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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감동시키라 / 조상호 목사
제가 지난주에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서울 무교동 코오롱 빌딩 앞에서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1.5평 남짓한 이동식 스낵카에서 토스트를 굽는 김석봉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전북 정읍에서 빈농의 6남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도둑질만 빼놓고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자동차 정비소 견습공, 조선소 컨테이너 공장 노동자, 용접공, 과일행상, 공사장 막노동, 등 극심한 육체적 피로가 수반되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 그러다가 지난 97년 3월 그는 토스트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길거리에서 토스를 파는 노점상이 된 것입니다.
토스트맨이 된 그는 여느 노점상인들과 다르게 장사를 했습니다. 양배추, 오이, 등의 토스트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매일 구입하여 직접 깨끗이 씻고, 커피물도 정수기로 걸러내고, 토스트와 함께 판매하는 우유도 아침마다 새로 구입했습니다. 또 보통 포장마차에서 쓰는 철제 그릴판을 스테인리스로 바꿨으며, 두루말이 휴지 대신에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는 최고급 티슈 화장지로 바꾸어 손님들이 토스트를 먹고 나서 더러워진 손을 닦을 수 있게 했습니다. 모든 재료는 저칼로리 위주의 최고급으로만 선택했고 조미료와 설탕은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계란도 일반란이 아닌 값비싼 영양란을 사용했습니다.
또 음식을 만지는 손으로 잔돈을 거슬러 주는 것이 불결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돈을 넣고 잔돈을 거슬러 가는 '셀프 계산제'를 도입했습니다. 또 주위에 있는 호텔의 외국인들도 자주 들르는 것을 보고 메뉴판도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4개 언어로 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는 노점상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하얀 호텔 조리사 복장을 하고, 항상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님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오늘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본 손님들이 감동을 받아, 한 번 그의 토스트를 먹어 본 손님은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만드는 토스트를 먹기 위해 일본에서 1박2일 일정으로 여행을 오는 일본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무교동 5대 명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여행가이드 북에도 올라 있고, TV에도 자주 출연하고 수많은 매스컴에 등장하는 등,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김석봉씨는 비록 길거리의 노점상이지만 매월 순수입 8백만 원을 벌고 있는데, 연봉으로 계산하면 약 1억원, 뉴질랜드 달러로 계산하면 연봉 15만 불의 고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석봉토스트' 브랜드로 대형 쇼핑몰에 진출하는 등, 15개 체인점의 창업주가 되었고, 작년 6월에는 '샌토매니아'라는 브랜드로 중국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에 목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삭막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주는 업소를 가고 싶어 하고, 감동을 주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며, 감동을 주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젊은이 1,000명에게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조사기관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은 자동차를 원하고, 핸드폰을 원하고, 멋있는 이성 친구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사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은 “나는 감동 받고 싶다”였습니다. 즉 요즘 젊은이들은 감동에 목말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연세 드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감동을 받으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사람은 인기가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업소는 장사가 잘 됩니다.
김석봉 씨는 과거에는 음식 맛만 좋으면 식당이 잘 되었지만, 요즘은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리 맛이 좋다할지라도 식당 분위기가 영안실 같이 침울하다든지, 식당 주인이 인상을 박박 쓰고 있다든지, 손님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손님들은 왔다가도 다시 나가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식 맛도 좋아야 하지만 분위기도 좋아야하고 고객들을 요즘말로 “뿅”가게 감동을 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감동시대입니다. 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작은 것 하나를 통해서도 감동을 합니다. 한 두 마디의 말을 통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원합니다. 아니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께서도 감동 받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여기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는 말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감동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솔로몬 왕은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어떤 모습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우선시하라
첫째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그의 삶에서 최우선시한 사람입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솔로몬이 여호와를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사랑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11장 3절에 의하면 아내가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나 되는 수많은 왕비들을 두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3절 하반절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는 말을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계속해서 분향했다’, ‘계속해서 제사했다’, “계속해서 예배했다"는 계속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성전이 건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당을 곳곳에 세워 놓았는데, 솔로몬은 이 산당에 가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4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에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고원지대입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당에서 제사할 수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산당이 있는 기브온에 가서 1,000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1,000번제를 드렸다‘는 이 말은 성경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횟수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은 무려 1,000번이나 번제를 드렸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횟수가 아닌 양(量)을 나타내기 때문에 솔로몬은 1,000마리의 제물을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주장을 다 받아들여 1,000번의 제사를 드렸든지, 1,000마리의 제물을 드렸는지 아무튼지 일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출애굽 시절에 브살렐이 만든 번제단의 길이는 2.3미터이고, 폭은 2.3미터이고, 높이는 1.4미터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에, 만약 솔로몬이 소를 번제물로 드렸다고 한다면 이 번제단에서는 한 마리 정도 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또 규례에 의하면 번제를 드릴 때는 한 번에 여러 마리를 태우지 못하고 한 마리씩 태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소 한 마디를 태우는데 아무리 빨리 때운다 할지라도 30분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만약 한 마리를 때울 때 30분이 걸렸다고 가정한다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번제를 드려도 하루에 50마리 이상 번제를 드리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렇게 계산할 때, 1,000마리를 번제로 드리려면 적어도 20일 내내 번제를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솔로몬의 식사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과 휴식 시간, 등을 뺀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번제를 솔로몬이 드린 것입니다.
원래 번제를 드릴 때는 한 마리의 제물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천 마리 번제물을, 천 번에 걸쳐 드렸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 그저 봉투에 헌금을 담아 천 번 드린 것과는 다릅니다.
솔로몬은 제사 현장을 떠나지 않고 온 백성의 대표들과 함께 직접 한 달여 동안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하들과 회의하는 일보다도, 전방부대를 시찰하는 일보다도, 그 어떠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도,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중요시했습니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옛날 중국 송나라 때에 생겨난 말입니다.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몇 마리 키웠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원숭이가 늘어 갔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에게 충분한 먹이를 대줄 수 없어서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열매를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 주겠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러자 원숭이들은 열매를 적게 준다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공은 말을 바꾸어서 "아침에는 4개, 저녁에는 3개 주겠다"고 하니까 원숭이들은 좋아라고 하면서 데모를 중지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조삼모사'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나중은 생각하지 않는 미련한 사람을 뜻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더 큰 이익을 놓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더 큰 유익을 놓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일 뒤로 제쳐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인생의 가장 후순위에 모셔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크라이스트처치 순복음식구 여러분!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서도 여러분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하나님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처럼 물질의 첫 자리, 취미의 첫 자리, 인간관계의 첫 자리, 시간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놓으셔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겸손하게 행동하라
둘째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교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겸손한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니까 겸손이 우리가 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울 때는 그런대로 겸손할 수 있는데, 좀 살만할 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히스기야 왕은 강대국인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보낸 사신 랍사게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즉시로 성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십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사37:17)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사38:2~3). 그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격퇴시켜 주셨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신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냈을 때는 달랐습니다.
이사야 39장 2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의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보였으니, 궁중의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히스기야는 궁중의 모든 보물을 그에게 보여주며 뻐기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신 앞에서 하나님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을 물리쳤다고 간증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상에서 일어났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증거했다면 바벨론 사신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구나. 나중에라도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큰 일 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 인양 교만하게 뻐기고 자랑만 일삼았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유다는 후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이 초토화 되어 다 불타버리고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멸망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과 달리, 솔로몬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였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그는 스스로를 ‘작은 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솔로몬의 나이가 몇 살이기에 스스로를 ‘작은 아이’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20대 초반이었다고 추측을 합니다. 지금이야 20대 초반은 어린 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20대 초반이면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를 ‘작은 아이이고, 출입할 줄을 알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올바로 처신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결국 이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감동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자기의 한계를 아는 사람,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 자기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알지 못한 채 교만한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계3:17)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장 33절에서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대적 당하지 않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교만의 옷을 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보시고 감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같이 자기의 부족함과 자기의 연약함과 자기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할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잘 풀릴 때나, 처음이나 나중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항상 겸손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보시고 감동하십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하라
셋째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에 감동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니? 말해보렴’ 이렇게 말씀하시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 아들이 법대에 진학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노처녀 딸 좀 시집가게 해주세요.’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안정된 직장에 취직시켜 주세요.’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뉴질랜드에서 대박 터뜨릴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 하나 주세요.’라고 하시겠습니까?
뭐라고 하나님께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실 솔로몬에게는 구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이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그가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서두에 <연봉 1억 신화>의 주인공 김석봉씨를 소개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분입니다. 오전 11시에 토스트 장사를 끝내고 매일 오후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복지관 등을 찾아 불우한 어린이들,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직접 토스트를 구워주고 때때로 인형극 공연 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아직도 전셋집에 살고 있지만, 정수기로 걸러내어 보온병에 담아 둔 온수로 탄 커피에 대한 수익금은 무조건 100% 이웃돕기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쓴 책의 217쪽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저는 어려운 이웃에게는 손님들의 선행을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는 손님들이십니다. 그래서 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하는 일은 선행이 아니라, 보답입니다. 제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석봉토스트를 구매하는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고마운 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제 사업을 도와 주셨음을 항상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저는 봉사를 합니다. 제가 봉사를 그치면 언제라도 사업은 망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좋은 의도가 퇴색되면 저는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맘으로 나보다 가난한 이웃에게 물질적인 도움,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려는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더라도 행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저는 나눔이 자기를 나타내 보이려는 선행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눔은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이처럼 그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20만 평의 대지 위에 어린이 캠프장을 만들기 위해 마라토너의 마음으로 일년 365일 하루하루를 열심히 뛰는 토스맨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남을 돕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결국에는 이익이 됩니다.
솔로몬의 삶을 보십시오.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11절부터 1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없을 만큼, 모든 인류 중에 가장 뛰어난 지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주셨습니다.
또 14절을 보면 장수와 건강까지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이타적인 삶이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내가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쓰신 사람은 예외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줄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낮 “내 것, 내 것“만 외치지 말고 솔로몬처럼 이타적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처럼, 김석봉씨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고객들에 대하는 서비스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 봉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다는 자세입니다.
둘째로 상식선에서 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힘쓰는 자세입니다.
셋째로 감동을 주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다시 말하면 상식을 넘어선 자세입니다.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세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세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상식적인 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기대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타입에 해당됩니까?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상식적인 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입니까?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