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바다 같은 삶을 살자(행10:34-38)
2025.1.19, 해외선교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성경의 주요 무대는 이스라엘과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이다. 이스라엘 내륙에는 두 개의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는 사해(死海) 바다이다.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강이 요단강이다.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 폭이 13km, 남북길이가 21km이며, 평균수심은 약 44m이다. 그래서 보통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른다. 갈릴리 호수에는 약40여 가지의 어종이 살고 있으며, 흔히 ‘베드로의 물고기(Peter's fish)’라는 불리는 배스(Bass)가 대표적인 어종이다.
이처럼 갈릴리 바다가 풍성한 이유는 북쪽 헬몬산에서 부터 수원(水源)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요단강을 통해서 아래 남쪽으로 흘러가게 하기 때문이다. 요단강의 남쪽 끝에는 사해가 있다. 갈릴리와는 달리 사해는 글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이다. 왜 그럴까?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면적으로만 보면, 사해바다가 더 크지만,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많이 소유하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더 중요하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겠지만, 갈릴리 호수처럼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오히려 호수나 강줄기의 주변이 살아난다. 반대로 받기만 하고 흘러가지 못하는 사해처럼 생명이 살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모든 삶의 이치가 이와 같다. 그렇기에 학교 학년이 높아지거나 연륜이 많아지거나 또는 지위나 재정이 높아질수록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지난 신년부흥회 때, 강사였던 이정익 목사님의 말씀처럼 나이(지위, 재정 등)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다”.
갈릴리 호수처럼 흐르는 물이 되어야 건강하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침 오늘은 해외선교주일이다. 선교는 생명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타문화권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사역에 힘쓰면, 결국은 갈릴리 호수처럼 자신도 살고, 교회도 살고, 선교지도 산다.
1.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같은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 갈릴리 바다 같은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공급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두루 다니시며 받으신 능력과 축복을 흘러가게 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사역을 가장 굵고 선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10장 38절이다.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했던 내용이다. 다 같이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공급받음)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흘러가게 하심)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성령충만의 공급을 받았을까? 그에 대한 것은 사복음서에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데, 새벽미명과 저녁 등이다. 주님은 매일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사명을 새롭게 하셨다(막1:35-38).
2. 우리도 갈릴리 바다 같은 삶을 살자.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갈릴리 바다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더욱 힘쓰자. 그것은 위로는 성령의 공급받고, 옆으로는 모든 사람을 품고 환대하며, 아래로는 사랑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곧 갈릴리 바다 같은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고, 닮아가게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교회들이 나오는데, 그 교회들은 크게 보면, 대체로 갈릴리형 교회회와 사해형 교회로 구분된다. 사해형 교회는 대체로 흘러감이 부족했던 교회들이고, 갈릴리형 교회는 받은 은혜를 흘러가게 하는 일에 집중했던 교회들이다. 고린도교회와 안디옥교회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고린도교회는 전체적으로 보면, 사해 스타일의 교회에 속한다. 고린도교회는 본질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편을 갈라서 다투고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 안에는 동역자는 없고, 늘 경쟁자만 있었다. 어느 지역이나 모임을 막론하고 경쟁자들만 우글거리는 모임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고린도교회와 같은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려고 하면 뒤에서 비평하며 심사위원 노릇이나 하고, 정작 자신 앞에 일거리가 놓이면 “이 나이에 일은 무슨 일이냐?”고 말하며 발뺌하고, 아멘은 입맛에 맞는 것만 선별적으로 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툭하면 다퉜을까? 갈릴리 바다와 사해의 차이점에 그 힌트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사랑이라는 강(江)’을 통해 흘러가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다(고전13장, 사랑장).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갈릴리 바다 같은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약했다(교세, 재정, 일꾼 등).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수님이 본래 디자인하셨던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의 ‘참교회’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들은 위로부터 받은 성령의 은혜와 생명을 흘러가게 하는 일에 집중했다. 기독교의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인 사도 바울을 파송하고 후원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이다. 두 가지 유형의 교회들 중에 어떤 것을 주님이 더 기뻐하시고, 우리가 어떤 교회를 지향해야할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여기서 잠시 세계 인구와 선교 상황을 살펴보자. 2023년 기준 세계 인구는 237개 국가에 약80억 9천만 명이다. 이중에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71억 4,790만 명이고, 무종교인은 8억 9,741만 2천 명이다. 종교를 가진 인구 중에 범 기독교 인구는 26억 438만 1천 명(천주교-12억 6,885만 8천 명, 개신교-6억 1,567만 6천 명, 정교회-2억 9,059만 4천 명, 무소속-1억 2,140만 명 등)이다. 개신교 중에서도 복음적인 교회에 속하는 숫자는 4억 688만 6천 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적으로 아직 수십억의 사람들이 주님을 알지 못한다.
지역별로는 아시아 인구는 세계인구의 59.0%(약60%)를 차지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인구는 5-7%에 불과하다(한국 20%, 일본 0.44%, 중국6-8%, 대만 8-10%, 인도3% 등). 한국은 20%의 복음화율이라고는 하지만, 청년층(MZ세대)만을 놓고 보면 놀랍게도 약 3%정도 밖에 안 된다.
지난 1월 15일에 한국 오픈도어선교회가 서초동 사랑의 교회에 국제회의실에서 2025년 기독교 박해국 목록(World Watch List)에 발표하였다. 이 발표내용에 의하면, 2024년에 전 세계 약 3억6천5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 받고 있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살해(순교) 당한 것만 해도 4,476건이고, 기독교인이 신앙을 이유로 형을 선고받은 건수는 1,140건, 납치당한 것은 3,906건에 이른다. 폭력과 압박 등 신앙과 관련된 이유로 집을 떠나거나 숨어야 했던 기독교인의 수는 183,709명으로 집계되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북한의 박해이다. 북한은 1993년 첫 기독교 박해국 목록 발표 이후 2022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전 세계 박해국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헌재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는 174개국에 총 21,917명이다(2023년 기준). 이중에 현재 우리교단의 선교사는 54개국에 262가정 496명이다. 우리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님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 모든 통계들은 지금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지금은 우리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갈릴리 바다가 될 것인지 사해바다와 같이 될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종말을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짜질한 문제들을 갖고 신경전이나 벌이면서 신앙의 에너지를 소모할 때가 아니다. 우리교회는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주님이 디자인하셨던 본질에 충실한 교회와 성도가 되는 일에 힘을 기울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모든 인간사의 이치가 그렇듯이 행복은 손을 펴는데서 부터 시작되고, 불행은 손을 움켜쥐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고, 갈릴리 호수와 사해바다의 상태도 이러한 이치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처럼 위로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과 능력을 매일 공급받고, 옆으로는 모든 사람을 품어내고 환대하며, 아래로는 받은 은혜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갈릴리 바다같은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자. 이런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이며, 성도다운 성도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더 많은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