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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4일(오순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 순교자 기념주일)
사도행전 8:9~24
과연 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스데반은 순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빌립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행하는 표적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의 손으로 표적과 큰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많은 중풍병자와 지체 장애인들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전부터 사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시몬은 자신이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우쭐댔습니다.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시몬이 정말 큰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자, 모든 사람이 빌립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시몬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교회에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사마리아 성도들이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의하면, 사마리아 교회 성도들은 중생 이후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성도들이 받았던 ‘성령세례’는 ‘성결 체험’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받을 성령세례는 중생 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중생과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분의 선한 뜻에 따라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교회로 보낸 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교회의 영적 성숙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임하셨던 성령님이 똑같이 사마리아 교회에도 임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오랜 역사적 갈등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는 오랜 반목(反目)과 멸시를 그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시대에, 그 분위기를 깨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시몬이 돈을 드려 자신에게도 이 권능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시몬은 예전에 마술사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시몬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몬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믿고 세례를 받는다.”라는 의미는 그가 믿는 그리스도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시몬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사도들이 가졌던 권능을 갈망했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이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시몬의 갈망과 간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한 곳은 그의 고향이었던 독일의 아이슬레벤이었습니다. 루터는 이곳에서 그가 죽기 2주 전이었던 1546년 2월에 설교했습니다. 루터의 마지막 설교는 그의 조국 독일교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복음이 다시 회복된 이후에 중세 시대의 어두움이 걷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다소 복음에 대해서 실증을 느끼게 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거의 모든 설교단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은 더 이상 그들의 심령을 활활 불타오르게 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 당시 농부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입던 바지를 자신들이 보관해 두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또 어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의 모유를 자신들이 보관해 두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들을 힐끗 쳐다보기 위해서 떼를 지어 이곳저곳 몰려다녔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매우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친이었던 요셉이 입었던 천 조각을 보기 위해서 그토록 힘든 여행을 계속했을까요? 루터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성인(聖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유품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예전에 존경받았던 성인들의 물건이 계속해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처럼 능력이 없는 물건들에 속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루터가 증명하려고 했던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떠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시작 부분에서 자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이것은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복음에 관해 언급한 첫 번째 것이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소유하셨습니다. 복음은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자 했던 이유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연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루터는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이외의 그 어떤 것에서도 그러한 능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능력은 성인들의 유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들은 능력이 그들 교회당 한쪽에 잘 차려진 커피숍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혹 어떤 교회들은 최근에 유행하는 교회 성장 방법론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잘못된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영광스럽고 성공적인 사역의 공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역의 공식은 바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출처: R. C. Sproul, “Where Is the Power of God?”, 2021. (이 아티클은 R. C. Sproul이 2008년 Ligonier Ministries Pastors Conference에서 설교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러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돈을 주고 자기에게 이 능력을 달라고 요청했던 시몬을 향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책망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이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20절).”
베드로는 시몬을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을 향해 적대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시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시몬은 이 일에 관해 상관할 것도, 동참할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만일 시몬이 자신의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한다면, 혹시 주께서 그 마음에 품은 악한 생각을 용서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지금 말한 것들이 하나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위해 주께 기도해 달라고 베드로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마 시몬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베드로에게 자신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부탁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시몬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시몬의 잘못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몬의 잘못은 그가 성령에 대해 무지했다는 점입니다. 시몬은 성령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큰 자”(9절)가 되려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전에 마술하는 능력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듯이, 이제는 능력을 받아 누구든지 자신이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시몬은 그 수단으로 돈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즉, 시몬은 성령님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이나 수단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몬의 자세는 영적 무지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잘못은 마치 마르틴 루터가 지적했던 독일교회 성도들의 잘못과도 흡사했습니다. 이는 독일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을 구하지 않고, 대신 성인들의 유품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착각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과연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받은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님을 우리의 힘이나 의지로 조정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과 자유로운 의지로 일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주목해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온 집에 가득하며”(행 2:1~2)
여기서 “홀연히”를 다른 성경(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갑자기”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과 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들이 안수하기 전에 그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던 이유는 성령을 받는 일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동기와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성령님의 임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필립 얀시는 네팔 한센병 환자 보호소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푸른초장병원(Green Pastures Hospital)에 들어서자마자 차마 눈 뜨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한 모습을 한 여성 환자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발은 지독한 한센병으로 이미 잘려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온몸은 상처와 붕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엉망이었습니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깊은 구멍만 자리 잡고 있었고, 눈은 완전히 멀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팔꿈치로 바닥에서 몸을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녀를 처음 보고서 마치 그녀가 “돈을 구걸하는 거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얀시의 아내가 그녀를 더욱 환대해 주었습니다. 얀시의 아내는 거리낌 없이 몸을 숙여 그 여성을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물리 치료사는 얀시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한센병 환자였던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리 환자들 대부분이 힌두교인이지만, 이곳에도 작은 기독교 교회가 있어요. 그녀는 교회가 문을 열 때마다 찾아온답니다. 그녀는 기도의 용사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일일이 다 반겨 주지요.”
이 말을 듣고 얀시는 자신의 잘못된 편견으로 그 여성 안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얀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얀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몇 달 뒤 나는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 망가지고 생기 없는 육체에서는 하나님 임재의 빛이 흘러나왔다. 성령이 집을 찾으셨다.”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인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까닭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는 더 이상 시온산이나 시온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출처: 존 타이슨, 「선한 능력, 아름다운 저항」 (서울: 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 (서울: 두란노, 2023년 7월호), 119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임재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잘못된 동기와 편견을 가지고 성령님을 대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합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성령님을 이용하려 들면 곤란합니다. 과연 참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그분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의 임재가 가득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성령님의 임재가 가득하다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적에 저희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시고 집에 들어오면, 저는 항상 제 아버지의 손에 무엇이 들렸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물론 제가 바랐던 것은 맛있는 과자였지만, 평소 과묵하셨던 아버지께서 저에게 전해 주셨던 과자 한 봉지는 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요, 배려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 어린 아들에게 과자 봉지를 건넵니다. 저는 즐거운 표정으로 과자를 먹는 아이를 바라보며, 과자 한 봉지에 담긴 사랑의 의미를 느낍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닮은 딸을 소중히 여기고, 농부가 수고하여 씨 뿌린 땅을 소중히 여기듯,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히 여기셔서 성령님의 임재를 선물로 내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작품 소개》"행복은 우리 안에 있어요." 대전갈마유치원 유아전체작품.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