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생가로 떠났다. 사람들이 통곡하고 있을까, 걱정하며 대문에 다가갔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마당을 들어서니 상청(대략 죽은 이를 모시는 사당)이 지어져 있었다. 벌써 돌아가셨나 마음을 졸이기도 잠시,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 걸 보고 안심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상청인 줄 알았던 움막은 할머니를 모실 관을 미리 만들어두어 그를 가릴 용도에 그쳤다. 둘째어머니는 마치 자신이 할머니의 자식이라도 한 듯, 그 옆에 붙어서 밤새도록 불경을 외우며 간호했다. 처음엔 나는 그 효성에 감탄했지만, 방이 없어 교대로 자는 젊은 자손들을 보고 야단을 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노고를 생색내는 가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어머니는 마치 할머니가 죽으라고 염불을 외운다. 작은 어머니나 계모가 할머니에게 잘 대해드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망난 이를 몇 달이고 모시면서 완벽히 관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집안 자손들 다 변변치 않아 흩어지고, 부양 실패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려나? 괜히 씁쓸한 생각만 났다. 하루는 할머니가 노망이 나서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자손들이 이걸 돕지도 않고 웃음이나 흘리고 앉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의 병세가 호전되어, 자식들은 다시 흩어졌다. 내가 아름다운 봄날을 친구들과 즐기던 한 순간, 할머니의 부고를 받는다.
책을 읽으면서 할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 하나 없는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죽지도 않았는데 미리 관을 준비하는 등 이런 사무적인 태도가 책에서는 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시대의 생명보험이나, 장례 기업들이랑 뭐가 다를 게 있을까. 심지어 후자는 장례가 상품이다. 옛날에도 장례를 돕고 돈을 받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기업 단위로 해서 장례를 기성품으로 만드는 건 느낌이 영 다르다. 죽음으로 이윤을 남길 생각을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옛날 사람들이 현재의 장례문화라던가, 효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부모를 잃은 슬픈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감히 삼년상은 무슨 장례식이 몇일 안에 끝나버린다. 또 부모님께 친밀감의 표시로 반말하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조상들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부모님을 자식된 도리로 직접 보살피지는 못할망정 요양병원에 보내는 걸 보면 또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게 장례가 갈수록 간편해지고, 부양의 짐을 돈으로 덜 수 있게 된 걸 보면 확실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부모의 부양 외에도 자식들은 할 일이 너무 많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효보다는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