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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0: 1-8 그 후에
본문에서 모세는 바로 왕의 두 관원장이 투옥된 사실(1-4)에 이어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서 그가 꾼 꿈을 듣고 해몽하게 된 경위 중에 한 부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수종 들던 "관원장"들이 이 때에 요셉이 갇힌 옥에 들어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결국 요셉은 바로 왕에게 등용되었습니다.
그가 등용됨으로 마침내 가나안에서 살던 그의 친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15:13)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1. 본문 1-4절은
"①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②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③ 그들은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④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지 수일이라" 입니다.
1) 요셉이 잡혀 속박을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돌보셨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보아왔습니다.
요셉에게 이런 시험이 닥칠 때마다 그 시험을 경감시켜 주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런 내용들은 하늘로부터 베풀어지는 은혜가 아니고는 이해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종을 해방시키고 구속하시기 위해서 자유의 문을 여시기 전에 그 종이 갇혀있는 바로 그 감옥에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 종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그 후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은혜가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자유케 하실 뿐 아니라 그를 높은 지위에까지 올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그 거룩한 종을 복잡하고도 신기로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그 감옥에 던져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그들의 꿈을 자세히 풀어 주게 되었는데 술 맡은 관원은 전직을 회복할 것이라고 약속해 줍니다.
그래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하나님의 종인 이 거룩한 죄수에게 비쳐오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이 복직되면 왕에게 요셉의 무죄함을 변호해 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도 황급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복직된 후에 이 비참한 죄인에 대해서 왕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제 요셉은 이제 자기는 영원한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으며 이 꺼져버리고 희망을 잃은 심지에 우리 주님이 갑자기 불을 밝히시지 않는 한 그는 종신토록 잊혀진 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자를 감옥으로부터 곧 꺼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는 못하나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역사를 놀라운 방법을 통하여 행하심으로써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뚜렷한 뜻을 우리로 좀더 잘 알 수 있는 그런 멀리 우회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택하심으로써 그분 스스로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우리 좁은 식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손 안에서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그분의 뜻을 성취할 때까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라는 두 사람은 그 계층의 일반인이 아니라 그 계층을 통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환관 또는 귀족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게룬덴시(Gerundensis) 는 바로가 그들의 추행을 알고 대노하여 그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들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엉터리 주장을 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궁중 관리 중 각각 한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인 것입니다.
2) 이 감옥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휘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세는 더욱 명확히 밝힙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수장이 요셉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풀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시위대장의 분노가 많이 누그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으로 하여금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섬기게 한 것은 보디발의 도량이 그 만큼 넓은 탓이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보디발 대신 시위대장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3) 모세는 바로 이어서 시위대장이 요셉의 주인이라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절).
두 관원장들이 시위대장 집 안에 있는 옥에 갇혔고 그곳은 요셉이 갇힌 곳이기도 합니다.
4) 특별히 모세는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 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4절) 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수일이라' 는 표현을 '일년 내내' 갇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나 그것은 잘못된 것 같고 단지 오랜 기간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옥안에 갇힌 자들과 두 환관장까지 섬기게 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옥중에서 많은 죄수들을 관할하였으나 이제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은 바로 왕 앞에 있던 고관들이었으니 만큼 문제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본문에 "요셉이 그들을 섬겼다"는 말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2. 본문 5절은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입니다.
앞에 꿈에 관하여 기술한 것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많고 하찮은 일들이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지는데 거의 대부분은 잠시 뿐이고 다 잊혀지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것들은 예언적으로 중요한 일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바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이 꾼 두 가지 꿈은 미래에 일어날 숨겨진 결과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로 그런 꿈인 것입니다.
사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가 아니라면 그 두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뒤흔들고 깜짝 놀라게 하여 그 꿈을 중요하게 생각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 없고 공허한 꿈에 굉장히 집착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 때문에 오는 근심이나 두려움을 점차적으로 사라져 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마음속에 화살 한 개씩 박아 놓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꿈을 해몽해야만 되겠다는 깊은 궁금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꿈이 어떤 확실히 일어날 사실의 예언이라고 강력히 말한 것입니다.
3. 본문 6-8절은
"⑥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⑦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⑧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보아야만 합니다.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에게서 미래에 닥쳐올 운명에 대한 어떤 계시가 주어졌다고는 해도 그것은 그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요셉을 생각해 된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요셉을 왕에게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손을 자기 종 요셉에게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은밀한 계획하에 그들이 비탄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요셉이 전에는 갖지 못했던 예언의 은사가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그에게 역사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전에 꿈을 꾸었을 때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의아스러워 하는 태도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른 사람에게 확신에 찬 해석을 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그들에게 근심에 찬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꿈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2) 그러나 그 다음 절에 보면 꿈을 해몽하고 예언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자기 자신이 받았다는 사실을 직접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들에게 그들의 꿈을 자기에게 말해 줄 것을 권하고 자기가 그 꿈을 해몽할 수 있을 거시라고 알려줍니다.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내게 고하소서" 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8절).
그는 확실히 거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만 있는 특유한 것을 자기 것인 양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직책과 재능의 모든 것을 통해서 그들을 위해서 봉사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셉정도 쯤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데 도용(盜用)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쳤습니다(고전12:4). 또 아무도 너무 지나친 욕심을 갖고 행동하거나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자기 위치를 정해 주셔서 모든 사람이 자기 범위 내에서 일하고 움직일 것을 바울은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런 절제 있는 덕이 존중되고 실행되지 못한다면 만사가 혼란 속에 휩쓸리고 평화와 조화가 교란됩니다.
모든 아름다운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큰 은사로 자기를 도와 주시고 계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요셉은 그 꿈을 해몽해 줄 것을 확실히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꿈에 관한 그의 질문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위임되어진 권한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꿈을 예측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 꿈의 해석이 자기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용한 방법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서 바벨론 왕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꿈을 직접 계시로 알게 해 주고 다시 그 꿈을 해석까지 해 줄 수 있었습니다(단2:28).
다니엘은 성령의 역사에 좀더 크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알아내는 일과 해몽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의 반 밖에 받지 못한 요셉은 스스로 자제하고 순리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것을 멀리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지혜로움이나 잘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늘 겸비하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모든 사실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남보다 뭔가 좀 나은 사람들은 이 법칙을 꼭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범하게 되는 잘못을 줄 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 권능 있게 보이고 능력 있는 듯이 만듦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불명료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허영심을 자제하게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뿐 만 아니라, 은혜 받은 자의 특권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은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은 모두 성령이 역사 하심에 복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할 점은 모세가 언급하고 있듯이 요셉이 자기와 같이 감옥에 갇힌 동료 죄수들의 슬픔과 걱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돌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픔이 위로 받고 경감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그냥 보고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통해서 공동의 고난은 상호적인 동정심을 산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슬픔으로 우리를 연단시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무거운 시험의 짐을 지고 그 짐에 짓눌리고 욕스런 경험을 당하고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인간애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애란 반드시 경험에 의해서만 습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 속에 내재한 잔인성은 자기 번영에 비례해서 점점 커지고 팽창되기 때문입니다.
5) 고난의 길을 가 본 사람만이 고난 중에 있는 동료에게 진지한 관심을 둡니다.
고난의 길에서 위로를 받고 경감 받은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돌아볼 것입니다. 참 사랑을 경험한 자가 습득한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입니다. 하늘의 위로를 땅에서 받아 본 자가 연약한 자를 참으로 위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은혜 받은 자의 특권도 계속해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