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어장 동주 스님 - 나의 스승 대은 스님
70 노장이 20년 후배에 절 한 까닭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조계종 어장(魚丈) 동주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취지를 말씀드리니 서울 강서구 가양동 홍원사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홍원사는 초기불교수행을 하는 사찰인데, 동주 스님이 거기 계시나?” 자료를 더 찾아보니 동주 스님이 주석하는 사찰이 ‘그 홍원사’가 맞았다. 한국불교의식의 대가가 주석하는 사찰에서 초기불교수행을 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주 스님은 상좌인 홍원사 주지 성오 스님에게 ‘자유롭게’ 공부할 것을 권했고, 성오 스님은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했다. 그 후 미얀마에 가서 위빠사나를 비롯한 초기불교수행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스승의 지극한 관심으로 공부를 했던 동주 스님이었기에 제자도 맘껏 공부하며 수행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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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어장 동주 스님이 원고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 |
홍원사(弘願寺)는 2005년 10월에 문을 연 사찰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에 작지 않은 마당까지 있는 도심사찰이다. 절에 들어서니 남방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 꼭대기의 황금색 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탑을 보고 사람들이 스리랑카 절이냐고 묻는다고 한다.
“말 그대로 홍원사를 ‘큰(弘) 원력(願)’ 을 실현하는 도량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 수 십 년간 불교의식을 집전해왔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제 꿈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스님들의 ‘기본’을 가르치는 수도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꿈을 그려가는 사찰로서 홍원사를 세운 것입니다.”
아직 계획이 세밀하게 구체화 된 것은 아니지만 스님은 수도원의 밑그림을 하나씩 그려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 승려교육을 보면 기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어요. 행자교육만 봐도 예전에는 몇 년씩 행자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6개월만 합니다. 출가하는 이들도 날짜를 계산해서 절에 와 ‘딱’ 6개월 채워 사미(니)계를 받는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에요. 평생 ‘중 생활’을 하려면 행자시기가 중요한데 지금처럼 허드렛일이나 하면서는 원력(願力)을 세우지 못합니다.
저는 ‘중 생활’의 기본과 기초를 다지는 수도원을 6년 과정으로 개설할 예정입니다. 수도원은 우리 전통 강원의 대중생활과 같은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현대적 필수 학문을 가르칠 것입니다. 영어, 일어, 중국어와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등의 기초를 가르칠 것이고 비교종교학이나 철학, 사회복지학, 포교 관련 과목 등으로 교과과정을 구성할 예정입니다. 예불과 천수경 등 기본의식은 필수로 해야 합니다.
준비를 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6년 과정을 마치고 전문과정까지 졸업하면 빨라도 20년 후에나 첫 졸업생이 나올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100년쯤 흘러야 수도원의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먼 훗날의 얘기 같지만 맑은 연못에 조약돌 하나 던지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수도원 부지를 이미 마련해 뒀다고 한다. 세수 70을 앞두고 있지만 스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스님이 이렇게 교육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스승의 지도에 따라 철저하게 공부를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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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홍원사 전경. |
‘스님’은 내 운명
동주 스님은 절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아버지도 스님이었다. 아버지 스님은 범패를 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간 행사장에서 스님들이 범패 하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범패에 푹 빠져 버렸다.”고 한다. 아마 지금 스님의 모습이 그때 결정된 것인지 모른다.
“스님이 되겠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그러다 16살 때 늑막염에 걸렸는데, 죽다 살아났죠. 그때 아버지 스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가 만약 죽게 된다면 영혼 득도식이라도 해달라고요.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천도의식을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일어났습니다. 몇 달 요양을 한 뒤 17살에 대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법명(法名)은 원명(元明)이고, 지금 쓰는 동주(東洲)는 나중에 은사스님께 받은 법호(法號)입니다.”
스님은 1961년 서울 사자암에서 대은 스님을 만났다. 사실 대은 스님은 아버지가 추천한 분이라고 한다. 용인 화운사에서 비구니 스님들을 가르치고 있던 대은 스님이 세간(世間) 아버지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세간(出世間)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은사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동네 시골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어요. 푸근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이었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자비로웠죠. 나중에 화운사 비구니스님들이 ‘친정 아버지 같다’고 얘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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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은 스님 진영 |
출가 후 5년 정도 경(經)을 배운 스님은 대은 스님의 추천으로 범패를 비롯한 불교의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예전에 노장님들이 도반을 만나면 묻는 것이 세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상좌를 몇이나 두었는지, 죽으면 화장할 장작 값은 마련했는지, 그리고 상좌에게 범패는 가르쳤는지가 중요한 인사 메뉴였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은사스님께서도 저에게 ‘중물을 들이려면 의식을 알아야 하니 배우고 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불교의식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대강사(大講師)였던 대은 스님은 강사의 길을 걷기 전에는 영산재를 비롯한 모든 의식을 배웠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재(齋)에 빠짐없이 참여했던 재바지 스님이었다. 14살 때 화계사에서 재를 올리다가 가사 입은 스님들의 모습이 좋아 보여 재를 진행하던 상궁에게 가사를 입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상궁에게서 돌아온 것은 면박뿐이었다. “가사는 큰스님들이 입는 것이지 너 같은 재바지 중이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말이다. 상궁의 말에 충격을 받은 스님은 그길로 금강산 유점사로 가 공부를 시작했다. 대은 스님은 하루에 경전구절의 한문을 150줄씩 외울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유점사에서 기초 공부를 마친 스님은 보은 법주사, 문경 대승사, 공주 마곡사 등에서 경전공부를 했다. 그 후에는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서 학인들을 가르쳤다.
동주 스님은 김포 문수사에서 벽응 스님에게 범패를 처음 배웠다. 범패의 기초만 몇 달 배웠다. 벽응 스님은 숨소리까지 똑같아야 다음과정을 알려줬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 절에 돌아왔더니 대은 스님이 이번에는 송암 스님을 다시 추천해줬다. 송암 스님은 당시 ‘불교계의 아이돌’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재를 집전했다고 한다.
“은사스님께서 송암 스님을 찾아가 ‘스님이 알고 있는 소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원명이에게 가르쳐 달라’며 절을 했다고 해요. 그때 은사스님 나이가 70이 넘었고 송암 스님은 이제 막 50줄에 접어들었는데, 제자 공부를 위해 후배스님에게 절을 하신 거죠. 그 얘기를 나중에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처음에 송암 스님한테 갈 때만 해도 3개월 정도만 배우고 나중에 은사스님처럼 훌륭한 강사(講師)가 되자고 생각했는데 스님께서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끊어져가는 전통 불교의식의 맥을 잇고 후학을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충분하게 배우지 못했다. 송암 스님이 너무 바빠 아침에 10분 ~ 20분정도 소리를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송암 스님은 바쁜 가운데서도 아침마다 동주 스님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다른 절에 가서 재를 해줬다고 한다. 잠깐 배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스님은 하루 종일 완벽하게 연습했다. 스스로 다 외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동주 스님은 다음 것을 배우지 않았다. 그렇게 4년 동안 송암 스님에게 의식을 배웠다.
술 취한 스님과의 하룻밤에 선방 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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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 대은 스님과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동주 스님. |
봉원사에서 한창 송암 스님에게 불교의식을 사사받던 어느 날, 동주 스님은 한 노스님을 만났다. 매일 술에 취해 있어 가까이 가는 것조차 싫었던 그 노스님과 하루 밤을 같이 보내게 됐는데 그 스님이 주정처럼
“정신 차려라. 속지 말아라.”는 말을 토해냈다. 동주 스님은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가?”하고 귀를 닫았다. 그런데 그 노스님은 계속 그 말을 했다. 그래서 여쭈었다. “무슨 뜻입니까? 정신 차리고 속지 않으면 중노릇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 있는 대중들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는데, 나는 미치지 않았다. 속지도 않았다. 내가 너를 보니 귓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참선을 해라.” 그 노스님은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조사(祖師)스님들의 수행이야기와 참선 방법에 대한 얘기를 전했다. 밤새 공부 얘기를 들은 동주 스님은 발심(發心)이 됐다. 선방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진 것이다.
“당장 선방에 가고 싶었지만 송암 스님에게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어 더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빨리 배우고 나서 선방에 가자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공부를 한 뒤 1970년 하안거 해제 이틀 전에 송암 스님께 선방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스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버리셨어요. 실망을 하신 것이죠. 한참 지나고 나서 스님께서 ‘선방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다시는 여기 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허락을 받고 선방에 갔습니다.”
동주 스님은 대은 스님의 추천으로 부안 내소사 선원으로 갔다. 당시 내소사에는 해안 스님이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었다. 해안 스님에게 ‘이뭣고’ 화두를 받고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 순천 송광사, 문경 대승사 선원 등에서 공부했다.
“발심해서 간 거였으니까 열심히 했어요. 평생을 선방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저에게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해안 스님이나 성철 스님, 지월 스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같은 어른스님들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불교의식은 신도교화의 핵심
8년 여 간 선방에서 공부를 한 스님은 1977년 출가 사찰인 사자암 주지로 환지본처(還至本處)했다. 1993년까지 주석하며 가람을 일신했다. 사찰 불사(佛事)와 함께 불교의식을 재정립하는 불사도 같이 진행했다. 1980년 당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의 도움으로 ‘조계종 의식수련원’을 열어 6년여 동안 스님들에게 제반 불교의식과 범패를 지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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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석암 스님, 대은 스님, 송암 스님, 동춘 스님의 모습. 부산 선암사에 재를 지내고 기념촬영한 모습이라고 한다. |
사자암 주지를 마치고 나서도 불교의식 연구와 설행(設行)은 계속됐다.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등 지금까지 스님이 설행한 각종 재의식만 3,000회가 넘는다. 특히 조계종 출범 후 처음으로 2003년부터 3년간 조계사에서 진행한 영산재는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영산재 시연을 하려고 몇 달을 준비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10시간이 넘게 설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의식을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체력도 중요합니다. 쉽지 않았지만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보다 이제야 제대로 영산재를 재현한다는 생각에 환희심이 절로 났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스님은 2006년 조계종의 의식을 관장하는 어산 어장에 임명됐다. 이에 앞선 2005년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조계종 불교의식을 정비한『승가의범』의식집을 펴냈다. 현대판『석문의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불교의식 전반을 담아냈다.
그리고 지난 1월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3호 ‘경제어산(京制魚山)’ 보유자가 됐다. 경제어산은 서울경기지역의 불교소리를 말한다.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소리가 경제어산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경상도 소리만 경제어산과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범패, 판소리, 가곡 등 3대 성악곡이 있습니다. 판소리와 가곡은 조선중기 때 생긴 것으로 약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범패는 신라 말 진감 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와 전해진 것으로 1,100여 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 선생이 쓴 진감 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에 상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광종 때 시작돼 조선조 500년간 서울을 중심으로 전해진 경제어산 수륙재는 지금은 그 명맥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지정을 계기로 경제어산의 전통을 잇는 일에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동주 스님은 지난해 홍원사에 한국불교전통의례전승원을 열었다. 전문과정 2년, 연구과정 3년의 전승원에서는 15명의 스님들이 동주 스님에게 의식을 배우고 있다. 전문과정에서는 상주권공, 불교의식장단, 영산재, 천도재, 예수재 등과 한글불교의식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며, 연구과정에서는 수륙작법을 배운다.
“불교의식은 신도교화의 핵심입니다. 불교의식은 또 선정(禪定)의 극치에서 나옵니다. 마음을 일념(一念)으로 모으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아요. 모든 번뇌가 사라져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야 소리의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원칙과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계행(戒行)이 청정한 스님이 의식을 해야 합니다. 계행이 깨끗하지 않은데 어떻게 천도를 하겠습니까? 둘째, 입으로는 염불을 외우고 소리를 하되 마음으로는 지금 하고 있는 소리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가를 천도할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셋째, 사성(四聲)으로 소리를 해야 합니다. 사성이라고 하는 것은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말합니다. 넷째, 법력(法力)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청이 좋아도 수행이 안 되면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참선이든 기도든 염불이든 경전 공부든 그 어떤 수행법도 좋습니다. 수행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를 갖춰야 비로소 제대로 된 불교의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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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스님이 홍원사에 범패 시연을 하고 있다. |
동주 스님은 특히
“불교의식은 교리의 꽃이다. 팔만대장경의 골수만 뽑아서 만든 것이 의식이다. 글만 새기지 말고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앞으로 불교의례의식의 한글화와 수륙재의 가치를 알리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수륙재는 육지와 강과 바다 등에서 죽어 저승에 가지 못하고 허공에 떠돌면서 갖은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을 천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동주 스님은 “의식의 한글화는 시대적 요청이다. 의식 책임자로서 반드시 한글화가 이뤄지도록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점심 직후에 시작된 인터뷰는 저녁 공양 시간까지 계속됐다. 잔뜩 찌푸려있던 하늘에서도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는 도중 스님 방 한편에 있는 글씨가 눈에 띈다. ‘淸池皓月照禪心(청지호월조선심)’, 즉 ‘맑은 못에 비친 밝은 달은 선승의 마음이다’는 뜻이다. ‘입’이 아닌 깨달은 마음으로 의식을 해야 한다는 동주 스님의 의지가 녹아 있는 듯하다. 창밖의 눈을 보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대은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스승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제 속가 아버지 스님이 대은 스님과 저를 만나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어요. ‘우리 원명이는 나보다 스님을 더 좋아합니다.’ 대은 스님에게 싫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으신 거죠. 저는 세세생생 대은 스님과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이번 생에는 제가 먼저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스님이 다시 환생하셔서 저의 제자가 되면 좋겠어요. 또 나중에 제가 죽으면 다시 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역할을 바꿔가면서 성불할 때까지 인연을 계속 맺고 싶어요. 하하.”
■ 대은 스님은
대은소하(大隱素荷) 스님은 평생을 포교와 강의에 진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7살 때 철원 심원사에서 출가했으며 금강산 유점사와 문경 대승사, 보은 법주사 강원 등에서 공부했다. 또 유점사 선원을 비롯한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대은 스님은 보은 법주사와 문경 대승사, 서산 개심사, 용인 화운사 등에서 강사로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중앙불교전문학교와 혜화불교전문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조선불교 교무원 중앙포교사, 대자유치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옹 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처음 인연을 맺은 스님이 바로 대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대은 스님은 서옹 스님을 만암 스님 문하로 보내 출가하도록 했다.
『석가여래약전』,『암야의 등명』,『신앙의 등불』,『피안의 메아리』,『삼세인과』,『육조대사 고행록』,『금강신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수필, 산문 등을 남겼다. 2009년 대은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문도회에서는 저서 등을 모아『대은 대종사 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동주 스님이 사자암 주지를 하면서 모시던 중 1989년 3월에 입적했다. 세수 96세, 법납 89세.
유철주 객원기자
[출처: 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