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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을 찾아서, 미래를 찾아서
까까머리 소년 빌립을 처음 만난 것은 2017년 1월이다.
네팔에 대지진이 일어난 해부터 지인에게 고아원 후원을 부탁 받았지만 인도의 고아원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네팔의 고아원까지 돌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계속 문을 두드리는 지인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2017년 1월에 네팔을 방문하였다.
당시 지인은 셋집에서 6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남자 아이 2명, 여자 아이 4명과 낮에만 와서 머무는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지는 6살, 7살, 8살, 9살로 고만고만하였다.
지인은 지진 전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자기 집에 오게 된 내력을 자세하게 소개해주었고 나는 그들의 히스토리를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2박 3일, 그곳에 머물면서 아침 기도회와 저녁 기도회에 참석해서 아이들의 애절한 기도소리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응석과 재롱을 부려야 하는 나이에 아침부터 아이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다소곳하게 하는 것이 애처롭기도 하고 기특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지인은 고아로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좋은 훈련을 시켜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나이가 어리다고 일을 면제시켜주지 않았다. 지인은 아이들에게 나이와 체력에 맞게 일을 주어서 아이들 모두가 그의 지휘 아래 아침부터 아들딸처럼 움직였다. 어떤 아이는 거실 청소를 하고, 어떤 아이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어떤 아이는 지인의 아기를 보고, 어떤 아이는 우유를 사러 시장에 가고, 어떤 아이는 부엌에서 지인을 도왔다. 지인은 날마다 생활교육과 훈련을 시키며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직접 지어먹이고 있었고 간식도 직접 챙겼다. 그리고 아이들을 네팔어로 교육하는 로칼 학교가 아닌 영어학교로 보냈다. 아이들을 향한 포부와 집념이 컸다.
지인은 아이들의 시간 관리에 엄격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먼저 숙제를 하게 하였다. 모두의 숙제가 끝나면 그 때 비로소 TV 시청을 허락하였고 1시간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저녁식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어린이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자기들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엄한 규율에 이미 길들여 있어서 인지 칼로 무를 자르듯이 TV 앞에서 일어서면서 불평불만이 없었다. 그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나 함께 살지 않는 내가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물었다.
수줍음을 타는 까까머리 아이! 영락없는 한국 오지 시골의 아이처럼 보이는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목사”가 꿈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일어나 우유를 사러 시장에 가는 아이였다. 또한 아침과 저녁에 대문 열고 닫는 아이였다. 목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의 이름을 바로 익혔다. “빌립!” 그는 카트만두에서 하루 종일 차타고 가는 먼 산골 출신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최소한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 할 때까지 아니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훈련을 받아서 취업할 때까지는 돌보겠다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가능하면 대학교 공부를 마칠 때 까지 돌보면 좋겠다고 하고 특별히 빌립을 좋은 목사로 키우고 싶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운영비 일체를 공급해주시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네팔 고아원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나는 자매결연 후원자를 찾아서 첫 번 째 후원자 분에게 빌립을 소개하였다. 충남의 김 목사님께서 빌립의 후원자가 되어 바로 자매결연이 성립되었다. 목사님은 그 시부터 빌립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하셨다. 나또한 빌립의 꿈이 이루어지길 무시로 빌었다. 예수님 제자 빌립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21세기의 빌립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2018년, 2019년 정초마다 계속 네팔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자랐다. 그들은 장난치며 놀 때마저도 형제자매처럼 사이가 좋아서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로 인하여 방문할 수가 없었고 그 뒤로 계속 네팔이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들어가지 못하였다.
나는 아이들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빌립의 사진이 오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명절에 고향 작은 아버지 댁에 갔는데 홍수로 길이 막혀서 못 온다고 하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 후에 물었더니 같은 대답이 왔다. 도로가 계속 막혀서 못 오고 있고 어쩔 수 없어 그곳 학교에 등록을 하여 다니게 하였다고 하였다. 한참 후에는 작은 아버지가 일을 시키려고 그를 붙잡고 보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어린 빌립이 걱정이 되어 지인 부부에게 빌립의 신상을 파악해서 보내달라고 계속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교통이 불편해서 갈 수가 없으므로 그 지역에 있는 아는 분을 통해서 사진을 받아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진을 기다리는 사이에 2년 10개월이 흘렀다.
네팔 국경이 열리자마자 빌립을 찾으러 네팔에 갔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빌립을 찾으러 가겠다고 하자 한국 분들이 우기 때 폭우로 무너진 도로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아서 가기 힘들고 위험하다며 나를 만류하였다.
나는 빌립의 작은 아버지가 그를 억류해서 일을 시키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빌립이 원하면 카트만두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팔어를 모르는 나 혼자 가봐야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 생각대로 행동할 수가 없어 가는 것을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나 고아원을 방문하여 지인에게 빌립을 찾아서 사진을 찍어 보내줄 것과 그의 사정과 상황을 보고해줄 것을 다시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지인은 당혹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실은 문제가 있었어요. 빌립이 폭력을 휘둘러서 여자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려보냈어요.”
지인의 말은 나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작은 체구에 겨우 12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무슨 폭력을 휘둘렀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빌립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집의 구조와 역할 분담 그리고 관리와 운영 시스템 속에서 폭력을 휘두를 여지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자 아이들이 왜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지인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빌립을 찾기로 하였다. 나는끈질기게 빌립의 사진과 소식을 요구하였다. 지인이 나의 강력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드디어 빌립의 사진을 보내왔다. 옷을 입은 것이나 얼굴의 행색이 아주 초라하고 거칠게 보였다. 험악한 환경 속에 있음이 한눈에 파악되었다.
네팔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고 난 뒤에 금번 네팔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 빌립을 찾아가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카트만두 박사장님에게 렌트카를 부탁하였다. 도착한 다음 날 빌립의 주소를 받으려고 지인을 만나러 갔다. 그가 나를 반가이 맞으며 빌립이 카트만두에 왔으므로 굳이 먼 곳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가 카트만두에 온 것과 상관없이 그곳을 방문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빌립이 수줍게 웃으며 들어왔다. 늙은 아주머니와 함께 왔는데 빌립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하였다. 처음 소개를 받을 때 빌립이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에게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고 일반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을 받아 적었다.
주소는 마카완푸르 헤타우다 였다.
헤타우다에서 카트만두로 나오려면 세 번 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하였다. 일반버스는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하루가 걸리지만 지프를 타면 6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카트만두 변두리에 있는 초가운에서 아침 6시 20여분 어둠 속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도중에 딱 두 번 쉬고 달렸는데 빌립 네 오두막에 12시 무렵에 도착하였다.
초가운에서 남서쪽에 있는 헤타우다까지 대략 100km이였다. 그러나 산을 감고 비틀비틀 달리고, 홍수로 무너진 도로로 복구되지 않은 곳은 돌아가야 하고, 길이 너무 많이 파인 곳은 지그재그로 피해야 해서 시속 20km도 달리지 못하였다. 지프가 전후좌우로 흔들릴 뿐 아니라 상하로 튀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2016년엔가 콩고에서 길 없는 길을 따라 피그미 마을에 들어갈 때 23km 밖에 되지 않는 길을 4시간을 달려서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 “살아도 평화, 죽어도 평화”를 기도로 바쳤다.
헤타우다에 들어서자 길이 평탄하였고 거리가 깨끗하였다. 먼지도 없고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다. 들판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하고 연분홍색 메밀꽃이 화사하였다. 집집마다 울타리에는 빨강, 진분홍 하얀색의 부겐빌리아와 포인세티아가 이국의 정열을 뿜고 있고 바나나 나무와 파파야가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네팔 중남부 나리야니주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로 인구 20만 명의 도시인 헤타우다에 멈추어서 빌립과 가족들을 위한 캔디와 쿠키를 샀다. 그리고 전화로 빌립 어머니를 불러서 함께 산골짜기에 있는 그의 집에 갔다. 집에 가보니 과연 박사장님이나 운전기사의 노력으로 찾을 수 있는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오타바이나 달릴 수 있는 길을 지프로 달리는데 산은 높지 않은데 골이 깊었다. 개천을 따라서 달리는 길은 우기 철에 범람하기 일쑤이고 자칫하면 생명도 앗아갈 것 같았다.
우리는 산 아래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올라갔다.
헤타우다시 변두리에서부터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들 가운데도, 골짜기에도 마을이 없었다. 집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산 중턱에 헛간 같은 집이 있어서 그쪽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빌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지름길로 달려왔다고 하였다. 그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 헛간 집은 빌립 네 집이 아니었다. 빌립 네 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독가촌 1호의 집이었다. 그 집 뒤에는 사방으로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짐승우리가 있었는데 염소와 버팔로가 있었다. 짐승 우리를 지나자 조금 펑퍼짐한 밭이 나타났다. 대나무 빗자루를 거꾸로 심어 놓은 것 같은 형태의 작은 나무라고 할 수도 있고 큰 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어서 호기심으로 사진을 찍으니 누군가가 “마리화나” 재료가 되는 나무라고 하였다. 그는 그곳이 마리화나를 몰래 재배하여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오지라고 하였다. 만약에 들킬 경우에는 불 태워서 없앤다고 하였다.
마리화나 밭을 지나서 좌측 언덕으로 올라가니 건물을 짓다가 중단한 콘크리트 벽돌집이 나타났다. 그 곳에서 100미터 정도 높이에 초가집 한 채와 짐승 우리가 있었다. 독가촌 2호에 해당되는 빌립 네 집이었다. 집은 큰 홀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 입구 조금 안쪽에 집안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가리개로 일부분을 칸막이했을 뿐이었다. 칸막이를 한 안쪽의 삼면의 벽에는 횃대에 옷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우측 바닥에는 작은 벽돌로 만든 삼발이가 고정되어 있었다. 지붕 바로 아래 사면의 일정한 부분을 막지 않고 다 열린 공간으로 두어서 새나 쥐들이 들락거릴 수가 있었다. 바람도 지나가고 비도 들이칠 것이었다.
빌립은 고아가 아니었다!
십년 전에 집이 너무 가난해서 아이가 굶주려 죽거나 병들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남에게 맡기는 것이 낫을 것 같아서 남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여섯 명의 자녀들을 다 흩어버렸다. 큰 아들은 인도로 넘어 갔고 셋째 아들은 카트만두로 떠나고 큰 딸은 십대 중반에 시집보내 버리고 빌립과 루다는 마침 보살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맡기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악착 같이 일을 해서 집 앞의 작은 밭들을 일구었다고 하였다. 그는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자녀들을 동서남북으로 보내고 그가 겪었을 인생의 고통이 그의 늙음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빌립 어머니의 이야기는 7년 동안 고아가 아닌 아이를 고아로 알고 있었던 나를 망치로 내려 쳤다. 그러나 묘하게도 속았다는 사실에 흥분하거나 분노가 솟지 않았다. 담담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들을 버리게 만드는 절대빈곤과 사회의 무관심이 가슴을 송곳으로 팍팍 찔렀다.
박사장님의 통역으로 그의 이야기. 빌립의 이야기를 들을 때 슬픔과 분노가 목까지 차왔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5살 때 따라 간 사람에게 다시 버림받은 상처와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나는 빌립이 원하면 그를 카트만두로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그는 카트만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는 고향이 좋다고 하였다. 비록 하루 두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가지만 엄마 곁에 좋다고 하였다. 그는 학교생활도 재미있고 집에서 소에게 밥을 주고 염소를 몰고 다니는 것도 밭에서 일하는 것도 즐겁다고 하였다.
떠나오기 직전에 그에게 꿈과 희망을 물었다.
빌립은 곧 바로 “목사”라고 대답을 하였다.
철도 들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그가 “목사” 의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그에게 뭐라고 야단을 치며 권면을 하자 그는 “경찰”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의 푸른 하늘에 모닥모닥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이 한바탕 천둥 벽력이 되어 내리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아픔과 고뇌 속에서 성숙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종의 길을 운명처럼 걸어 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를 찾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를 만나고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보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하는 것을 들었고 알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알았어도 처음 네팔을 사랑한 순수와 사랑, 희망과 꿈을 간직하기 위하여 긴긴 밤을 주님과 씨름하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빌립을 찾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를 열어가심을 믿으면서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2023년 12월 31일 진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