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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믿음일지라도
마가복음 16:9~14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저의 일생을 돌아보면 아주 사소한 것 같은 경험이었지만 저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기계 쪽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집에 태엽 자명종 시계가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맞춰 놓은 시각에 알람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알아보려고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어 모든 부속품을 분해했습니다. 태엽의 스프링이 풀려나고 톱니바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해된 시계를 막상 재조립하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의 불호령과 어머니의 잔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도저히 내 힘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이 크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하게 하나님은 힘을 주실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얼굴을 땅바닥에 들이대고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도 알지 못하는 지혜가 떠오르면서 시계를 완벽하게 조립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하였습니다.
60년의 전에 이런 경험이 나이 들어서도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오직 믿음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약한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강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나의 힘과 지식 그리고 지혜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슥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여러 차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과 지혜 그리고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심어 주셔야 참믿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참믿음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으로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주셔야 비로소 참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참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택하신 자녀들을 찾아 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막달라 마리입니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몹시 시달림을 받았으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 죄 사함을 받았고 많은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보이셨다’는 단어는 헬라어 말은 ‘파이노 φαίνω’로 ‘나타나다, 명백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이전에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전에도 수없이 예수님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에 나타나 보인 것은 이전의 모습과는 판이한 새로운 모습이었기에, 부활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다른 누구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둑은 우리의 원수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의 활동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마귀에 사로잡혀 괴롭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마리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마귀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어둠에 속하여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빛 가운데 들어오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면서 마귀의 자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그 안에 빛으로 나타나는 성령으로 자신 안에 담긴 죄를 낱낱이 끄집어내어 거룩함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 유명 정치인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공정성을 잃은 재판부라고 맹공격을 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법의 판단에 따라 형벌을 받는 사람 중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올바른 판단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활의 영, 성령이 내 안에 임하기 전에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회개한 죄인이 가는 것이요, 지옥은 회개치 않는 의인이 가는 곳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익한’이란 ‘worthless’ 또는 ‘useless’라고 하였습니다. 가치가 없고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면 천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회개할 필요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나 정도가 되면 괜찮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어둠과 고통이 일렁거리는 지옥에 왔으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으면 울며 이를 갈았을까요? 지옥의 영혼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형벌의 장소에 오게 된 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여주셨던 것은 다른 여자들은 천사가 전해 준 부활의 소식을 듣고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했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무덤에 남아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작은 믿음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와 함께하던 자들에게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하였습니다.
막 16:10~11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가르침을 받았고 그분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받았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 구원자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을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군병에 의하여 멸시와 희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돌아가심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동굴의 무덤에 시신이 되어 커다란 돌문에 가려진 무력한 예수님을 겪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무척 마음 아파하며 괴로움으로 ‘슬퍼하고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이 마음에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영향을 미쳐 나 역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음이 와닿지 않습니다. 이런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술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믿게 하십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대한 애통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이웃을 향한 ‘슬퍼하며 우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주님을 영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한 기도원에서 장기 금식을 하며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70이 넘은 여 집사님이 나이 40이 넘어 아이를 못 낳는다고 남편과 시댁에서 쫓김을 당하여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 기도원에 들어와 식당 봉사를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무학자(無學者)였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찬송가를 보고 성경을 보다가 깨우쳐서 글을 읽는 분인데 밤마다 소리 내어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아무개 집사의 집에 쌀이 없습니다. 쌀을 보내 주세요! 어느 집사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입원비가 없어요. 누가 부부싸움을 해서 쫓겨 나왔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녹여주세요.” 뭐 이런 기도인데 이 기도를 내가 당한 것처럼 슬퍼하면서 통곡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분이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겪었던 험난한 인생 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마치 내가 겪는 것으로 다가오면서 슬피 울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애통하는 것은 그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슬퍼 우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믿음에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로서, 두 사람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능통했던 사도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도 사도들과 끝까지 함께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이와는 전혀 반대 방향인 서쪽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주님이심을 확고하게 증명하셨습니다. ‘다른’이란 ‘헤테로스, ἕτερος’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기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확인하고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 예루살렘 성은 무시무시한 도시였지만 그리로 돌아갑니다. 거기에 비록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아직 그대로 권세를 잡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인 로마의 군병들이나 그 군중들이 그대로 있는 곳이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이처럼 담대해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3년 반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이 정작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이 완악한 것’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자기의 판단에 따라 마음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완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믿으며 반쪽 신앙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믿는 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내게 찾아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청년의 때에 한 교회의 예배실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제 안에 뭉클거리면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큰 감동으로 밀려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일 때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고 내 안에서 주안에서 죽어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비록 연약한 믿음을 지녔을지라도 내가 마귀의 자녀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애통하며 슬퍼하여 이웃의 아픔을 안을 때 예수님과 한마음을 갖게 되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듣고 배우며 그 말씀을 내안에 새기고 있을 때 어떤 날 바람처럼 찾아오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 있고, 성령님을 통하여 부활의 신앙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나를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이뤄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