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러진 신발굽
'하 하사 님 예쁜 아가씨가 면회 왔습니다.' 라는 전갈을 받고 선망의 눈초리들을 뒤로하고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달음에 부대 정문으로 나갔다.
내가 복무하던 공병부대가 대관령 고갯길을 정비하기 위해 강릉에 주둔한 것은 제대를 수 개월 앞둔 60년대 중반이었다. 강릉은 여름철 피서지로 널리 알려진 경포대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경포대에서 일요일 한나절의 피서를 마치고 귀대하는 버스 속은 콩나물 시루와 같았다.
마침 잽싸게 먼저 탄 신참병 덕분에 맨 뒷좌석이었지만 겨우 엉덩이를 걸칠 수 있었다. 앉고 보니 바로 옆에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부채질을 하며 앉아 있었다. 계속되는 부채질에 싱그러운 여인의 향기도 함께 전해져 왔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사도를 앞세워 부채를 넌지시 물려받아 아가씨를 향해 부지런히 부채질을 하였다.
그 부채 바람에 실어 보낸 내 마음이 전해졌는 지 아가씨는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강릉의 외삼촌댁에 다니려 왔다는 스무 살 전후의 서울 처녀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서울 아가씨와 경상도 사나이의 만남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설마 부대로 면회를 오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녀와의 재회라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손에 들어온 보물을 혹여 놓칠세라 서둘러 외출수속을 밟고 부대를 빠져 나왔다. 어린이가 설레며 즐겨 먹는 외식이 자장면이라 했지만 그때 그녀와 먹은 자장면 맛이 그런 맛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설렘 속에 맛있는 자장면으로 저녁 요기를 하였다.
강릉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남대천이라는 큰 하천이 있고 이 하천의 둑을 따라 내려가면 경포대와 이어지는 해변에 닿는다. 어스름 녘의 여름밤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둑을 따라 바닷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연인인 냥 손을 잡고 걸었다.
손잡고 걸으며 스치는 여름옷 속으로 느껴지는 여인의 촉감을 음미하며 걷고 또 걸었다. 서울의 가족들 이야기며 강릉의 외갓집 이야기 그리고 경상도로 수학여행 갔다가 알게된 경상도 청년과의 추억담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둘 다 시계를 보지 않고 마냥 걸었다.
호사다마랄까 그런데 탈이 나고 말았다.
아가씨의 여름신발의 굽이 하나 부러지고 말았다. 너무 많이 걸어와 되돌아가는 데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걷는 것도 잠시, 신발을 벗고 걷기도 하다가 결국엔 나의 어깨와 등을 빌리기도 하며 강릉 시내 초입에 닿은 것은 새벽 한시가 지나서였다.
당시에는 통금이 있는 시기라 밤 12 시가 지나면 모든 교통편이 끊어져 더 이상 시내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지금의 강릉 단오제가 열리는 위치에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있었다. 그 당시는 이 다리를 건너면 시내와는 달리 한적한 시골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인적이 사라진 둑길을 계속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 시내를 벗어났다. 다리를 건너 어디로 갈 건지 목적지도 없이 천천히 또 천천히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눈앞에 학교의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에는 스탠드가 있었고 찌그러져 가는 등받이가 달린 긴 나무의자도 있었다. 나무의자에 앉아 그녀의 아픈 다리를 쉬게 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의 찬 기운이 그녀를 움츠리게 했다. 서로의 체온으로 한기를 막아야 했다. 하늘에는 밝고 둥근 달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많이 걸었고 또 너무 많은 말을 하여 이제는 더 할 말도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차츰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둘은 잠시 잠이 들었다. 다시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사위가 훤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바탕의 아련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지금도 부러진 신발굽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거나 달밤에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하나 보다.
● 益山小考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 봄, 내 나이 마흔 다섯에 한전에서 부장으로 승진하여 처음 부임한 곳이 이리(지금의 익산)라는 곳이었습니다. 전라북도는 그 때까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신비의 땅이었습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털털거리는 내차 포니를 몰고 이리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이르니 이리전력소의 과장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곳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주변의 경관이 좋아 너무나 만족스런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 무렵은 개나리와 벚꽃이 피는 계절이었습니다. 백리길 전군도로의 시발점인 전주에서는 개나리가 길가에 만발하였고 이어지는 벚꽃 길을 달리다 보면 눈보라 되어 날리는 꽃잎은 황홀경이었습니다. 군산에 이르면 장항으로 넘나드는 뱃머리의 횟집에는 상이 비좁아 다 올리지 못하는 푸짐한 상차림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그쪽 지방의 음식은 너무나 풍성하여 술 한 잔 시키면 나오는 陸海空의 온갖 먹거리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술을 시켜 먹곤 했습니다. 초여름이 되어서는 그곳 직원의 결혼식에 젊은(?) 나이로 주례를 선 일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이웃 간에 인심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리전력소(지금은 익산전력지사)라는 곳은 이리, 익산, 군산, 부안, 김제 등에 있는 변전소와 이들을 연결하는 송전선로를 유지, 보수, 관리하는 업무를 하는 곳이어서 관계되는 직원의 수가 칠 팔십 명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매일이다 시피 돌이다, 생일이다, 부모님 회갑이다 하여 관혼상제의 행사가 이어졌는데 푸짐한 음식과 인심에 놀랐습니다. 푸짐한 음식과 인심에 비례하여 몸무게가 늘어 얼마 후엔 처음 가져 간 옷들을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관할하는 변전소와 송전선로가 여기 저기 산재하여 있어 이곳들을 순시하는 일도 책임자의 할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군산에는 변전소가 세 곳이나 있어 자주 가는 편이었습니다. 군산에는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공원과 호수 그리고 큰 제지공장과 유리공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리를 중심으로 그쪽 지방엔 높은 산이 별로 없어 잘 포장된 평야길을 달리는 기분 또한 비길 바 없었습니다. 부안과 격포로 가는 길 또한 만경강과 동진강을 낀 평야를 지나며 볼 수 있는 석양의 서해안 낙조는 장관이었습니다. 격포에서 처음으로 우럭이라는 회를 먹어 본 것 같습니다. 그 때만 하여도 남쪽 지방에서는 우럭과 키조개 등은 먹어 보지 못할 때였습니다.
김제로 가는 길도 무척 기분 좋은 드라이브 코스였습니다. 김제의 변전소 구내에는 여러 종류의 감나무가 있어 가을이 저물면 내가 머물고 있는 사택에는 홍시가 되어 가는 감들이 나의 입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김제를 지나서 금산사 쪽으로도 가끔 가곤 하였습니다. 금산사 부근을 지나는 높고 큰 송전철탑과 그곳에 매달린 송전선로도 순시 대상이었습니다.
금산사 입구에 있는 호수 가의 향어횟집에서 먹어 본 향어의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끔은 순시 후 귀로엔 전주에 들러 저녁을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전주 비빔밥도 맛있었지만 복어 매운탕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곳의 복어 매운탕은 모두 그렇게 먹는지 미나리를 한 양푼 넘게 가져와 계속 미나리를 넣어 먹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먹는 얘기를 하다 보니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이리 시장이 이른 아침에 주최하는 이화회란 기관장 모임과 민방위 훈련 등에도 아침 일찍 참석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면 가끔은 해장국이란 것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경상도 지방의 해장국과는 그 맛이 달랐습니다. 요즘은 부산에서도 콩나물 해장국이라 하여 그곳에서 먹던 해장국을 얼마든지 맛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처음 맛보는 특별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먹어 보는, 해장국에 빼 놓을 수 없다는 모주가 문제였습니다. 사발에 담긴 모주도 술이라 생각되어 벌컥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사발에 든 것은 뜨겁게 데워진 모주였습니다. 주위 분위기가 뱉을 수도 없는 형편이라 꿀떡 삼켰는데 목을 넘어 가는 동안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모주를 데워먹는 이곳의 습관을 모른 게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 시골에서 겨울에 먹던 삶은 물고구마를 허기진 마음에 뜨거운 줄도 모르고 서둘러 삼켰다가 눈물을 글썽였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죽순주라는 것입니다. 우후죽순이란 말과 같이 대나무는 빨리 자라서 가끔은 송전선로에 닿아 정전사고를 일으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로순시를 하면서 잘라온 죽순을 한동안 술병에 담가두면 죽순 안에 술이 스며들게 됩니다. 술에 담가두었던 이 죽순을 잘라서 그 속에 스며든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 술이 죽순주입니다.
익산은 화강석이 많이 나오는 곳이어서 자투리 돌로 만든 선물로 받은 빨래판은 아직도 우리집 세탁기 옆 자리를 차지하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주곤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회상에 잠기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