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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몰타가 성립되기까지에 기사단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기사가 무엇인지를 참고로 올린다.
기사(Order, knights)
고대 전투의 주력은 보병이었으나 로마 시대에는 정찰과 추적을 하는 소수의 기병의 임무는 말을 소유한 시민이 맡았으며, BC 2세기 이후 그들의 신분은 원로원의원 다음가는 국가의 제2 신분 계급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인도에서 발명되었다는 등자(鐙子)가 중국을 거쳐 뒤늦게 8세기에 유럽에 전해지자 기동력이 증대된 기병전이 전투의 결정적인 형태가 되었지만, 갑옷과 무구(武具)의 중 무장화로 기병의 유지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어, 8∼9세기에 기병 1명의 가치가 소 20마리와 맞먹었다.
기사(Knight)란 원래는 시종 드는 하인을 의미했으나 훗날 기병전의 전투원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했다. 중세에 기사는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첫째는 9~10세기에 군주나 영주와의 계약으로 영지를 하사받은 지방의 소 영주로, 그들은 농노들이 농사를 짓는 일을 감독하면서 무술 연마와 사냥 등으로 소일하다가 군주나 영주의 명에 따라 소집되어 전쟁에 참가하는 의무를 지녔다. 둘째는 왕의 궁정이나 귀족의 성에 거주하는 호위 기사를 의미하나, 당시의 군주들은 상설 호위기사단보다 실력 있는 용병을 장기 고용하는 경제적인 쪽을 선호했다 한다. 이런 기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귀부인의 시중을 들며 예의범절을 배우고, 이어 전투에 참가하여 무술을 익힌 다음, 능력이 인정되면 영주나 유명한 기사에 의하여 기사로 서임(敍任)되었다.
서임식에서 칼등으로 후보자 어깨를 세 번 치면서 ‘그대는 기사다’라고 선언하면, 그들은 기사선서를 하고 기사로 공인받는다. 기본적으로 수도회(Religious order)인 기사 수도회는 기사단을 뜻하는 말인 order로도 지칭되지만, 기사로 구성된 집단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knights로 통칭된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이런 종교기사단을 모델 삼아 중세 중후반에서 르네상스 초엽에 왕립 기사단을 창설했지만, 귀족들끼리 만든 친목회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 몇 십 명 이내였으며, 중세 말기에는 기사수도회 대부분이 차츰 귀족들의 명예 단체로 변하게 되었다.
기사단의 임무는 십자군 국가 방어와 성지순례자들의 안전 수호였으며, 책임자는 유럽의 명문가 출신 기사단장으로, 단원은 단장의 명령에 복종을 의무로 하며, 금욕, 청빈과 복종 등을 서약하여 위계질서를 준수했다. 무슬림과 싸우는 군대가 된 기사단은 곳곳에 전략적인 요새들을 장악했고 전장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했다. 전투에 참가하는 숫자는 300여 명 안짝이지만 그들의 활약은 십자군국가의 방위에서 결정적이었다.
무슬림의 예루살렘 정복이 출발점이 된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장기적인 군대의 주둔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원래 기사는 봉건영주라 자신의 영지를 비울 수가 없어,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운 수도자들을 무장시켜 군사적 목적으로 대체 하자.'는 발상으로, 성전기사단, 구호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 등 많은 기사 수도회들이 조직되어 일반적인 수도회와 달리 무슬림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왕국을 수호할 군사적 임무와 수도자의 의무를 함께 서약했다.
일부 기사단들은 특정한 군주와 주종(主從) 관계에 속했고, 다른 기사단들은 여러 기독교 국가에서 인원, 자금과 물적 자원을 받은 성 요한 기사단처럼 다양한 지원을 받으며 세를 키워, 일부 독립적 기사단들은 자신들이 직접 국가를 세우기도 하여, 튜튼 기사단(Teutonic Knights)은 무슬림이 지배하는 중동에서 프로이센 국가를 세웠고, 성 요한 기사단도 로도스 섬을 거쳐 몰타에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각자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성 요한 기사단(몰타 기사단, Knight Hospitaller)
성 요한 기사단은 600년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순례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아말피 병원이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에 의해 파괴되자,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병원을 재건하여 성지순례자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한 수도회의 명칭이다. 이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은 명예였지만, 그 대가로 기사단 재적 중에 이유 없이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창설 초기에는 신앙심만으로 참여하는 귀족들이 많았으나 후대로 갈수록 상속재산이 없는 차남, 삼남 등, 갈 곳 없는 귀족 자제들이 참여하였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후, 수사인 제라르가 성지에 이르는 도상의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숙박소를 지었다. 이들이 병원기사단이라 불린 것은 최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과 숙박 시설을 운영했기 때문이며, 상처를 치료받은 십자군기사들은 이 병원에 재산의 일부를 기부했고, 성지에 남은 십자군기사는 구호기사단의 단원이 되어 이 기사단을 부강하게 발전시켰는데, 이들이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슬람교도와 전쟁을 수행하면서 성지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발전하여, 십자군 국가 방위의 주력이 되어 2개의 큰 요새와 140의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1119년 프랑스의 샹파뉴 귀족, 위그는 성지순례자 보호를 명분으로 예루살렘에서 기사 집단인 종교단체를 창립하자, 예루살렘의 왕 볼드윈 2세는 정착 거점을 제공했다. 1139년 이들을 공식 교단으로 인정한 교황 이노 켄티우스 2세가 이 단체를 신전 기사단이라 명하자, 12세기 중엽 성 요한병원도 신전기사단의 역할과 기능을 받아들여 성 요한 기사단(Hospitalers)으로 전환하였다. 1187년 예루살렘 함락 후에도 이들은 기지인 아코를 사수하고 있었지만, 1291년 아코가 무슬림에 함락되자, 다른 가톨릭 템플 기사단은 유럽으로 후퇴했지만, 성지 회복을 믿은 성 요한 기사단은 성지 근처에 남아 해적이 되어 이슬람과 싸우다가 1309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 섬을 빼앗아 본거지로 삼았다.
이후, 로도스 기사단이라고 불렸으나, 오스만제국이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길목에 있는 로도스 섬을 공격하자, 기사단은 오스만군의 100분의 1 병력으로 맞서 1차 전쟁은 승리했지만 1522년 오스만제국의 재공격에 6개월간 공성전으로 버텼다. 외성이 무너져 내성에서 버티던 요한기사단은 오스만이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섬에 남게 될 주민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제안을 수용하여 성문을 열었고, 1523년 1월 1일, 살아남은 기사단과 수천 명의 민간인들은 마지막 행진을 벌이며 오스만이 제공한 50척의 배를 타고 로도스 섬에서 명예롭게 베네치아 령 크레타 섬으로 떠났다.
이후부터 성 요한 기사단은 서유럽을 떠돌다가, 1530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대신 소탕하게 할 목적으로 기사단에게 몰타를 근거지를 마련해 주자, 몰타로 이주하여 몰타 기사단으로 불리며, 1563년에는 700명의 기사와 8000명 보병만으로 오스만제국의 4만 대군을 궤멸시키자, 이에 몰타의 소유권을 보유한 스페인의 찰스 5세 황제로부터 몰타를 하사받아 통치를 시작하면서 지중해의 강자가 되어 주권국가로 세력이 절정에 달해 오스만의 맹렬한 공격을 막으며, 해군력을 증강하고 진보된 방법으로 기사단을 운영했다.
엄격한 규율에 청빈과 정결을 지켰지만, 군사 활동으로 전리품과 부가 쌓이자 규율은 무너지고, 단원들 간의 결속도 약해졌던 몰타 기사단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네덜란드와 북독일의 부유한 지부장들이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구호기사단은 약화되었고,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레옹이 몰타 기사단에게 항구와 보급을 제공하라며 위협하자, 몰타기사단은 ‘같은 그리스도인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정한 기사단의 규율’ 때문에 기사단장, 페르디난트 폰 홈페쉬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그들은 유럽을 떠돌면서 유럽 각국에 의탁하였으나, 19세기 초부터 몰타기사단은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다가 1834년 로마에 정착하면서부터 과거의 군사 단체가 아닌 구호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의 NGO로 탈바꿈하여, 회원 1만 3,000여 명, 직원과 자원봉사자 10만여 명으로 원래 업무인 의료 봉사 단체로 회귀하여 인도적·종교적 조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단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을 갖고 있고, 우편 협정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나라들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발행함으로써 영토 없는 국가로 불리며, 100여 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구호 기사단 본부를 치외 법권 지역으로 인정해준다. 몰타기사단장으로 임명된 인물은 당연직으로 추기경에 임명되며 평생 단장직을 유지했다.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이자, 성지탈환을 호소한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에 감동받은 십자군이 1097년에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4천명의 기사들 중에 겨우 1천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여 ‘솔로몬 성전은 살육의 피가 무릎까지 잠겼다.’는, 두 종교의 증오가 낳은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지를 비롯하여 몇 군데의 요새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성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할 때에 무슬림의 습격을 자주 받았다.
이에 성지순례자 보호를 위해 1120년경 위그드 파앵과 그의 동료 8명이 정식 명칭이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인 기사단을 창설하자, 이를 반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는 솔로몬의 신전 옆에 템플 기사단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이후부터 템플 기사단(성전기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앙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져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여 전투에서 도망치지도 않았으며 ‘전투 중에 죽는 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여긴 이 기사단은 붉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 옷을 입었고, 주요 전술은 상대방 진영을 향한 기병 돌격이었다고 하며, 수많은 전투에서의 승리로 그들은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청빈 맹세를 한 템플 기사단은 스스로 ‘예수의 가난한 기사들’임을 자처했지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이 된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보물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단원으로 가입한 많은 부유한 귀족들의 기부와 성지 순례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급속하게 부유해졌고, 인원도 늘어나면서 세가 확장됐다. 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그들을 교황 직속 조직으로 만들어, 템플 기사단의 재산은 해당 지역 주교의 지배를 받지 않는 특권까지 부여받아 국가의 법, 규율, 세금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각국의 왕과 귀족들로부터 기부 받은 재물 이외에 성지와 유럽을 연결하는 효율적인 운반조직으로 은행 역할까지 하면서 1200년대 말에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각국에 지부를 두게 된 템플기사단은 용맹함과 공적으로 같은 종교기사단 내에서도 단연 돋보여, 이슬람이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두려워한 전투 집단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2만이 넘는 조직원을 가져 맹위를 떨쳤으며 단장 아래로 기사, 병사, 사제와 장인으로 구성되어 적십자를 수놓은 흰 망토를 입었다.
그러나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근거지 아코가 이슬람에 점령당한 후부터 기사단들의 존재의미가 희박해지자, 튜튼기사단과 성 토마스기사단은 각기 독일과 영국으로 돌아가 자연 소멸되었으나, 성지회복을 염원하여 로도스 섬을 점령한 성 요한기사단은 해적으로 변신해 이교도와의 싸움에 전념하며 이후로도 수백 년 간 더 존속했지만, 일단 프랑스로 돌아간 템플기사단은 프랑스 왕을 설득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재위 동안 빈번한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된 필리프 4세가 국민과 성직자들에게 가혹한 세금 부과하자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템플기사단의 본부로 피신한 필리프 4세는 이 때 템플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에 템플 기사단의 재산을 탐한 필리프 4세는, 1307년 10월에 신을 거역한 죄를 발견했다며 프랑스 전역에서 수백 명의 템플 기사단원을 체포하여 이단재판소에 넘기고, 프랑스 내에 소유한 템플기사단의 모든 재산을 프랑스 왕가의 소유로 몰수하였다. 이어 1309년 당시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을 프로방스 지방의 아비뇽으로 옮긴 후 사실상 교황권을 지배하는 아비뇽 유수를 단행하여 프랑스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아비뇽에 가두고 감시하면서 프랑스 교회가 모은 십일조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아비뇽에 유폐되어 필리프 4세의 포로나 다름없었던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도 ‘템플기사단은 이단’이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대부분이 프랑스인인 템플기사단원들을 ‘악마의 무리’로 둔갑시키자, 필리프 4세는 1314년에 마지막 단장인 자크 드 몰레를 화형 시켰다. 몰레는 화형 직전에 ‘필리프 4세와 클레멘스 5세가 올해 안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고 그의 예언대로, 클레멘스 5세는 만성질환으로 인해 사망하고 8개월 후에는 필리프 4세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며칠 후에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에 템플기사단 기사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지고 다른 기사단에 입단을 한다. 특히 당시 스코틀랜드는 왕위 후보자였던 로버트 더 브루스가 교회 내에서 암살을 한 죄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많은 템플기사단이 브루스의 편에 서서 영국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고 왕위에 오른 브루스는 일시적으로 템플기사단의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브루스가 교황의 파문에서 풀려난 이후 템플기사단은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템플기사단은 비공개 의식 등으로 갖가지 추측에 휩싸였는데, 예루살렘의 솔로몬신전 터에 본거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시온수도회, 프리메이슨과 더불어 성배를 지키는 결사체였다는 추측도 난무했으며, 지금도 세계정부를 조종하며 세계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가설도 상존한다. 그리나 템플기사단이 정말 악마를 숭배했다는 것은 필리프 4세가 템플기사단을 고문하여 억지로 자백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템플기사단에는 엄격한 계율이 있었고 비밀의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던 모양이다.
1946년 말부터 사해 부근의 쿰란 동굴에서 계속 발견되는 사해문서(死海文書) 중 ‘구리 두루마리의 보물지도’에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하기 전에 성전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는 곳이 적혀 있었고, 고고학자가 그 보물지도가 표시한 지점을 수색하였을 때, 이미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하였는데 그 흔적을 템플기사단의 것으로 보고 유추되면서, 템플기사단은 이 비밀이 밝혀지면 중세의 모든 신앙과 권력 구조가 뿌리 체 흔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등장했다.
튜튼 기사단(Teutonic Order)
1190년경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서 독일의 한 자선 단체로서 창립된 튜튼기사단은 1198년부터 군사적 성격이 가미되면서 1211년에는 활동무대를 동유럽으로 옮겨 헝가리 왕을 도와, 침입한 쿠만족과 싸웠다. 그 뒤 마조비아로부터 ‘프로이센을 정복해 개종 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은 기사단은 비수아강 북으로 이동해 토른에 거점을 마련했고, 1233년에는 중부 독일에서 자원해온 평신도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 정복을 개시했다.
그 뒤 50년간에 걸쳐 비수아 강 하류에서 네만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대부분의 프로이센 토착민들을 몰살한 튜튼기사단은 프로이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사단은 정복지의 1/3에 달하는 지역을 교회에 헌납하고 그곳에 생겨난 도시에는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도 프로이센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여 여러 채의 성을 쌓아 기사들의 거주지와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기사단의 봉신이 된 독일과 폴란드의 귀족들에게는 봉토를 충분히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이 농민들을 불러 모아 인구가 격감한 지역에 정착시키도록 했다.
1263년에는 청빈 서약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인 경제활동이 묶여있던 기사들에게 교황이 무역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한 뒤부터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의 곡물 무역을 독점했으며, 1309년 기사단장이 마리엔 부르크를 항구적인 거처로 선포했을 때 이미 튜튼기사단은 강력한 봉건국가를 세워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발트해 연안 국가와, 단치히를 포함한 동 포메른과 독일의 중남부지역도 지배했다.
튜튼기사단은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에 가입한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을 벌였으며, 1398년에는 리투아니아의 영토 사모기티아를 점령하는 등 계속 위세를 떨쳤지만, 발트 해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폴란드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기사단으로부터 영토에 대한 위협을 계속 받고 있던 리투아니아는 기사단의 세력 확장에 적의를 품어, 1408년에 그들은 힘을 합쳐 기사단에 반란을 일으켜, 그룬발트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토루인 조약을 맺어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와 도브리진 지방을 포기하면서부터 기사단의 권위와 재정 형편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폴란드와의 계속된 전쟁에서 봉신들마저 폴란드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사단은 결국 굴복했다.
1466년 기사단은 제2차 토루인 조약을 맺고 포메른과 비수아강 양안과 바르미아의 주교관할구를 폴란드에 넘겨준 후에도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보유했으나, 그 지역 기사단장의 지위는 이미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격하되어, 공식적으로 독일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기사단에 폴란드인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525년, 기사단장이 개신교 루터파로 개종하면서 도이치 기사단의 군사 국가를 세속적인 공국으로 포고하자, 튜튼 기사단은 군사조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고, 기사단은 명예로운 신분 집단으로 남았지만, 독일 중남부에 흩어져 있던 기사단 관리지역마저 1809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어 다른 공국들이 나누어 가져가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1834년 빈에서 튜튼 기사단을 교회의 명예단체로 다시 창설되어, 1929년 무력이 배제된 봉사단체로 변모하여 현재는 독일 기사단(Deutsche Order)이라는 명칭으로 빈을 근거지로 가톨릭 봉사단체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