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Lynn Hill)는 스무 살 동갑내기로 결혼한 양친 사이에서 1961년 4남 3녀의 다섯 번째 자식으로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나의 할아버지 프랭크는 이탈리아 혈통의 변호사였고, 할머니 루스는 미국 석탄광산의 딸로 방랑벽이 심해 전 세계의 각처를 누비다시피 여행했다. 내가 나중에 클라이머가 된 후 세계 도처에 산재한 유명 암장의 방랑길에 오른 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다.
나의 등반 기술은 천부적이었다. 어린 시절 ‘정글 짐(jungle gym, 철골구조 놀이시설)’과 전봇대를 마구 오르내리며 놀았다. 13세 때 요세미티계곡으로 간 가족 드라이브에서 대리석 절벽 엘캐피탄(이하 엘캡)과 반원형의 하프돔(Half Dome)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언니 캐디(Kathy)의 남자친구 척(Chuck Bludworth)은 암벽 등반학교를 졸업한 클라이머여서 요세미티의 암벽 등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어린 시절 YMCA 체조프로그램에 참가해 공중제비 등 곡예기술을 익혔다. 1975년 14세 때 서니고교에 입학, 그해 여름 언니의 약혼자 척, 언니 캐디, 오빠 봅, 둘째 언니 트리시와 차를 타고 빅록이라는 암장으로 향했다. 높이 90m의 화강암 슬랩이었다. 트리시와 나 두 사람은 암벽 등반 경험이 전혀 없었다.
척과 봅의 자일 팀은 옆쪽의 난코스를 등반했고, 트리시와 나는 등반 경험이 약간 있는 캐디 언니의 지도하에 난이도 5.4 루트를 등반했다. 등반 무경험자들에게는 신비스러운 반면 호된 시련이었다. 확보자 캐디의 지시에 따라 트리시 언니가 먼저 첫 번째 볼트까지 기어오른 다음, 카라비너를 볼트에 클립하고 자일을 통과시킨 후, 두 번째 볼트를 향해 올라갔다.
미국 애리조나 그린 리퍼(5.12b) 자유등반.
트리시의 발은 암벽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손은 엉뚱한 바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9m 위쪽에서 방향이 좌측으로 벗어나 있었다. 두 다리가 맹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 번째 볼트에 카라비너를 어렵사리 연결하고, 자일을 통과시켰다. 그후 캐디가 그녀를 자일 하강시켰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발을 바위에 마찰시켜.”
캐디가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고도감을 잊으려고 위쪽을 쳐다보고 등반, 볼트에 카라비너와 자일을 계속 연결시켰다. 더 멀리 오를수록 나의 근육이 쑤셔댔다. 드디어 마지막 앵커에 도달한 후 무사히 자일 하강했다. 절벽 밑에서 한 여인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보았다.
“첫 번째 암벽 등반이냐?”
그녀가 나에게 다정하게 질문했다. 유명한 여성 클라이머 마리아 크래너였다. 나는 그날 암벽 등반에 매혹되어,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다.
키르기스스탄의 러시안 타워 자유등반.
일주일 후 나와 척은 조수아트리(Joshua Tree)라고 알려진 모하브사막(Mojave Desert)의 한 암장을 등반했다. 그때 척은 트레스패서라는 최대 난코스를 등반하다가 추락해 8m 위쪽 자일에 걸렸다. 그가 나에게 갑자기 질문했다.
“선등을 교대할 의향이 있어?”
높이 24m, 난이도 5.10+루트에는 볼트가 3개만 박혀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대로, 오기가 발동해 “내가 한 번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척이 수직으로 추락한 지점에 도달했다. 화강암 슬랩에는 확실한 홀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포도씨 크기의 과립상 결정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발레리나처럼 발가락 끝을 암벽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결정체들을 힘껏 휘감아 잡으며 우아하고 부드럽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트래버스를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시간 개념, 중력, 생존에 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직 나의 호흡 소리만 허공에서 크게 들렸다.
팔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확보용 볼트가 나타났다. 그런데 팔다리를 벌린 채 암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어깨띠에 매달린 카라비너를 잡기 위해 한쪽 팔을 떼면 내 몸이 암벽에서 추락할 성싶었다. 만일 내가 그 볼트를 손으로 잡는다면, 프리스타일 클라이밍 방식의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프리 등반 루트에서 볼트는 확보용이지 등반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간힘을 다해 볼트 옆에 도달해 카라비너를 통과시킨 다음 돔의 정상에 도달해 앵커를 설치하고 척을 자일로 끌어 올렸다. 그가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멋진 등반이야.”
척은 라인홀트 메스너와 발터 보나티의 저서를 탐독하며, 여느 클라이머들과는 달리 등반을 위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공포심과 탈진을 실험하는 일종의 정신적 훈련 여행으로 간주했다. 암벽 등반의 풋내기인 나는 뜻하지 않게, 졸지에 언니의 약혼자한테 암벽등반의 용기와 열정을 배워, 남성 클라이머들도 아직 돌파하지 못한 조수아트리의 난코스 트레스패서를 초등하는 영광을 거머쥐게 되었다.
1976년 척과 나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의 템플 크랙(Temple Crag)의 난이도 5.9 루트 10피치를 등반했다. 이 루트를 등정한 후 한쪽 빙벽과 다른 쪽 젖은 암벽 위로 두 다리를 벌리며 추락의 공포를 견디며 하산했다. 나는 척한테서 볼더링(bouldering, 큰 바위 오르기)을 배웠다. 암벽에서의 자유등반 기술을 익히기 위해 볼더링을 통해 곡예등반법을 익히는 것이 필수였다. 나는 캐디 언니한테서 암벽등반에서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 가느다란 바위틈에 끼워 넣는 등반장비, 즉 ‘스토퍼(stoppers, 쐐기확보물)’와 헥센트릭(hexentrics, 육각의 알루미늄 관) 사용법도 익혔다.
아버지에게 새 걸프렌드가 생겨 그해 말 양친이 이혼하면서 우리 가정은 파탄 났다. 나는 암벽 등반에 전념하며 정신적 고통을 극복했다.
1 반달(5.13a) 자유등반. 2 군크스의 암벽에서 올린 결혼식.
유명 클라이머 존 롱이 고난도 등반 동참 제안
척과 오빠 봅 그리고 나는 유명한 클라이머 존 바차(John Bachar)가 조수아트리의 난이도 5.11의 난코스, ‘레프트 스키 트랙(Left Ski Track)’을 자일 없이 프리클라이밍으로 단독 등정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경탄했다.
척이 등정에 실패한 조수아트리의 난코스 ‘시비지비(CBGB's)’를 등반할 때, 몇몇 클라이머들이 나의 등반 동작을 지켜보았다. 나는 단신이고 체조에서 익힌 유연성을 발휘하며 가슴 높이의 바위 선반을 쉽게 올랐다. 다음으로 좁은 크랙에 손가락 끝을 구부려 재밍하며, 높이 15m의 바위 날개를 올랐다. 더 높이 오를수록 내 몸이 뒤쪽으로 나자빠져 추락할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다.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내 몸의 동작에 박차를 가했다.
돔의 막바지에서 내가 얕게 움푹 파인 암벽 속에 한쪽 발을 높이 올려놓고 체중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9m나 추락해 자일과 연결된 안전벨트에 매달렸다.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나를 지켜보던 유명 클라이머 존 롱(John Long)이 난코스인 ‘이쿼낙스(Equinox)’를 함께 등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악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클라이머로, 짐 브리드웰, 빌리 웨스트베이와 엘캡의 900m 길이 노즈(Nose) 루트를 15시간 만에 최초로 마라톤 등반(속도 등반)해 낸 사람이었다. 내가 그들과 그 루트를 등정한 후 그는 나에게 ‘꼬마 헤르쿨레스(Little Hercules)’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고등학교 지리교사였던 척은 언니와 8년간 연애 끝에 1977년 결혼했다. 그러나 척이 교직을 사임하고 등반에 몰두하면서 언니와 사이가 나빠져 1979년 이혼했다. 척은 1980년 1월 남미의 최고봉 아콩카구아 등반대에 참가해 높이 3,000m의 남벽 6,706m 지점에서 동료 거이와 함께 동사했다.
나는 조수아 트리에서 바차와 존 롱과 함께 등반하며 프리 스타일 등반 기술을 익혔고, 요세미티에서 ‘암벽 등반의 왕’ 짐 브리드웰에게서 프리 스타일 등반 기술을 전수했다.
나는 16세 때 요세미티에서 남자 친구 차리와 ‘시레너티 크랙(Serenity Crack, 5.11)’을 등정했고, 높이 610m의 하프돔의 노멀루트, 즉 북서벽을 등정했다. 이어 야보와 하프돔의 직등루트와 와트킨스(Watkins)봉 남벽과 로스트럼(Rostrum)과 센티넬록(Sentinel Rock)을 연속 등정했다.
요세미티 엘 캐피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점자법을 실행하듯 노즈 등반
1979년 18세 때에 나는 엘캡 노즈를 마리 진저리(여·Mari Gingery), 딘 피델만(Dean Fidelman)과 함께 등정했다. 우리는 상당 구간 인공등반법을 사용했다. 우리는 크랙에 끼울 너트와 헥사곤(Hexagons), 즉 헥센트릭(Hexentrics), 스토퍼(Stoppers), 약간의 피톤(Pitons), 50개의 카라비너, 등강기와 프루지크 매듭들, 3개의 자일, 짐을 끌어 올릴 때 사용할 도르래, 22리터의 식수, 롤빵, 참지통조림, 캔디바, 말린 과일을 담은 자루와 침낭, 매트를 끌어올렸다.
노즈 루트에는 손가락, 손, 몸통을 집어넣을 만한 크랙들이 있었다. 우리는 난이도 5.10의 자유등반도 병행했다. 46m 암벽을 등반하고 나서 3피치씩 교대로 선등하기로 했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딘이 우측 12m 지점에 있는 크랙으로 펜듈럼을 하고 나서 선등을 거부하는 바람에 선등은 여성 클라이머들의 차지가 되었다.
시클 레지(Sickle Ledge)를 지나 213m를 등반했을 때 높이 152m의 넓은 크랙, 스토브레그(Stove legs) 피치가 나타났다. 하딩 초등대가 1958년 난로 다리를 피톤 대용으로 이용하며 등반했던 구간이었다. 마리와 나는 4피치의 이 넓은 크랙을 주먹 재밍해 자유등반으로 돌파하고, 돌트 타워(Dolt Tower)에 도달했다. 딘은 푸르지크 매듭을 이용해 자일로 오르고 암벽에 볼트를 박아 돌트 윈치(Dolt Winch)를 설치한 후 짐을 끌어올렸다. 그날은 엘캡 타워의 넓은 레지(ledge, 바위 선반)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등반을 계속할 때 우측으로 ‘새벽의 벽(Dawn Wall)’, 또는 ‘여명의 벽(Wall of Early Morning Light)’ 상부가 바라보였다. 하딩과 콜드웰이 1970년 박쥐 텐트 속에서 비박하며 27일 만에 초등한 난코스 루트이다.
엘캡 타워 위에서 10피치를 등반하고, 다음 비박지 제5캠프에 도착했다. 장화 모양의 얇고 납작한 바위 날개, ‘부트 플레이크(Boot Flake)’를 오르고, 11m 좌측에 있는 크랙을 향해 홀드가 없는 암벽으로 펜듈럼했는데, 이 구간을 ‘킹 스윙(King Swing)’ 피치라 부른다. 부트 플레이크에서 5피치 위쪽에서 파도 형태로 튀어나온 바위 지붕, 노즈에서 최난 구간 중 하나인 ‘그레이트 루프(Great Roof)’가 시작된다.
날이 저물자 37m 위쪽에서 마리가 등반을 재촉했다. 마리가 ‘그레이트 루프’ 끝에 설치한 다른 고정 자일에 짐을 매달고, 다음에 딘이 등강기로 등반했는데, 그는 옆으로 12m 떨어진 허공에 매달린 채 등반해야 했다. 딘과 연결된 자일을 서서히 풀어 주다가, 자일을 허공에 놓자 그는 자일에 매달려 공중 쇼를 했다.
그레이트 루프 다음 구간은 내가 선등해야 할 제23피치 ‘팬케이크 플레이크(Pancake Flake)’였다. 크랙에 손가락 끝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절벽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했다. 암흑이 찾아와 딘의 라이터를 빌려 그 불빛으로 루트를 찾아내며 등반을 계속했다. 제5캠프로 이어지는 이 루트는 프리 클라이밍 난이도 5.11이었지만, 대부분 인공 등반으로 돌파한다.
야간등반을 계속했다. 루트의 크랙은 V자형으로 벌어져 내 몸을 받아들였다. 암벽에 머리를 대고 발을 질질 끌며, 벽에 붙은 한 마리의 벌레처럼 등반을 계속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브라유(Braille)식 점자법을 실행하듯, 홀드를 찾아내며 등반해 자정에 ‘제5 캠프’의 레지에 도달했다. 나는 레지 위로 짐을 끌어 올렸고 세 사람이 앵커에 확보한 후 단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음식이 든 자루를 실수로 걷어차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다음날 우리는 굶주림 속에 마지막 300m를 오르고 오후에 정상을 밟았다. 이후 7번이나 더 노즈 정상을 올라섰다.
엘캡의 노즈 그레이트 루프 자유등반.
1980년 엘캡의 고난도 루트 ‘쉴드’ 여성 최초로 완등
1980년대 나와 마리는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는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절벽에 은거하면서 거벽등반을 통해 인격함양을 완성하기를 갈망했다. 우리는 요세미티에서 주 5일, 하루에 8시간씩 등반에 몰두했다. 우리의 다음 등반 목표는 엘캡의 쉴드(Shield)였다. 요세미티계곡의 암벽등반에서 쉴드 등정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에베레스트의 등정의 비중과 맞먹는다.
높이 900m의 쉴드는 너무 심한 오버행이어서, 정상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린다면 그 물방울은 루트의 하단, 즉 지상에서 61m 위쪽 부근 지점에 떨어질 것이다. 계곡 바닥에서 쉴드의 헤드월(Head-wall)이라고 알려진 최종 305m를 등반하는 팀을 바라보면, 마치 두 마리의 파리들이 거대한 열기구 밑바닥을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
이 구간의 등반방식은 저속도의 인공등반법뿐이다. 노즈에서는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있는 크랙이 있어 상당 구간 자유등반할 수 있었지만, 쉴드의 크랙은 실오라기의 폭이어서 얇은 피톤을 박고, 거기에 사다리꼴 슬링을 걸고 등반해야 하기 때문에 한 피치를 등반하는 데도 여러 시간이 걸린다. 노즈에는 넓은 레지들이 있어서 비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쉴드에는 레지가 없기 때문에 포타레지(portable-ledge)를 휴대하고 오버행 절벽에 매달려 수면과 식사를 하고, 심지어 매달린 자세로 용변도 봐야 하기 때문에 등반의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일단 오버행 ‘헤드월(Head Wall)’ 등반을 시작하면 후퇴는 불가능하다. 오버행에서는 하강 자일이 등반 동작에 따라 회전하기 때문에 자일하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쉴드를 등반하던 랜디-개리 조는, 랜디가 피톤 설치 중 쇠 조각이 눈에 박혀 퇴각했고, 애리조나(Arizona) 팀은 악천후의 기상 예고 때문에 퇴각했다.
우리는 엘캡의 절벽에 소형 도르래를 설치하고, 이틀 동안 다량의 등반장비와 식수, 그리고 식량이 든 무거운 백을 끌어올리며 16피치를 등반했다. 나는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길이 1.2m짜리 줄사다리를 매달았고, 그것을 밟는 순간 갑자기 피톤이 빠지며 자일에 매달려 9m를 추락하는 사고도 당했다. 마리는 일인용 포타 레지를 설치해 호화로운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나는 피톤을 박고 바나나 형태의 해먹(Hammock, 그물 침대의 박쥐 텐트)을 설치하는 데 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속에 기어들어가 고치 속의 유충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잠을 청했다. 다이히드럴(dihedral, 2면각의), 즉 코너에서 비박할 경우 몸을 구부린 자세로 밤새도록 흔들리며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등반 시작 4일째 우리는 헤드월에 도착했다. 이곳은 ‘쉴드 지붕(Shield Roof)’이라 불리기도 한다. 마리는 바위 지붕 밑에 거꾸로 매달려 줄사다리에서 흔들거리며, 피톤과 너트 장비를 설치했다. 그녀는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며 피톤 설치가 불가능한 깊이가 얕은 크랙에 강철 줄로 연결된 코퍼헤드(copper heads, 구리 조각이 바위틈에 박혀 접착제 역할을 하는 등반 장비)를 설치하고, 거기에 매달려 등반했다. 마리가 쉴드 지붕의 끝까지 선등하는 데 여러 시간이 소요되었다. 드디어 그녀와 연결된 자일 고리가 강풍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녀는 앵커를 설치했다고 외쳤다.
나는 등강기로 마리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우리 앞에는 올라야 할, 방패를 방불케 하는 300m 높이의 화강암 오버행 절벽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매달린 꼴이었다. 그 지점에서 자일 하강은 불가능했고, 정상이냐 아니면 추락이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비박을 위해 각자의 침실, ‘포타 레지’와 ‘해먹’을 설치했다.
다섯 번째 날 아침 우리는 늘보처럼 느릿느릿 높이 300m의 오버행 헤드월 등반과 마주했다. 나는 때때로 크랙에서 쑥 내밀고 있는 선등자들이 설치한 알유알피(RURP : Realized Ultimate Reality Piton, 톰 프로스트, 이본 취나드가 고안한 칼날 피톤)를 목격했다. 알유알피에 걸린 가죽모양의 띠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버행을 선등하며 피톤에 매달린 슬링을 잡으면, 끊어져 추락할 것 같았다. 암벽 등반에서는 멀리 떨어진 홀드를 잡으려면 장신이 유리하지만, 나처럼 단신은 몸의 유연성과 45kg의 저체중 덕분에 난코스를 돌파할 때 유리한 경우도 있다.
우리는 헤드월을 지나 하얀 대리석에서 튀어나온 검은 섬록암 바위 선반, 즉 ‘병아리-머리 레지(Chicken-head Ledge)’를 돌파하고 정상에 섰다. 이 루트는 엘캡에서 로얄 로빈스 일행이 ‘북아메리카 벽’을 등반하기 전에, 그리고 짐 브리드웰이 ‘퍼시픽 오션 벽(태평양 벽)’과 ‘꿈의 바다(Sea of Dreams)’를 등정하기 전에 최대의 난코스로 꼽히던 루트였는데, 우리는 29피치를 돌파하고, ‘쉴드’를 등정한 최초의 여성 클라이머들이 되었다. 그때까지 엘캡에서의 여성 클라이머들의 등반업적은 1973년 베벌리와 시빌 조의 높이 900m의 ‘트리플 직등 루트’ 등정, 1977년 밥과 몰리 조의 ‘노즈’ 등정, 1978년 베벌리의 10일간의 ’다이히드럴 벽(Dihedral Wall)’ 단독 등정이 있었다.
6년 동안 39개 스포츠클라이밍대회에서 26회 우승
산악가이드로 일하면서 8세 연상인 26세의 대학생 존 롱과 연인 사이가 되어 노즈를 하루 동안 함께 속도 등정하고, 유명 여성 클라이머 베벌리의 초청으로 1980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참가해 우승 상금 5,000달러를 획득했다. 이 경기는 작은 봉우리 등정, ‘네바다’ 폭포 옆의 암벽 자일 하강, 공중 장애물 경기, 수영, 카약 경기, 산악마라톤이 포함된 종합경기였다.
상금에서 3,000달러를 지불하고 폭스바겐 승용차를 구입해 여러 암장의 신 루트를 찾아 전국을 순례했다. 존 롱과 케이드, 그리고 나는 애리조나주의 화강암 봉우리, 그래닛 마운틴(Granite Mountain)의 ‘코우타문디 화이트 아웃(Coattamundi Whiteout)’ 루트를 프리로 초등했다. 존 롱과 나는 등반을 위해 콜로라도주의 텔리리드(Telliride)에 도착했다. 높이 152m의 오버행 루트, 즉 ‘오퍼 벽(Ophir Wall)’의 난이도 5.12d의 화강암 벽의 하부는 존이, 상부는 내가 자유등반으로 초등했다.
1981년 존과 나는 라스베이거스의 레드록(Redrocks)에 위치한 10피치 루트, 즉 높이 244m의 ‘레비테이션 29(Levitation 29)’를 프리스타일로 초등했다.
산타모니카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며, ‘적자생존’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장거리 경주 연습을 했다. 동급생들 중에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 한스 메스너가 있었는데, 그도 형처럼 폐활량이 무척 컸다.
나는 친구 야보와 요세미티의 10피치 루트, 패어뷰 돔(Fair view Dome)의 ‘스캐어리스트 오브 더몰(Scarriest of Themall)’ 루트와 투올럼(Tuolumne) 벽을 프리로 등정했고, ‘센티넬 록(Sentinel Rock)’의 높이 457m의 취나드-허브트 루트를 프리로 등정했다.
나는 남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전학해 물리요법을 전공했는데, 4년간 동거생활을 했던 존 롱과 작별했다. 그는 보르네오 밀림지대로 탐험여행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베네수엘라의 여교사와 결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뉴욕시 근교의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규암 절벽, 즉 쇼앙군크스(Shawangunks, ‘군크스’)에서 등반 중 모델처럼 생긴, 군크스에서 가장 유능하고 체격 좋은 클라이머 러스 라파(Russ Raffa)를 만나 애인 사이가 되었다. 이곳은 미국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프리츠 비스너(Fritz Wiessner)가 1930년대, 오늘날의 장비에 비하면 열악한 대마 자일과 무른 쇠 피톤을 사용하며 몇 개의 루트를 개척했던 암장이다. 그는 와이오밍주 데블스타워(Devil′s Tower)의 초등자이며, 1939년 K2의 아브루치 스퍼(Spur, 암릉) 8,370m 지점까지 무산소로 진출했던 유명 산악인이다. 그가 개척한 군크스의 루트들은 오늘날도 난코스로 평가된다.
나는 5.11c의 ‘푸프스(Foops),’ 5.12d의 ‘튀지 루프(Tweazie Roof)’, 5.11의 ‘옐로크랙 직등루트(Yellow Crack Direct)’, 5.13a의 ‘반달(Vandals)’을 프리로 초등했다. 뉴욕주립대학으로 전학해 생물학을 전공했고, 8년 연상인 러스는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학교에서 이슬람 문명을 전공한 후 부동산업체에서 근무했다. 러스는 동료 클룬(Clune)과 군크스의 난코스 ‘투비 오아 낫투비(To be, or not to be)’를 볼트를 이용하지 않고 등정했다.
나는 프랑스 ‘베르동 고르지(Verdon Gorge)’의 난이도 5.12d의 ‘테이크 잇 오아 리브 잇(Take it or Leave it)’을 초등했다. 이 등반에서 절벽의 일련의 오목한 곳을 홀드로 대용했다. 이 루트 정상에서 이탈리아의 클라이머 마르코 스콜라리스(Marco Scolaris)를 만났는데, 그는 최초로 프리클라이밍 스포츠 국제등반대회를 개최한 인물이었다. 그가 다음해 여름 밀란 부근의 아르코(Arco)에서 개최 예정인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에 나를 초대했다.
1986년 아르코의 높이 274m의 암장(난이도 7a+, 5.12a, on-sight)에서 전년도 등반대회의 우승자인 캐서린 데스티벨(Catherine Destivelle, 1960년생, 5.13c 등정자)과 조우했다. 캐서린이 1차 대회에서 우승했고, 나는 바르도네치아에서 열린 2차 대회에서 5.12b 루트를 온사이트로 올라 캐서린과 동점이 되었다. 자주 변경된 등반 규칙과 불공평한 심판 때문에 3차 대회 도중 캐서린이 우승자로 발표되었다.
1987년 그레노블에서 개최된 국제 실내 스포트 등반대회에서 나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버시(Bercy) 스포츠 등반대회에서는 어떤 여성 클라이머보다 더 높이 올랐음에도 우승하지 못했으나 다음해 대회에서 우승자가 되었다.
1988년 10월 22일 러스와 결혼, 뉴욕 근교 뉴 팔츠(New Paltz)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결혼식은 군크스 암벽에서 거행되었고, 친구들 매타디, 마크, 수잔, 놀란, 봅의 축하를 받았다.
캐서린이 미국 유타주 스노버드에서 개최된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우승했고, 나는 아르코와 리용 스포츠클라이밍대회의 5.12d 루트에서 연속 우승했다. 나는 팔레(Palais)에서 개최된 3회 스포츠 등반대회에서 우승한 후 5.14 루트를 등정하기 위해 시메(Cimai)로 향했다. 군크스의 ‘러닝맨(Running Man, 5.13d)’을 등정했지만 5.14 루트는 등정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드디어 난이도 5.14a의 ‘마세 크리티크(Masse Critique)’를 등정했다.
리옹과 바르셀로나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에서 우승한 후, 리옹의 한 암장에서 17명의 남성 클라이머들이 등반 경쟁을 벌였지만 오직 2명만 등정에 성공했다. 여성 클라이머 이자벨(Isabelle)은 이 루트에서 등정에 실패했다.
유럽 대륙에서 거행된 여러 스포츠 등반 대회에 참가하느라고 집을 자주 비웠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의 직무에 바쁘다 보니 우리의 애정은 금이 갔고, 1991년 이혼했다. 이후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역에 정착했다. 1991년 9월 산 친구 야보는 권총 자살했다. 나의 또 한 명의 다정한 산 친구인 독일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가 졸음운전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1984년에 5.13d 루트를 등정했고, 다음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짐(Gym)에 위치한 5.14a의 루트, 펑크스(Punks)를 등정한 노련한 암벽 클라이머였다. 그는 1987년 월 스트리트의 5.14b의 루트를 초등했고, 1991년 5.14d의 ‘액션 디렉트(Action Direct)’를 등정했다.
볼프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뷔욱스(Buoux)에서 등반 중에 24m를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볼프강의 정신을 이어받아 난이도 5.13b의 크랙, ‘스튀당(Student)’을 온사이트로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6년 동안 36회의 등반대회에 참가했다. 뉘른베르크(Nuremberg)의 월드컵대회, 오스트리아의 세인트 폴텐(Saint Polten) 대회, 1992년 프랑스 라벨(Lavel) 대회에서는 우승컵을 놓쳤지만, 암벽등반의 윔블던대회(전 영국테니스 선수권대회)라고 불리는 아르코 스프츠클라이밍 대회와 마지막으로 참가한 영국 버밍엄 대회의 우승을 끝으로,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 26회의 우승을 거머쥐고 더 이상 경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속도, 프리, 단독프리로 이어지는 노즈 등반
이탈리아 돌로미테 칼리포(5,13b) 자유등반.
1992년 나는 한스 플로린(Hans Florine)과 요세미티 엘캡의 노즈를 8시간 40분 만에 속도등반했고, 짐 브리드웰, 존 바차, 록 콕은 노즈의 크랙들을 프리로 등반했다. 1981년 레이 자딘(Ray Jardine, 등반 장비 프렌드의 고안자이며 5.13 루트 등정자)은 노즈의 펜듈럼 등반 구간, 즉 ‘킹 스윙’ 피치 아래쪽에 작은 바위 선반을 만들어 손가락과 발가락의 홀드로 사용하며 노즈를 프리 등반하려 시도했고, 브루크 산달과 데이브 슐츠가 노즈의 ‘그레이트 루프’와 오버행 헤드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루트를 프리로 돌파했다.
1993년 나는 영국 클라이머 시몬 나딘과 프리로 노즈를 등반, 이틀 만에 21피치를 오르고, 노즈의 3분의 2 지점, 즉 지상에서 610m 위쪽 지점의 그레이트 루프 아래 레지에서 비박했다. 높이 30m의 코너가 중앙의 크랙과 함께 바위 오버행 밑으로 이어졌다. 시몬이 코너의 3분의 2를 오르고, 크랙이 너무 좁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이용해 좁은 크랙을 오르고 바위 지붕 밑에 도달한 후 탈진했다. 나는 휴식을 취한 후 재도전해 ‘그레이트 루프’를 프리로 돌파했다.
우리는 캠프5의 레지(ledge)에서 비박했다. 시몬이 난이도 5.12d의 난코스, ‘글로워링 스포트(Glowering Spot)’ 피치를 프리로 올랐다. 28피치를 프리로 오르고 캠프6에 도달했다. 캠프6 위쪽의 기존 루트 피치는 수백 피트 높이의 코너인데, 양쪽 절벽에 홀드가 전무했고, 한가운데 얕은 크랙이 있었다. 우리는 굶주림과 탈진으로 인해 이 루트의 최대 난코스 3m를 프리로 돌파할 수 없었다.
좌측에 변형 루트를 개척하려고 정찰했다. 팔 길이를 있는 대로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작은 홀드 하나가 있었고, 아래쪽 멀리 떨어진 곳에 풋홀드가 있어서 절벽에 양팔을 벌리고 십자가의 자세를 취해도 홀드에 접근할 수 없어 프리 등반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3m를 인공등반으로 오르고 노즈를 등정했다.
그 다음 주 나는 브루크 산달(Brooke Sandahl)과 14km의 하이킹코스로 엘캡 정상에 도달했다. 우리는 자일 하강으로 노즈의 3분의 2의 지점, 즉 캠프6 위쪽 수수께끼 피치 밑에 도달했다. 3일간 이 피치에 자일로 매달려 암벽에 발가락을 문질러 대고, 때로는 뒷걸음질 치고, 때로는 한 발의 위치에 다른 발을 옮겨 놓으며, 난폭한 탱고 춤 같은 동작을 실행했다. 나는 레이백(lay back, 크랙에서 손으로 크랙의 한쪽 벽을 잡아당기고, 발로 다른 쪽 벽을 밀면서 오르는 등반기술) 등반을 하고, 팔을 지렛대 대용으로 사용하고, 손가락으로 바위 주름을 꼬집거나 손바닥을 암벽에 밀착시키며 프리로 이 피치를 돌파했다.
며칠 후 우리는 노즈의 밑에서 프리 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그레이트 루프와 글로워링 스포트를 프리로 리드하고, 최후의 거대한 다이히드럴 밑에 도달했다. 나는 브루크의 확보를 받으며 프리로 등반을 시작했다. 마치 몸을 감추려는 듯이 기상천외한 몸 비틀기를 해야 했다. 얕은 코너 양쪽 벽에 양손과 양 팔꿈치 그리고 히프를 밀착시킨 후, 몸을 180도 회전시켰다. 결박 풀이와 탈출 등의 달인, 미국의 마술사 후디니(Houdini)의 곡예 동작과 흡사한 난이도 5.13b/c의 동작이었다. 나중에 1998년 이 루트를 등반한 스코크 버크(Scott Burke)에 의하면 이 피치의 난이도가 5.14b라고 평가했다.
노즈의 마지막 불룩 튀어나온 오버행(5.12c)을 넘고 우리는 전 구간을 프리로 등정했다. 우리는 정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암벽은 온통 물바다로 변했고 저체온증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비박했다. 정상의 노간주나무가 번개와 폭풍우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잠시 후 폭우는 그쳤다.
1995년 키르기스스탄 카라프신계곡서 명등반
1994년 9월 19일 밤 10시 밝은 달빛을 받으며, 노즈 단독 프리 스타일 등반을 시작했다. 확보자는 스티브였다. 오전 8시 반 캠프 4에 도착해 10분간 잠을 잤다. 10시 25분 그레이트 루프 등반을 마치고 정오에 글로워링 스포트 피치 등반을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스티브와 함께 체인징 코너 밑에 도달했다. 우리는 캠프6(762m)에서 몇 시간 휴식을 취하며 엘캡이 그늘 속에 잠기기를 기다렸다.
5시 반에 나는 등반을 재개했다. 나는 23시간 만에 노즈를 프리로 단독 등정했다. 정상에 짐 브리드웰과 휴 버튼이 축하해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노즈를 하루 만에 프리 스타일로 등정한 후, 다른 등반 목표를 찾을 수 없어 허탈감에 빠졌다. 형부 척이 1980년 남미의 아콩카구아 남벽 등반 중에 조난당했고, 프랑스 산 친구 위그도 아콩카구아 남벽을 단독 등반 중에 조난당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해외 원정대 참가를 기피해 왔다.
그런데 나는 1995년 키르기스스탄 북벽 원정대에 참가했다. 등반 목표는 키르기스스탄 카라프신계곡이었다. 참가자는 알렉스 로우, 키티 칼하운(다울라기리와 마칼루 웨스트 필라를 무산소 등정한 여성 클라이머), 제이 스미드, 콘라드 앵커(에베레스트 북릉 무산소 등정자), 그레그 차일드(K2 북릉 무산소 등정자), 댄 오스만, 크리스 노블이었다. 모두 남미의 파타고니아와 히말라야의 유명 등반가들이었다.
그레그 차일드와 파트너가 되어 낙석의 위험 속에서 높이 3,850m인 피크의 묘비처럼 생긴 벽을 3일 만에 크랙으로 프리 등정했고, ‘러시아 암탑’이라는 봉우리의 ‘페레스토이카 크랙(Perestoika Crack)’을 프리 스타일로 등정했다. 난이도는 ‘5.10, 5.11, 5.12b’였다. 나는 알렉스, 그레그, 콘라드, 댄과 폭풍 속에서 ‘프티챠(Ptitsa, 새)’ 봉우리의 13피치 루트를 자유 등반했고, 알렉스와 ‘피크 4810’의 높이 1,219m의 서벽을 3일 만에 프리로 등정했다. 제이, 키티, 댄은 이 봉우리의 남벽을 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