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요일엔 저 혼자 다녀온 고양 올레길 7코스는 정말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혼자 만끽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이번 토요일(5/1) 우리 카페 회원님들과 함께 가고자 이렇게 공지 올리니 호젓하고 가벼운 산행을 원하시는 분들 계시면 꼭 참석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장담컨대 결코 후회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실 요즘 토, 일요일 서울 인근의 산에 가면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이 곳은 사람을 만나볼 수 없는 정말 한갓진 곳입니다.
모처럼 차분함과 여유로움을 누려보고자 하시는 분들 많이 많이 참석하시라고 강추합니다.
아마도 이번 토요일엔 라일락의 그윽한 향기 속에 철쭉도 절정을 이루지 않을까 싶네요.
고양 올레길 걷기 공지
2. 올레길 걷기 일시
2010년 5월 1일(토)
3. 모임 장소 및 시간
가. 모임 장소 - 지하철 3호선 화정역 3번 출구
나. 모임 시간 - 오전 10시
4. 올레길 걷기 코스
가. 코스
원당역 - 성라공원 - 별아천 천변 들길 - 은지 - 수빈(점심식사 : 약 12시) - 한산이씨 묘역 - 궐산 능선 - 별아천 천변길 - 서정마을(공원)까지 걷는 기본구간이 있고요.
계속 이어서 서정마을 - 강매산 봉수대 - 강매석교까지 걷는 제2 구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강매석교 - 행주산성까지 걷는 제 3 구간이 있습니다.
기본 구간은 약 10km 정도고요, 2구간까지는 약 15km, 행주산성 입구까지는 약 17km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제 1구간만 걸을 예정이나 참석자들의 의견에 따라 연장 가능)
나. 예상 소요 시간 : 3시간 ~3시간 30분
5. 준비물
가. 옷차림 - 등산복, 등산화 차림에 배낭 혹은 걷기 편한 운동화에 간편복
나. 각자의 점심식사, 식수, 사탕 등 간식
다. 뒷풀이 비용 : 1/N(뒷풀이는 화정 소재 전원일기 예정이나 변동 가능)
6. 기타 참고 사항
가. 연락처(훈장 : 010-5139-1895)
7. 코스 소개
원당역 3번출구로 나와서 성라공원 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아스팔트에 보도가 있는 길입니다. 조금 가다가 오른쪽을 보면 커다란 무덤이 있습니다. 이곳이 권희의 무덤입니다.
좀 더 가면 화장실이 나옵니다. (올레걷기에서 화장실을 알아두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실내배드민턴장을 끼고 조금 더 가면 다시 실내배드민턴장이 나오고, 한켠에 약수터(수도처럼 생겼습니다.)가 나옵니다.
여기서 고개를 오른쪽 2시 방향으로 돌리면 계단길이 나옵니다. 계단길을 따라 능선까지 오르면 정자가 나오고, 정자를 지나면 철조망을 지나는 길이 나옵니다. 요기서 조금 더 직진하면 오른쪽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을 계속 직진해서 내려오면 흥도동주민센터 가는 길이 나옵니다.
1. 원당(元堂) 지명유래
원당은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관청이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터이다. 이로써 이곳을 ‘으뜸 원(元)’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원당리(元堂里)’ 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 관청은 장경왕후(중종의 왕후)의 묘를 이장한 희릉이 들어오면서 대자골로 이전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이곳은 정승이 많이 나며, 그분들의 묘 자리로 널리 쓰이던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인데 이곳에 왕실의 큰 재실(정자각)이 있어 역시 으뜸 원자와 집 당자를 써 원당이 되었다고 한다.
2. 권희(權僖) 묘 1319(충숙왕 6)∼1405(태종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할아버지는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보(溥)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 고(皐)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홍주도병마사(洪州道兵馬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장단(長湍)에서 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뒤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조선건국 후 1393년(태조 2) 검교문하시중이 되고 원종공신녹권(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았다. 1398년 세자전(世子殿)의 남문에서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를 주관하였으며, 1400년(정종 2)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그뒤 태종조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이 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 아들 : 권근(權近) : 조선개국공신,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종1품 : 뒤의 좌우 찬성) * 손자 : 권제(權踶) : 세종 때 우찬성 * 증손자 : 권람(權擥) : 세조의 공신, 좌의정 역임 * 후손 : - 권철(權轍) : 선조 때 영의정, 권율의 아버지 - 권율(權慄) : 임진왜란 때 도원수(총 대장) - 권상하(權尙夏) : 송시열의 수제자. 숙종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3. 성라산(별아산) 지명유래
성라산(星邏山, 星羅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치 비단과 같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하여 성라산이라 했다고 한다. 베라산은 성라산의 우리말인 별아산을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성라산 정상에서 1년에 한번 씩 관청에서 주관하는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 국사봉이다. |
흥도동주민센터도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요일은 폐쇄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흥도동주민센터를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가면 왼쪽으로 조그만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언던 위로 오르기 위해 냇물에 전봇대 4개로 만든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서 언덕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숲길이 됩니다.
숲길을 올라 정상처럼 보이는 곳에 이르면 길이 갈리는데, 오른쪽 길로 가면 됩니다.
이후 능선길을 따라 가는데, 도중에 몇 군데 갈림길이 있습니다. 대체로 직진하는 것 처럼 가면 되고요, 길 주변에 조그마한 파란 깃발이 있으니 깃발을 따라 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능선길 끝에는 새로운 도로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면 군부대입니다. 군부대에서 좌회전하여 2차선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소로가 보입니다. 이곳으로 들어오다 언덕길이 나오는 순간 언덕을 오릅니다.
4-1 이훈(李塤)/비인현주(庇仁縣主) 묘
이훈(李塤, 세종 11년(1429) -성종(成宗) 12년(1481))은 조선초기 문신이다. 자(字)는 화백(和伯) 또는 도옹(賭翁)이다.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으로 고려말 성리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고손(高孫)이며 관찰사(觀察使) 축(蓄)의 아들이다. 세종(世宗) 21년(1439) 사직(司直)으로 관계(官界)에 나아가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의 반란(反亂) 때 토평대장(討平大將)으로 전공(戰功)을 이루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고 성종(成宗) 1년(1470) 한성부판서(漢城府判書)에 승진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4 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성종 7 년 (1476) 한성군(漢城君)에 봉해졌으며, 그 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안소(安昭). 부인 비인현주(庇仁縣主)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정실소생 유일한 딸이다. |
언덕길을 올라 능선길을 걷다 보면 왼쪽 능선 아래로 연못이 보입니다. 그곳이 은지입니다.
능선길에서 은지를 지났다고 생각이 들 즈음 은지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납니다. 이때 은지 쪽으로 내려갑니다.
은지앞에 있는 비포장 소로를 따라 은지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면 도내동 가는 2차선 아스팔트길이 나오고, 길 옆에 이축 선생과 이종학 선생의 신축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 옆 소로로 계속 내려오면 한정식집 '수빈'이 있습니다. 이곳도 음식이 괜찮은 편입니다.
수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곧바로 한산이씨 묘역입니다. 이곳에는 이축 선생을 비롯하여 이유청 등 한산이씨의 여러 인물들이 묻혀 있습니다.
한산이씨 묘역 맨 위에 이유청의 묘가 있는데, 이곳에서 능선을 오르면 궐산 정상에 이릅니다. 궐산은 말이 산이지 해발고도 54m에 불과한 낮은 언덕입니다. 산 정상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계속 능선길이 나옵니다. 능선 끝은 '수빈'에서 화정지구로 가는 2차선 아스팔트 길이 나옵니다. 길을 건너면 냇물 가로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성사천이 나옵니다. 성사천을 따라 하류로 내려갑니다.
4. 이축 선생묘(李蓄 先生墓) 및 도내동 은지(道乃洞 隱池)
이축 선생묘는 이천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으며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이축(1402~1473)은 고려말의 대학자이었던 牧隱 李穡의 둘째 아들 인재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축선생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고, 연못을 파 은지(隱池)라고 부르고, 뒷산을 궐산(蕨山, 고사리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은지는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이다.
4-2 이유청(李惟淸)
이유청(1459(세조 5)~1531(중종 26)).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직재(直哉). 아버지는 참찬 훈(塤)이고, 어머니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급제함. 1498년(연산군 4) 집의로 있을 때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반대했다가 삭주에 유배되었다. 1501년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삭직되어 관노(官奴)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등용되어 집의·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올랐다. 1519년 판서로 있으면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을 숙청한 뒤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1521년 명나라 세종(世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 중국에 다녀오고, 1523년 좌의정이 되었다. 152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4-3 이덕형(李德泂)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 이수정(二水亭)
이수정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양천군읍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1396∼1486)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종1품)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덕연 형제가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기 위해 이수정을 지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이덕연이 70대로 접어드는 인조 3년(1625)경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덕연이 스스로 호를 이수옹(二水翁)이라 했던 사실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들 형제는 인조반정(1623)이 성공하자 벼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묵시적으로 동조해 성공시킨 혁명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광해군 조정에서 벼슬한 소북 계열이었다. 특히 이덕형은 반정 당시 도승지로 광해군의 심복이었다. 당연히 제거 대상이었으나 옛 임금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충성심이 돋보여 반정 주역들이 포섭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들 형제가 서인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에 이수정을 짓고 언제라도 물러날 준비를 해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형제는 어떻게 효령대군의 임정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형제의 5대 조모인 비인 현주(庇仁 縣主) 전주 이씨가 효령대군의 정실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에서 풀린다. 효령대군이 딸 몫으로 이 임정 일대를 나눠줘 이덕연 형제의 고조부인 우의정 이유청(李惟淸·1459∼1531) 때부터 이 일대가 한산 이씨 소유가 됐던 것이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우뚝 솟은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를 보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러나 겸재가 ‘이수정’을 그릴 당시인 1742년경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 그림은 양천현아 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도당산 봉우리들이 강가에 급한 경사를 보이며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가 상봉에서 서로 만나며 만들어낸 평지에 이수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가 모래톱에서 벼랑 위로 까마득하게 뚫려 있는 외줄기 길이 일각(一閣) 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사 급한 이 오솔길이 이수정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 부근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이런 이수정 풍류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성사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아스팔트 길을 건너서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언덕 위와 아래쪽 냇물 옆으로 2중의 걷는 길이 나옵니다. 정비해놓은 것이 서울 청계천을 본뜬 것 같은데, 좀 어설픕니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바로 수색에서 가라뫼로 향하는 대로가 나옵니다. 대로로 나오면 양편으로 공원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약 10km로 1차 종착지입니다. 참고로 이 공원(SK주유소 쪽)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더 걷고자 하시는 분들은 천별길을 끝까지 계속 걷습니다. 천변길 끝에서 계단을 올라 직진하면 강매동으로 넘어가는 육교가 나옵니다. 육교가 시작되는 지점에 약간의 공터가 있는데, 이곳이 강매역 자리입니다.
강매동으로 가는 육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산쪽으로 오솔길이 나타납니다. 이길을 따라 능선으로 오릅니다.
정상 부근에서 또 다시 능선길이 나옵니다. 오른쪽 방향으로 가면 2번 째 봉우리가 봉수대 자리입니다.
봉수대에서 공동묘지를 따라 내려와 능선으로 계속 내려가면 제2 자유로 공사현장이 나옵니다. 길을 건너면 커다란 무덤이 있는데 이곳이 신효의 무덤입니다. 신효라는 분은 고양9현으로 모신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체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신효의 무덤에서 내려와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강매석교가 나옵니다. 강매석교는 2차 종착지입니다. 여기까지 걸으셨다면 약 15km를 걸은 것입니다.
5. 봉대산 봉수대
이곳 봉수대의 정식 명칭은 봉현봉수(蜂峴烽燧) 또는 해포봉수(醢浦烽燧)로 불리던 해발96m 봉대산(峰臺山) 정상에 위치해 있다. 흙을 쌓아 봉수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봉현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온다고 하며 독산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남쪽으로 서울의 무악 동봉을 거쳐 남산에 보내는 역할을 하였던 경기지역 소재 제3거 내지 봉수 직봉의 마지막 노선이었다고 한다.
6. 강매동석교(江梅洞石橋)
강매동 강고산 마을 창릉천 위에 있다. 강매동 석교는 옛날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등 한강연안의 서부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다리이다. 다리의 기본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24개로 교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 교판석을 깔았다. 교각과 교각 사이에는 6~7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있는데 다리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형태이며 가운데부분이 양 옆보다 높아서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다리 전체의 길이는 약 16m 정도이고 너비는 3.6m이다. 사용된 석재는 화강석이다. 1755년 영조연간에 발행된 『고양군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는데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석교로서의 기록은 다리 난간에 음각된 江梅里橋 庚申新造라는 기록으로 1920년대에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리 옆에 오석으로 만든 비석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나 6.25 당시 총격으로 일부 훼손된 후 현재는 도로에 묻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후 다리는 남쪽의 5m 가량이 무너져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99년 고양시에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후 2000년 복원 정비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고양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
강매석교에서 조금 더 걸을 수 있다면 행주산성을 가볼만 합니다. 강매석교 앞 길을 계속해서 걸으면 곧 한정식집 '목향'이 나옵니다. 목향 정원에서 바라보는 창릉천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목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천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옵니다. 천변길을 계속 따라 끝까지 가면 방화대교 밑이 나오는데, 우리는 중간에 자유로 지점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옵니다.
이곳에서 자유로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면 자유로 밑으로 굴다리가 나오고, 굴다리를 건너면 유명한 국수집이 나옵니다. 국수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행주산성이 나옵니다. 여기까지 걸으셨다면 약 17km를 걸으신 겁니다. 조금 더 걸으시겠다고요? 그렇다면 행주산성을 한 바퀴 걷는 것도 좋습니다.
첫댓글 그날 낮에 친구 딸의 결혼식이...같이 가고 싶었는데 또 못가겠군요(-.-);
아민재님 사정이 그리되시는군요. 결혼식 잘 다녀오시고 담에 또 함께 하지요.
제 고향을 한바퀴 도는 코스네요. 이번에는 메이디도 안내 자청하며 같이 갑니다.
드뎌 메이디님과 함께 올레길 걷게 되는군요.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어 더욱 기대됩니다.
가고 싶은데...이번주엔 신랑에게 올인하고...다음 번에는 함께 할게요
올레길은 앞으로도 자주 갈 것이니 담에 또 가면 되지요. 남편 분과 많은 대화 나누시고 '사랑의 힘'으로 조속한 완쾌 기원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영동 백화산 선약이 있어서 같이 하지 못하네요.
백화산 그 곳에서 산행과 더불어 멋진 추억 담아 오시길요.
저도 가고싶은데 이번주는 출근해야할것 같아서요~잘 다녀오세요~^^..
우리 카페의 올레길 걷기와 산행은 앞으로도 계속되니 담 기회에 함께 하길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주는 공사 일로 출근 합니다 그럴일이 없겠지만 서두...저 없다 서운치 마시고 좋은 시간 되시길요
갑자기 도합 6명이 가게 되었네요. 메이디님 동창들하고 말입니다.
저희 죽마고우 중 간혹 산행 함께하는 친구들 중 몇명 스카웃을 했습니다.
부모님 사시는 곳인데...식구 결혼식이 있네요...끝나고 배다리 박물관을 가면 끝내줄 것인데
nana님 가심 고향이기도 하고 또 코스도 완만하고 정말 좋을텐데 아쉽네요. 담에 꼭 한번 같이 가시지요. 박물관 좋아하시는 것 보니 nana님 은근히 학구파시라는.
신설중인 물고기 박물관이 그 곳의 신흥 명물이지요. 그 곳이 최종 목적지 될 수도....
ㅎㅎ 안 따라 가면 길 잃을 염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