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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국내 해외 여행 등반 레저 스크랩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꼬끼오(성기효32회) 추천 0 조회 97 11.06.22 20:5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위치
Location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292
292 Dabu-ri, Gasan-myeon, Chilgok-gun, Gyeongbuk

전화번호
Tel

054-973-6313 FAX) 054-972-5625

준공
Time of completion

기념관 - 1981년 11월 30일
A memorial building 30th November 1981
충혼비, 구국관 - 1995년 6월 24일
A monument for the loyal dead,
A building for national salvation 24th June 1995

기념관
A memorial building

1동 247.5㎡
1 building 247.5㎡

전적비
A memorial describing war records

1기 높이 24m
monument whose height is 24m

전시품
Exhibition

비행기, 탱크 등 106종 172점
Aircrafts and tanks with 172 other things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기습남침을 자행하였다. 단번에 부산을 점령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겠다는 망상아래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밀어닥친 것이다. 아무런 대비책없이 불의에 허를 찔린 한국군은 남침개시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는 통분을 안고 때마침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과 더울어 지연전을 벌이면서 남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7월말 낙동강에 이르러 "여기서 이길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된 한국군과 유엔군은 비장한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700리 강물을 피로 물들이는 혈전이 55일 동안 계속되었다. 8월의 염천 아래 북한군은 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거듭하였거나 아군은 끝내 불퇴전의 투혼으로 그 기세를 꺽고 총 반격의 발판을 굳히게 되었다

이 곳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6.25의 참극으로 인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한.미연합군이 피로써 막아낸 다부동 혈전의 전장이다.

 

 

1950년 8월초 북한군은 제3, 13, 15사단 등 5개 사단 병력을 왜관, 다부동 전선에 집중 투입, 8.15까지 대구를 침공 할 기세로 발악적인 총 공세를 가해 왔다.

이때 국군 제1사단과 제8사단이 주축이 되어 미 제1기병사단 장병들과 함께 싸워 밀고 밀리기를 수 십 차례, 아군은 최후의 일각까지 고귀한 생명을 바쳐 처절한 혈투끝에 적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그 후에도 북한군은 9월초에 또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최후의 공세를 재개 했으나, 아군은 우세한 화력과 과감한 반격으로 9월 중순경에 적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여 끝내 대구-다부동선을 고수, 반격의 보루를 확보하였다. 이 혈전에서 아군은 적 전차 13대 파괴, 적 사상 17,500여명의 대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10,000여명의 인적 손실을 입었다.

경찰 또한 낙동강 방어전투에 15,000여명이 참전하여 그 중 전사자 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이 고귀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나라를 구한 “경찰의 대구사수정신”은 6.25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 곳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그때 그 현장의 교훈을 알리는 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하기 위해 1981년 11월 30일 국방부에서 건립하여 본 군이 관리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경찰은 건국·구국·호국·민주 경찰로서 역사의 구비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해 왔다.

특히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그해 8월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낙동강 전선에 모든 전투력을 증강하여 총 공격이 시작되면서 대구 중심가에 포탄이 떨어지고 영천이 무너지는 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자 정부를 비롯한 국방부는 물론 미8군사령부까지 부산으로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경찰도 철수하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당시 경찰 총수인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대구를 적에게 내주는 것은 나라를 내주는 것과 같다.” “우리 경찰만이라도 반드시 대구를 사수하여야 한다.” 는 필사의 굳은 결의로 공포에 사로잡힌 70만 대구시민을 보호하고 군과 더불어 구국 불퇴의 결사항전으로 대구방어에 큰 몫을 다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 발판을 만들어 전쟁 국면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여 구국경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경찰은 대구를 지키기 위한 낙동강 방어 전투에서 15,000여명이 참전하여 전시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많은 경찰이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산화하여 숭고한 구국의 경찰 대구사수 정신이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식처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매우 안타깝게 여기어 오던중 경북도경을 방문한 이무영 경찰청장께서 전용찬 경북청장이 발의한 구국경찰충혼비 건립 계획을 보고 받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심으로써 구국경찰의 뿌리인 이곳 다부동 6.25격전지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구국경찰충혼비」로 이름한 비를 건립하여 조국을 위해 몸바치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참전경찰관들의 이름을 새겨 작은 소망이나마 이루도록 하였으며 구국정신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산교육의 터전과 참배 장소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 경찰의 뜻을 모아 구국경찰 충혼비를 세우게 되었다.

2001. 6. 25

구국경찰충혼비 건립 추진위원 일동

 

 

 

 

 

 

 

 

 

 

 

 

이곳 다부동은 6.25전쟁당시 최대의 격전지로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 학도병 민간인 모두가
구국일념으로 함께싸워 적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이제 6.25전쟁 45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조국을
구하려고 싸우다 산화한 수많은 구국용사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여기 양지바른 곳에 봉안하고
충혼비를 세워 님들의 넋을 기리고자 한다.

1995. 6. 24
건립 / 칠곡군
후원 / 다부동전투전우회, 육군 제50사단, KBS대구방송총국

 

 

 

이곳은 6.25 自由守護戰爭 當時 最後의 堡壘인 多富洞戰鬪의 戰勝을 紀念하여 西紀 1981年에 戰跡紀念館을 建立하였으나
戰爭의 砲煙이 사라진지 40年이 넘도록 수 많은 救國英靈들이 安息處를 찾지 못하고 九泉을 헤메고 있어,

多富洞戰鬪救國勇士會 主管으로 陸軍 第50師團의 支援下에 1994年부터 3年간에 걸쳐서 當時의 激戰地를 搜索하여 救國勇士 遺骨 259점을 양지바른 이곳에 安葬하고,

1995年 5月 30日 慶尙北道와 漆谷郡의 支援을 받아 救國勇士忠魂碑 및 救國館을 세워 祖國에 몸 바친 옛 戰友의 넋을 기리며 護國精神을 일깨우는 산 敎育場으로 가꾸었으니 救國의 英靈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西紀 1997年 6月 24日
多富洞戰鬪救國勇士會

추진 위원회
顧 問 : 白善燁, 崔榮喜, 金東斌, 朴基丙, 金點坤
委員長 : 金明中
委 員 : 洪正杓, 金鍾杓, 黃大亨, 李箕衡, 金衡弼,
金聖根, 安奉根, 金福出, 趙判壽, 朴湘根,
黃權柱, 郭秉煥, 金弼燮
建 立 : 1997年 6月 24日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국군아저씨들도 참배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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