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카자흐스탄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 중에는 "별로였다" 는 응답이 가끔 나옵니다. 고국을 떠나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낮선 현지인을 만나고 돌아 올 거라는 예상이 무너졌기 때문이죠. 동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푸른 열대 밀림이나 이국적인 풍광과는 거리가 먼, 먼지 날리고 햇볕 강한 메마른 땅인데다...인종적으로도 우리 나라 사람들과 크게 차이 없어 보이는 데다. 도시 역시 한국과 별 차이 없는 건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생활 방식이나 사고 방식도 우리와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이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이 땅을 향한 특별한 부르심을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고려인' 의 존재입니다. 이 고려인들로 인해 초기에 한국 선교사들이 이 땅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고 교회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온 동포 선교사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그들을 돕기 위해 교회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왕성하게 교회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인 인걸 보면 보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빚어진 강제 이주된 민족의 비극 아래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월요일 아침, 우리팀은 크질오르다 중심부의 한 건물을 찾아 갔습니다. 이곳에는 사회,문화 단체 사무실이 여럿 들어와 있고 '고려인 협회' 사무실도 역시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사전에 연락을 하고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22명이나 되는 팀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국말로 적힌 게시물과 고려일보 등이 이곳이 고려인 협회 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연세 높으신 할아버지들과 고려인 협회장이 우릴 맞아 주었습니다.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고 크질오르다 고려인 현황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1937년 연해주 지역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중앙 아시아로 향하는 열차에 태워져 이곳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졌을 때, 우스토베 등과 함께 바로 이곳 크질오르다에도 많은 수의 동포들이 버려졌다 합니다. 크질오르다에 도착했을 때는 10-11월이었습니다. 8백 가정이 최초로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는데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피하려고, 카자흐인들의 가옥인 유루타를 세운 뒤 안에 땅을 파고 들어가 잤다고 합니다. 38-39년에 중앙 정부의 지원이 있은 뒤 4천-5천의 고려인 가족이 크질오르다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 대학, 고려인 극장이 이곳 크질오르다에 세워졌고 38년에 한국어 말로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나중에는 러시아 말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30년대 말에는 이 곳에 고려인 콜호스(집단 농장)가 형성되었으며 고려인 사범대학도 세워졌습니다. 이 사범대학이 지금도 크질오르다에서 가장 큰 '크질오르다 종합대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주 1세대에는 계봉우, 홍범도 등이 있었고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쟁 영웅으로 추대된 '민 알렉산드르' 도 있었다 합니다. (세계 대전 당시 소수 민족들은 참전 자체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역사 속에서 전쟁 영웅으로 추대된 고려인이 크질오르다 출신임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팀은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후예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착잡한 맘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지금 이곳에서 고려인으로 살고 있는 거니까요. 우리와 똑같은 한국인인데... 왼쪽 할아버지도 이주 1세대로 계봉우 선생의 차남입니다. 계봉우 선생은 문인이자 작가, 역사가 로 '조선 문학사' '꿈 속의 꿈' 이라는 작품을 자필로 남겼고 2000년 한국의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등에 의해 자료집이 편찬되었습니다. 이 책이 크질오르다 협회에서 본 계봉우 선생의 자료집입니다. 고려인으로 이곳 중앙 아시아에 살면서 한국어로 기록한 '조선 문학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고려인 할아버지들의 눈물 겨운 증언을 듣고 난 뒤 누군가 "질문이 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때 우리 팀원들은 많이 질문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원망스럽지 않느냐?", " 한국에선 지금 어떻게 할아버지들을 도와 주고 있느냐?",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으냐?" 주로 이런 내용이었죠.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카자흐스탄이 고향이며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광복절마다 한국 정부 기관에서 이곳에 있는 홍범도 장군묘를 방문한다면서 잊지 않고 찾아 줘서 고맙다고까지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뵙기에 우리가 더 죄송스러웠죠. 한국에서 가져 간 기념품을 협회장에게 전달하고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선교사님의 제안으로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사는 할아버지들과 한국의 꼬마들은 한 핏줄이기에 이렇게 함께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고려인 협회장, 선교사님과 함께 기념 촬영한 뒤...크질오르다 서쪽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벌써 우릴 안내하려고 묘역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크질오르다 라는 도시는 작은 도시입니다. 인구가 18만 정도니까요. 홍범도 장군 묘역까지는 멀지 않았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버스는 우리 팀이 이동할 때 자주 탔던 버스인데.. 현지인의 도움으로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한 묘지 입구에는 사진처럼 '통일문' 이라고 적힌 문이 보입니다.
사실 이곳은 공동 묘지입니다. 한 쪽에 홍범도, 계봉우 장군 묘가 모여 있고 그 묘역을 방문한 것이죠.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지만 크질오르다에 왔을 때는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가족 없이 쓸쓸히 이곳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 모역은 1982년, 이곳으로 옮겨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묘 앞에서 헌화하고...기도했습니다. 조국에서 7천 km 이상 떨어진 이 메마른 땅에서 죽어간 한민족들... 우리의 쓰라린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 황폐한 땅으로 부르신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복음의 통로를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크질오르다의 예배 공동체 '소망 교회'도 대부분 고려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묘 주변에는 각종 기념비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에 설치한 비석도 보이고 우측의 비석은 1937년의 강제 이주를 회상하며 "다시는 반복되어져는 안된다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작년 2007년에는 강제 이주 70주년 기념행사도 열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묘역에 대해 설명해 준 고려인은 1982년 당시, 주변에서 현재의 위치로 홍범도 장군 묘역을 옮겨 조성할 때부터 일했던 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 묘역을 조성할 때의 뒷 얘기와 이 곳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들려 주었습니다. 광복 50주년이 지난 1996년에는 묘역을 보수, 확장하고 홍범도 장군 관련 연보도 발행했다 합니다. 지금도 매년 한국 정부의 보훈처에서 공식적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분에게서 사인도 받았지요. 정성스럽게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 주는 모습입니다. 이곳은 문인이자 역사가인 계봉우 선생 묘입니다.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이 분의 차남이구요. 형민이는 카자흐스탄 남부 내륙 크질오르다에서 만난 이 묘비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요? 수첩을 꺼내 묘비에 적인 글자를 그대로 받아 쓰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왼쪽이 홍범도 장군, 오른쪽이 계봉우 선생 흉상입니다. 크질오르다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교과서에서 알게 된 홍범도 장군의 묘... 우리가 카자흐스탄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낯선 땅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기도하며 살아가는 특별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