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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이하(瓜田李下)
오이밭과 오얏나무 밑이라는 뜻으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이다.
瓜 : 외 과(瓜/0)
田 : 밭 전(田/0)
李 : 오얏 리(木/3)
下 : 아래 하(一/2)
(출전)
문선(文選) 고악부편(古樂府扁)
열녀전(烈女傳) 절의편(節義扁)
(유의어)
과전리 이하관(瓜田履 李下冠)
이하관 과전리(李下冠 瓜田履)
(원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오이 밭(瓜田)과 오얏나무 아래(李下)라고 줄여서 표현해 뜬금없는 말이 되었지만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고 풀이하면 모두들 이해하는 성어다.
오이 밭과 자두나무 아래서의 이런 행위는 누구나 오이나 자두를 따서 몰래 가져가는 것으로 오인 받는다. 미리 행동을 조심하여 의심받기 쉬운 행동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나라 제2의 대성인 李는 오얏 리로 알지만 실제 오얏은 자두의 옛 표현이다. 瓜田李下도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에서 앞부분만 떼어 사자성어로 만들었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을 엮은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이 잘 알려졌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위왕(威王)은 즉위한지 9년이 지났어도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 간신 주파호(周破胡)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후궁 虞姬(우희)가 나서 주파호의 죄상을 폭로했다. 그러나 되레 우희가 중상모략을 당하고 높은 누각에 유폐되고 말았다.
위왕이 직접 신문할 때 우희가 애소했다. ‘제가 죄가 있다면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서 관을 바로잡지 말라는 격언을 지키지 않은 것뿐입니다(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잘못을 깨달은 왕은 간신배를 내쫓고 기강을 바로잡았다.
과전이하(瓜田李下)
외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불필요한 행동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지 말라는 말이다.
과전이하(瓜田李下)란 오이밭과 오얏나무 밑이라는 뜻으로,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와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을 준말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이다. 즉, 남의 의심(疑心)을 받기 쉬운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과전(瓜田)은 오이 밭을 의미(意味)하고, 이하(李下)는 오얏나무 아래를 뜻한다.
과(瓜)는 오이가 덩굴에 열매가 매달린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용례(用例)에는 과종(瓜種;오이, 호박, 참외 따위의 종자). 과전(瓜田;외밭. 오이나 참외를 심는 밭), 과저(瓜菹;오이 김치), 과체(瓜蔕;참외 꼭지), 과루(瓜蔞;박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 등이 있다.
전(田)은 경작지(耕作地)의 주위의 경계(境界)와 속에 있는 논두렁길을 본 뜬것이다. 본디 농경지(農耕地)나 사냥터를 나타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논은 畓(답), 밭은 田(전)으로 구별했다. 용례(用例)에는 전주(田主;논밭의 주인), 전인(田人;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전작(田作;밭농사, 또는 밭곡식) 등이 있다.
이(李)는 오얏나무(자두나무)를 말한다. 뜻을 나타내는 木(나무 목)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子(아들 자→리)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용례에는 이하(李下; 이하부정관 李下不整冠), 이수(李樹; 오얏나무. 자두나무. 장미과의 낙엽 활엽 교목), 이화(李花; 자두나무의 꽃) 등이 있다.
하(下)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용례(用例)에는 하강(下降;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 하락(下落;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 하산(下山; 산에서 내려옴) 등이 있다.
문선(文選) 고악부편(古樂府扁)의 군자행(君子行)에 있는 시구(詩句)이다.
군자방미연(君子防未然)
불처혐의간(不處嫌疑間)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正冠)
군자는 미연에 방지하고, 의심받을 곳에 있지 말고, 외밭에선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선 갓을 고쳐 매지 않는다.
여기서 군자행(君子行)은 군자(君子)가 세상(世上)을 살아가는 몸가짐을 말한 노래다. 군자(君子)는 재앙(災殃)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할 지혜(知慧)가 있어야 하며, 혐의(嫌疑)를 받을 일이나 그런 곳에는 처신(處身)하지 말아야 한다. 즉, 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는 것을 멀리서 보면 외를 훔치는 것으로 보일 것이요,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바로 쓰면 오얏을 훔치는 것으로 의심(疑心)받을 것이니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과전이하(瓜田李下)는 위 시구(詩句)에서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와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에서 따서 성어(成語)한 것이며 이에 관한 고사(古事)는 다음과 같다. 중국(中國) 전한시대(前漢時代)의 학자(學者) 유향(劉向)이 편찬(編纂)한 열녀전(烈女傳) 절의편(節義扁)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기원전 4세기(世紀) 경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 간신 주파호(周破胡)가 국정의 실권을 거머 쥐고 있었다. 그는 국정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므로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사복(私腹)을 채우기 위해 성실하고 청백(淸白)한 신하를 모조리 추방했다. 이를 보다못해 위왕(威王)이 총애하는 후궁 우희가 위왕에게 말했다. “전하, 주파호(周破胡)는 흑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북곽(北郭) 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십시오.”
우희가 자신을 내쫓으려고 했다는 말을 들은 주파호(周破胡)는 오히려 우희와 북곽(北郭) 선생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며 모함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위왕은 그 즉시 우희를 감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도록 했다. 관원들 역시 주파호(周破胡)에게 매수되어 있어, 우희(虞姬)의 죄를 억지로 꾸미려고 했다.
위왕(威王)은 관원들의 보고를 듣고 이상한 점이 있어 직접 우희를 심문했다. 그러자 우희(虞姬)는 말했다. “전하, 신첩은 10년 동안 전하를 한 마음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첩의 결백함은 푸른 하늘과 흰 해와 같습니다. 갈고, 닦으면 옥이 되는 좋은 돌은 흙탕에 묻혀 있어도 천대받지 않습니다. 옛날에 유하혜(柳下惠)라는 사람은 겨울밤에 추위에 얼어붙은 여인을 자기 침상에 들여 몸을 녹여 주었다지만, 그래도 남녀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평소의 행동이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고 한 것처럼 남에게 의심받을 짓을 했다는 것과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저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신첩의 부덕(不德)함입니다.”
이 말에 위왕(威王)은 겨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를 감옥에서 풀어 주었으며 주파호(周破胡)를 사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았다.
당서(唐書) 유공권전(柳公權傳)에도 나온다. 유공권(柳公權)은 자가 성현(聖賢)이고 당(唐)나라 원화년 경에 진사(進士)를 지낸 분으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가(書家)중의 한 사람이다.
한번은 당문종(唐文宗) 이앙(李昻)이 유공권(柳公權)에게 물었다. “요사이 항간에서 조정의 정책 시행 조치에 대해 무슨 비평이나 불만을 갖는 점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폐하(陛下)!” 유공권(柳公權)은 기탄없이 솔직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당문종(唐文宗)은 의아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흠! 그게 어떤 점이요? 말해 보시오.” “폐하께서 곽민(郭敏)을 빈령지방에 주관(州官)으로 임명해 보낸 뒤부터 물론 찬성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 의사를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어째선가?”
문종(文宗)은 반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어 물었다. “곽민(郭敏)은 상부의 조카며 태왕태후(太王太后)의 계부(季父; 작은아버지)로서 언제나 청렴결백하고 과실이 없어 이번에 그를 빈령지방에 파견하여 작은 벼슬을 시켰는데 그것이 어찌 타당치 못한 처사라고 하는 것이오?”
유공권(柳公權)이 대답하였다. “곽민(郭敏)이 그 동안 나라에 세운 공적과 끼친 공헌으로 보아 빈령지방의 주관(州官) 벼슬을 주어 보낸 일은 본래 합당한 처사로써 왈가왈부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거론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곽민이 두 딸을 천거하여 입궁시켰기 때문에 그 벼슬을 얻었을 것이라고 들 말합니다.”
당문종(唐文宗)은 이 말을 듣고 곽민의 두 딸을 입궁시킨 것은 다만 태후를 뵈려던 것이었지 첩으로 삼으려고 들여보내진 것이 아니었다고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유공권(柳公權)이 정중히 말했다. “과전이하(瓜田李下)의 혐의(嫌疑)를 어떻게 집집마다 알릴 수 있겠습니까?”
유공권(柳公權)이 인용해 쓴 과전이하(瓜田李下)는 원래 악부고제요해군자행(樂府古題要解君子行)속의 두 시구(詩句)로서 원문은 과전부납리(瓜田不衲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라고 하여 남에게 의심 살 만한 일은 아예 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외밭을 걸을 때는 몸을 굽히어 신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밑을 지날 때는 손을 들어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
▶ 瓜(오이 과)는 상형문자로 瓜(과)자는 오이와 같은 덩굴식물을 뜻하는 글자이다. 덩굴식물이란 오이나 참외, 수박, 호박 등과 같이 나무가 아닌 줄기를 통해 열매를 맺는 식물을 말한다. 그래서 瓜자는 덩굴과 열매가 매달린 모습으로 그려졌다. 瓜자는 금문에서 처음 등장한 글자이다. 초기의 간략했던 모습이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아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瓜자는 다른 글자와 결합하기보다는 주로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孤(외로울 고)자가 있기는 하지만 子(아들 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瓜(과)는 오이 덩굴에 열매가 달려있는 모양으로 ①오이 ②참외 ③모과(모과나무의 열매) ④달팽이 ⑤(오이가)익다 ⑥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기한이 다 됨 또는 여자의 15~16세 되는 해를 과기(瓜期), 여자의 과기에 이른 나이 또는 임기가 다한 해를 과년(瓜年), 벼슬의 임기가 참을 과만(瓜滿), 오이나 참외를 심는 밭을 과전(瓜田), 고기 맛이 오이 맛과 같다는 데서 붙여진 빙어의 다른 이름을 과어(瓜魚), 벼슬의 임기가 차서 돌아옴을 과환(瓜還), 임기를 마치기 전을 과전(瓜前), 조개 관자를 이르는 말을 과유(瓜乳), 오이나 호박이나 참외 따위의 종자를 과종(瓜種), 벼슬의 임기를 과한(瓜限), 오이처럼 생긴 큰 항아리를 과준(瓜樽), 참외를 이르는 말을 감과(甘瓜), 여주를 이르는 말을 고과(苦瓜), 수박을 이르는 말을 서과(西瓜), 참외 비슷이 생긴 흰 빛깔의 오이를 백과(白瓜), 본음은 목과로 모과나무의 열매로 약재로 일컫는 말을 모과(木瓜), 임기가 다 참이나 교대할 시기가 됨을 급과(及瓜),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자연히 떨어진다는 뜻으로 때가 오면 무슨 일이든지 자연히 이루어짐을 두고 이르는 말을 과숙체락(瓜熟蒂落), 오이밭과 오얏나무 밑이라는 뜻으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을 과전이하(瓜田李下),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난다는 뜻으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종과득과(種瓜得瓜), 물결처럼 밀리고 오이덩굴처럼 갈라진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여러 갈래로 나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파분과열(波奔瓜裂), 수박 겉 핥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떤 일 또는 물건의 내용도 모르고 겉만 건드린다는 말을 서과피지(西瓜皮舐), 모과를 선물하고 구슬을 얻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선물에 대해 훌륭한 답례를 받음을 두고 이르는 말을 투과득경(投瓜得瓊) 등에 쓰인다.
▶ 田(밭 전)은 ❶상형문자로 경작지의 주의의 경계와 속에 있는 논두렁 길을 본떴다. 본디 농경지나 사냥터를 나타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논은 답(沓), 밭은 전(田)으로 구별한다. ❷상형문자로 田자는 '밭'이나 '경작지'를 뜻하는 글자이다. 田자는 밭과 밭 사이의 도랑을 그린 것으로 갑골문에서부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벼농사는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류가 정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기초 아래 중국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田자는 중국 역사와도 매우 인연이 깊은 글자라고 할 수 있다. 田자는 벼의 재배법에 따라 조성된 밭을 본떠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밭'이나 '농사'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田자를 단순히 모양자로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에 대한 주의도 필요하다. 그래서 田(전)은 (1)밭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밭 ②경작지(耕作地) ③봉토(封土) ④사냥 ⑤농사 일을 맡아보는 관리 ⑥면적의 단위 ⑦큰북(대형의 북) ⑧단전(丹田) ⑨밭을 갈다 ⑩농사짓다 ⑪사냥하다 ⑫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논 답(沓)이다. 용례로는 밭 문서를 전권(田券), 논밭과 동산이나 시골을 전원(田園), 밭농사 또는 밭곡식을 전작(田作), 논밭에 관한 제도를 전제(田制), 논밭의 주인을 전주(田主), 농부의 집을 전가(田家), 논밭과 집터를 전도(田堵), 논과 밭을 전지(田地) 또는 전답(田畓), 논밭을 재는 데 쓰던 자를 전척(田尺), 전답의 소작인을 전호(田戶), 사냥할 때 쓰는 화살을 전시(田矢), 논밭의 넓이를 전적(田積), 석유가 나는 지역을 유전(油田), 논을 밭으로 만듦을 번전(反田), 개인 소유의 논밭을 사전(私田), 국가 소유의 논밭을 공전(公田), 배꼽 아래로 한 치 다섯 푼 되는 곳을 단전(丹田), 풀과 나무를 불질러 버리고 파 일구어 농사를 짓는 밭을 화전(火田), 땅을 일구어 새로 밭을 만듦 또는 그 밭을 개전(開田), 엉뚱한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 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전부지공(田夫之功), 위임을 받아 자기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을 일컫는 말을 전결사항(田結事項), 전원을 무대로 하여 쓰여진 소설을 일컫는 말을 전원소설(田園小說), 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됨을 이르는 말을 전원장무(田園將蕪),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세상이 몰라 볼 정도로 바뀐 것이나 세상의 모든 일이 엄청나게 변해버린 것을 이르는 말을 상전벽해(桑田碧海),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 또는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오이밭과 오얏나무 밑이라는 뜻으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과전이하(瓜田李下), 진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평한 말 또는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몰골 사납게 싸움을 일컫는 말을 이전투구(泥田鬪狗), 남전에서 옥이 난다는 뜻으로 명문에서 뛰어난 젊은이가 나옴을 칭찬하는 말을 남전생옥(藍田生玉),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백성이 생업을 즐기면서 평화로이 지냄을 이르는 말을 경전착정(耕田鑿井), 좁은 밭과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 자기의 재산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촌전척택(寸田尺宅), 벼루를 밭으로 삼고 붓으로 간다는 뜻으로 문필로써 생활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필경연전(筆耕硯田), 자갈밭을 가는 소란 뜻으로 황해도 사람의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을 평한 말을 석전경우(石田耕牛), 꽃밭에 불을 지른다는 뜻으로 젊은이의 앞을 막거나 그르침을 이르는 말을 화전충화(花田衝火) 등에 쓰인다.
▶ 李(오얏 리/이, 성씨 리/이)는 형성문자로 䤚(리/이)는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子(자, 리)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李(리/이)는 ①오얏나무(자두나무) ②오얏(자두) ③심부름꾼 ④다스리는 벼슬아치 ⑤도리(道理) ⑥별의 이름 ⑦옥관(獄官) ⑧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자두나무의 꽃을 이화(李花), 오얏의 즙을 짜 말려서 빻아 만든 미숫가루를 이초(李麨), 자두나무를 이수(李樹), 복숭아와 자두를 도리(桃李), 자두나무의 열매를 자리(紫李), 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면 자두 도둑으로 오해받기 쉬우므로 그런 곳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오이밭과 오얏나무 밑이라는 뜻으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과전이하(瓜田李下), 길가에 있는 쓴 자두 열매라는 뜻으로 남에게 버림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도방고리(道傍苦李), 과실 중에 오얏과 능금이 진미임을 과진이내(果珍李柰), 이름과 실상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의 비유를 장관이대(張冠李戴),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