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마피아
#알카포네
ㆍ🕶
그는 왼쪽 뺨에 칼 맞은 상처가 있어 스카페이스(scarface: 흉터난 얼굴)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A급인 시칠리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뉴욕에서는 나폴리 출신은 명함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20년 금주법의 시행과 함께 시카고가 지리적 이점으로 주류 밀매의 최대 근거지로 떠오르면서 마피아의 세계에선 시카고가 뉴욕 못지 않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1927년 정부 관리들은 알 카포네 갱단이 주류취급으로 연간 약 1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 엄청난 이권을 놓고 마피아들 사이에선 주도권 다툼이 자주 벌어졌는데, 당시 시카고의 암흑가는 벅스 모런(Bugs Moran, 1891-1957)이 이끄는 아일랜드계 갱단에 카포네의 이탈리아계 갱단이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미국 이민사를 지배하는 ‘선착순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계는 백인들 중 이민 막차를 탄 그룹이었으며, 주로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쓸 만한 사업과 일자리들이 먼저 이민을 온 다른 계열의 백인들에 의해 선점된 탓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게 바로 조직범죄 집단에 이탈리아계가 많이 진출한 배경이다
이탈리아계는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이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1960년대말 이탈리아계가 미국 가톨릭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21명의 대주교는 물론 100여명의 주교들 가운데 이탈리아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계보다 50년전에 이민을 온 아일랜드계가 미국 가톨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계보다 좀 낫다는 것이지 아일랜드계 역시 적잖은 차별을 받고 있었기에 이들 역시 조직범죄 집단에 많이 진출했다.
암흑가의 세계마저 아일랜드계에 의해 선점을 당한 이탈리아계로선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셈이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1929년 2월 14일 미국 시카고 북쪽 링컨공원 근처에서 카포네 부하 7명이 모런 부하 7명을 톰슨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른바
‘밸런타인데이 학살(Saint Valentine's Day Massacre)’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창무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 해결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알 카포네가 쌓아놓은 거대한 인맥이 움직인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빅 빌’로 불리던 윌리엄 톰슨 시카고 시장도 알 카포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밤의 대통령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
‘현대판 로빈 후드’로 여겨지기도
때는 바야흐로 조직범죄의 춘추전국시대였는데, 1929년 시카고에는 91개의 협박 조직이 존재해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주류 밀매업을 하는 갱단은 톰슨 기관총을 애용한 반면, 협박 조직들은 주로 폭탄을 사용했다.
법이 썩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상황에서 사업가들은 카포네 갱단의 보호를 요청해 안전을 도모하는 길을 택했다. 일반 시민들도 ‘밤의 대통령’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기까지 했다.
카포네는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 우애, 아내에 대한 충성이 지극했다. 실업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를 차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파티도 열어주고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등 자선사업도 많이 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카포네를 ‘현대판 로빈 후드’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와 함께 당시 시카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결코 나쁜 뜻만은 아니었던 셈인데, 그는 이에 걸맞게 자신이 좋은 일을 하는 사업가라고 주장했다.
“만일 사람들이 술을 원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을 팔려고 하는 놈은 미친 놈일 것이다. 나는 좋은 술을 공급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29년 알 카포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카고트리뷴>자의 기자 제이크 링글턴의 살해 사건 직후에 저널리스트 클라우드 콕번은 <런던타임스>의 요청을 받고 카포네를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통해서 콕번은 엉뚱하게도 ‘미국체제’가 가진 미덕을 칭송하는 강의를 들어야 했다.
카포네가 자유와 기업정신과 개척자들을 칭송하면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선 경멸적인 혐오감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카포네는 자신의 범법 행위마저 철저하게 미국적인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우리들의 이런 미국적인 방식은 (그는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걸 ‘아메리카니즘’이라고 부르든 ‘자본주의’라 부르든, 아니면 뭐라 부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던져주는 겁니다.
우리는 다만 양손으로 그걸 꽉 붙잡아서, 충분히 활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결국 이 인터뷰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미국의 갱단 두목으로부터 그런 ‘강의’를 듣게끔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카포네는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악명(惡名)에 대해선 언론에게 화살을 돌렸다.
“뉴스 갱들은 아마 영원히 나를 팔아먹을 거요.
꼭 내가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이오. 당신도 내가 무한정한 권력과 엄청난 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내가 권력을 가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대에 내 재정 형편 역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어려운 상태입니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언제나 엄청나죠. 하지만 이익금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아마 내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신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이름도 많을 겁니다.”
그는 그 혐의로 1931년 기소돼 8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출감후 플로리다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매독으로 고통받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