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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관산대장 이방언, 증손자 종찬/ 동학혁명 증언록
대상인물 : 이방언(李邦彦)1838~1895. 본관은 인천. 자는 자방(子邦), 본명은 민석(民錫). 장흥의 남상면(지금의 용산면) 묵촌에서 2백여 석의 도조를 거두는 토반인 집안에서 태어남. 그는 어릴 적에 유학을 배웠는데 예산에 사는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고, 이때 동문수학인 김한섭과 뒷날 길을 달리하여 1891년경 동학에 들어 어산접의 접주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음. 1차 봉기 때 이곳의 이인환, 강봉수 등과 고부, 장성, 전주 전투에 참여했는데 장성 전투에서 장태를 발명하여 전투무기로 사용한 탓으로 ‘이장태’라는 별명을 얻음. 2차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접의 마지막 전투인 장흥, 강진싸움을 총지휘했던 것으로 유명함.▶ 증언인물 : 이종찬(李鍾燦)1938~ . 이방언의 증손자. 고향에 살면서 통대위원 등 지방유지로 활동하고 있음. 젊을 적부터 꾸준히 이방언에 관련된 사실을 조사하였으며 현재 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중.▶ 가계도▶ 정리자 : 이이화▶ 출전 : 다시피는 녹두꽃내용이종찬은 맨 먼저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말문을 열었고, 또 증조할아버지의 내력을 알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분의 후예가 자기 아들하고 같이 참형을 당하고, 큰손자가 열한 대여섯 살, 가운데 손자가 일고여덟 살, 저희 아버지는 그해에 갑오생 났어요. 역적손이라고 해가지고 어떻게 혼이 났던지 소년 가장의 입장에서 그 후로 전혀 사람 모인 데나 출입을 안하고 은신하고 살다시피 여생을 마쳤어요. 다른 어른들이나 문헌을 통해서 알고 있지, 부모님이나 백부님한테 직접 들은 얘기는 별로 없어요.
이방언의 외아들 성호도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함께 형을 당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방언의 신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어도 시골에서 이백 석 이상을 했던 지주계급이었고, 자기 어르신 중자 길자 어르신께서는 철저한 유학의 집안이었어요. 장흥향교 전교도 하셨고. 삼백 년 전통을 가지고 이씨는 용산면 청혼계라고 있습니다. 향약계, 도정[都正]이라고 하면 면단위에서는 상권을 장악하는 향약계 계장을 여기서는 도정이라고 합니다. 청혼계 도정이라고 하면 상당한 집안의 후예들이 영광스럽게 옛날부터 했던 것이고. 또 방언 어른은 유학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하셨고. 저희들은 어디서 하셨는지 모르지만, 원암 김한섭 선생하고도 동문수학을 하셨어요. 원암선생 문집에도 나오는데 원암선생은 강진향교를 출입하면서 많이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나중에 농민군을 진압하는 쪽에서 활동했어요.
곧 유림으로 활동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방언은 예산에 사는 노론 성리학의 대가인 임헌회에게 가서 공부한 것으로 나오는데(『오하기문』), 향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양반이 기골이 장대하시고, 인품도 뛰어나시고, 의로웠다고 합니다. 갑오년 전에 장흥에 흉년이 들어 가지고, 또 세금은 많이 밀려서 독촉에 못 이겨 주민들이 많이 유랑하게 됐답니다. 그럴 때 그 양반이 장흥군수[사실은 부사]를 찾아가서 세금을 감면해달라 진정했는데, 군수께서 말을 안 들으니까 전라감영을 찾아가가지고, 그때는 용산이 남면이었습니다. 남면 일대에 세금을 전면 탕감을 받았어요. 그런 의로운 일을 하고 그러니까, 많은 주민들이 그 양반을 지도자로 모시고 동학혁명에 가담을 했겠지요.
아무튼 이방언은 이곳에서 말을 타고 종을 거느리며 출입하는 신분인데도 농민의 고통을 동정하는 의인이었던 탓에 많은 우러름을 받았던 것이다.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91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산접의 접주가 되어 활약했다. 이런 탓으로 그곳 인천 이씨들이 많이 가담했고 또 용반(龍磐) 일대의 인천 이씨들은 많은 희생을 치러 뒷날 하루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대개 동학에서는 반불입(班不入) 사불입(士不入) 부불입(富不入)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이방언의 경우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이방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때의 50대는 노인대접을 받았는데 이방언은 늙은 나이로 과감히 일선 지휘자가 된 보기 드문 경우가 된다.
2차 봉기 무렵 이방언은 장흥 일대에서 집강소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 친구 김한섭은 강진향교의 장의로 있으면서 이방언에게 충고도 하였고 이어 「적의 무리를 경고하는 글」을 지어 돌렸다. 당시 “이방언이 독을 품은 것이 유별나게 심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돌렸다”(박기현의 『일사』에 나옴)고 하였다.
김한섭 등은 이른바 민보군을 모집하여 반농민군 활동을 벌였다. 곧 이해 7월 말께 유림, 아전, 장교를 중심으로 민보군을 모집하여 훈련을 은밀히 벌였는데 김한섭과 장흥부사 박헌양의 지원이 켰던 것이다.
이해 11월 광주·나주 쪽, 광양·순천 쪽에서 패배한 농민군이 장흥 이방언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농민군은 장흥을 들이쳐서 부사 박헌양을 한칼에 날렸고, 이어 강진 관아를 쳐서 의병장으로 있는 김한섭을 포살했고, 이어 강진병영에 들이닥쳤는데 이때 강진병영과 민가 수천 호가 불에 탔다.
그리고 마지막 장흥 석대에서 농민군과 좌선봉 이규태가 이끌고 온 관군 그리고 이어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은 참패했고 또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전투의 총대장 이방언에 얽힌 이야기는 아련히 전해온다. 그리하여 이종찬은 “전설 같은 얘긴데, 인천대학교 이영창 교수라고 있어요. 그분이 재경향우회에서 발행한 책에서 봤는데, 젊었을 때 부락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부락민들은 모두 피했는데, 그분이 쓰다듬고 해서 그 호랑이를 길을 들여서 갑오동학 때 그 호랑이 도움도 받고, 그 호랑이는 부용산 산신령이었답니다. 그런 말을 써놨대. 어디서 들었는지”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이곳에서 그를 영웅화하는 민간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이방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들어볼 차례이다.
대원군과 접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로서 석대전이 끝나고 그 양반이 잽혀서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가지고 재판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재판을 받을 때 대개가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 지금 나온 재판 기록에 엊그저께도 총무처기록보존소에서 재판기록 책을 보냈습디다. 그 양반은 무죄 방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죄 방면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대원군이 주선을 해서 무죄 방면을 받았다. 그래가지고 고종 앞에까지 가서 귀화초식이란 말이 뭔 말인지 모르지만, 돌아올 귀자, 될 화자, 풀 초자, 먹을 식자. 귀화초식의 승봉을 받고, 나라가 평정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국가에 공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은전을 입고 내려왔는데.
‘귀화초식’은 아마도 ‘귀화하여 초야에서 살아라’라는 뜻일 것이다.
이방언과 흥선 대원군과의 관련설은 송기숙이 『녹두장군』에서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어쨌든 이런 관계로 하여 이방언은 무죄 방면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기록보존소 발행의 『동학관련판결문집』참고).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학은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보성 군수에게로 갔대. 보성 군수가 이상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보성 군수가 재판을 받았어요, 동학에 협조했다고 해가지고. 보성 군수도 무죄 방면을 했어. 그 사람도 동학에 협조한 사람이여.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 감사의 재체포령에 의해서 잽혀가지고, 장흥 장대에서 자기 외아들 성자 호자와 같이 동참[同斬]을 당하셨어요. 지금 성운고등학교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총살도 아니고 효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
이런 말을 전하면서 말끝을 맺지 못했다. 곧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 죽이는 분살형(焚殺刑)을 당했던 것이다. 너무나 참혹하여 후손으로서 그런 표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신을 집안어른들이 수습해서 묘를 쓴 것은 여느 농민군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낫다 하겠다.
그 후 세 손자들은 어떻게 살아왔던가.
풍비박산이 됐지요. 풍비박산이 돼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저희 아버지 형제간들은 선비 집안으로 어떻게 공부를 했습니다만은 생활이 어려웠어요. 지금은 좀 폈지만. 처음에는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저희 백부님하고 중부님은 훈장을 했습니다. 그래도 머리가 있고 공부를 해서 훈장을 했고, 저희 아버지는 공부를 못하셨고. 중부님께서 열네 살에 사서삼경을 뗐다고 그러지요. 사람 만나보면 역적 후손이시 뭐이시 했으니까 출입을 안하시고. 더군다나 왜정 때는 우리 중부님은 훈장을 하시다가 젊어서 돌아가시고, 근근히 생활하고 살았는가 봅디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종찬의 아버지는 더욱 어렵게 살아남았다.
저희 아버지는 그해 갑오생인데 갑오년 난리통에 나셔 가지고, 가족들이 요리조리 쫓겨다닐 때, 용산면 원림리 수리적골창이라는 데가 있어요. 묵천 놀이마을 옆동넵니다마는 숨어 피난을 다닐 때, 하도 울고 그래싸니까. 할머니에게 장성해서 들은 말인데 “니들 애비형제를 다리 밑에 버렸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뒤에 따라다니던 종들이 데리고 가서 살렸다는 거.
이방언의 딸은 더욱 기구한 사연을 지니고 살아남았다.
71년도에 재일교포가 저희 집을 방문했어요. 재일교포 두 분이 오셔서 외갓집을 왔다고 그러는데, 우리 중부님과 아버님은 진즉에 돌아가시고 백부님만 계셨어요. 백부님이 한 구십이 넘었을 때 오셨는데, 백부님하고 내종간이지. 그때 당시 방자 언자 그 양반 따님이 계셨는데 동학이 패배하자 석대전이 끝나고 잽혀가불고, 요리조리 피난을 댕길 때, 영암에서 사는 종을 따라가버렸어요. 성씨는 누구라고 말을 안허겠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이 일본을 갔어요. 그래서 재일교포가 됐는데, 자기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듣던 얘기를 듣고 외갓집을 그때사 방문을 한 거지요. 그런데 우리 백부님은 자기의 외아들도 한 분이 계십니다만은 전혀 고모가 계셨다는 것을 일절 함구를 하셨어요. 그분들이 온 뒤에사 사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내가 챙피해서 말을 안했다고, 동학 그 자체만 해도 역적 손이라고 해서 넘부끄러운데, 더군다나 따님께서 종을 따라가서 살아부르니 보첩에도 빼버리고 전연 말 안했던 사실을 71년도에 저희들이 알았죠.
오늘날 이방언의 평가에 대해 다소 불만이 있는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개 보면 말입니다. 전라북도 지역에서 오대 장군이니 하면서 방자 언자 그 양반을 끼워넣는데, 어느 기록을 보나 뭣을 보나 삼대 장군 서열에는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여. 내가 후손이라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느냐 그러면 석대전 규모만 하더라도 오만여 농민군이 동원이 됐습니다. 그라면 한 군에, 전봉준씨가 잡혀간 지 십며칠 만에 석대전을 안했습니까? 오만여 군중이 동원이 돼서 장흥, 강진, 병영을 칠 때 석대전을 했는데, 그 규모라든지 장성 갈재에서 장태를 이용해서 전주성을 치는 공이라든지 또 기록에 보면 전봉준 장군이 동도 대장이라고 나옵니다. 손화중 장군이 초산 대장이라고 나와요. 대장 자가 붙은 것이. 그리고 방자 언자 그 양반이 관산 대장, 장태 대장, 남도 대장 그렇게 별호가 세 가지가 나와요. 대장이라고 붙인 사람이 전국적으로 세 분 뿐이여. 동학 뭐 장군 뭐 했지 대장이라고 명명한 사람이 세 사람 뿐이여. 대개 정읍, 전주 요쪽으로 동학이 가장 활발히 시발이 됐기 때문에 기록하는 데 보면 그렇게 안한 것 같드라구.
사실 석대 전투가 보은 전투와 함께 마지막으로 가장 치열하고 대단한 희생을 치른 것은 사실일 것이다.
백주년을 맞이해서 후손으로서 소망 같은 것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녹두장군이 시방 몇 권까지 나왔어요? 내가 일곱 권까지 읽었는데. 그러니까 장흥이란 데가 유별난 것이 전국에서 없는 영회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영회당은 그때 박헌양 군수 외 아흔여섯 명이 수성을 하다가 전사를 한 분들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영회당이 있고 그 후손들이 있어요. 동학도 수없이 수천 명의 농민군들이 죽었지만은 그 후예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그때 당시 총각 아니면 아직 새 신랑이 되어 손이 없이 죽어버린 사람, 손이 있다고 해도 전부 다른 데로 가버린 사람, 또 여기서 사는 사람들도 동학 후손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 그래가지고 저기 공설운동장 우게다가 동학기념탑도 맨들어 놓고 우짜고 그러니까 나도 후손이라고 몇 사람들이 나오드만. 그런데 기념탑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생각하기에는 몇 년 뒤로 제실도 지어가지고 그때 돌아가신 무주고혼들, 불쌍한 사람들, 제사도 못 받아먹고 시체가 어디가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혼이라도 일년에 한 번씩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제실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나름대로는 하고 있습니다.
실제 장흥의 동학농민군 기념탑은 1992년에 큼직하게 세웠다. 이것만으로는 선열에 대한 추모가 부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회당은 청주에 세운 모충사와 함께 농민군에 희생당한 관군 또는 민보군에게 토지 등을 하사하여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농민군과 반농민군에 대한 후손의 화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흥군민의 화합 차원에서 동학기념탑추진위를 구성할 때, 영회당 후손 대표들도 몇 포함을 해서 사회단체장, 동학 때 돌아가신 분 후예들을 혼합해서 구성을 했어요. 화합 차원에서. 그때 당시에는 서로 앙숙간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분들도 상부 명에 의해서 일개 고을을 수성하다가 전사를 하신 분들이고, 동학을 하신 분들은 이 나라 정치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이상 나라가 지탱할 수가 없으니까 개혁을 해보자는, 지금 같으면 민주화운동의 첫 번째 발을 디디는 씨앗을 뿌렸다 할까 하는 차원에서 의로운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와서 그 후손하고 우리 후손하고 조금이라도 틈바구니가 있어서는 안되겠고 해서 저도 쾌히 승낙을 하고 그 추진위원회에 동참해서 같이 일을 봤어요.
사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영회당(永懷堂)에 걸맞는 위령각이 세워져야 정당한 대우가 될 것이요, 또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반목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출처/ 제목: 장흥의 관산대장 이방언, 증손자 종찬, 대체제목: 다시피는 녹두꽃
작성자: 이방언(李邦彦)/이종찬(李鍾燦)
편찬자: 이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