, 여러분에게 더 큰 애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2코린 7,7.13.15)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내 동지이며 여러분을 위한 나의 협력자”라고 치켜세웠습니다.(2코린 8,23) 아울러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나의 착실한 아들”이라며 그를 사랑했지요.(티토 1,4)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티토의 믿음과 복음 선포에 관한 그의 열정과 능력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이어 크레타 섬에 있는 여러 공동체의 조직을 마무리 짓도록 책임을 맡깁니다.(티토 1,5) 티토는 바오로 사도의 지시에 따라 크레타 섬에서 남은 일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했습니다.(티토 1,5) 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인 된 새 신자들에게 옛 생활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믿음직하고 착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이후 티토는 바오로 사도가 파견한 아르테마스와 티키코스에게 임무를 넘겨주고 니코폴리스에 있는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티토 3,12)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당부로 오늘날 크로아티아 지역인 아드리아해 동쪽 달마티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2티모 4,10)
교회 전승에 따르면 티토는 달마티아에서 크레타 섬으로 돌아와 초대 주교로 사목하다 93세 나이로 선종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니티나에 안장됐고, 823년 사라센인들이 이곳을 침공할 때 그의 유해(머리)를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티모테오와 함께 1월 26일을 그의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 대부분은 티토서가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바오로 사도의 제자나 협력자에 의해 쓰였다고 봅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ροs Τιτον’(프로스 티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d Titum’,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티토에게 보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티토서는 총 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티토서는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교회 제도와 지도자와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에 관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티토서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내용과 유사하게 유다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어리석은 논쟁, 율법 논란으로 말미암은 해악을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주님 재림의 날을 생각하며 현세에서 함부로 살지 말고 건전한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선행’에 힘쓸 것을 강조합니다.(2,11-15)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1일, 리길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