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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알렌 선교사
윗 사진의 오른쪽이 알렌 선교사이다.
알렌 (Horace N.Allen,安 運)은 미국 북장로회 외지선교부의 의료선교사로서
1883년 중국에 도착하여 상하이에 남경 등지를 왕래하면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동료선교사인 헨델슨으로부터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타진을 받았다.
헨델슨은 한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있는 몰렌돌프 (Mollendorf,)와 가까운 사이여서
한국에 관한 사정을 잘알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알렌은 그뜻에 응락하면서도 확답을 아니하고
한국 제물포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하스(Joseph Hass)에게 의사가 필요한지의 여부를 문의하였다.
그후 뜻을 정한 알렌은
1884년 6월 8일 선교본부를 향해 한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7월 22일 선교회부터 허락을 받았다.
때마침 알렌은 미국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민영익일행을 만나게 되어,
알렌은 그들을 통하여 한국의 사정을 더 잘알게 되었으며 한국선교를 위한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
알렌의 한국행을 위해 많이 애쓴 사람은 몰렌돌프이다.
몰렌돌프는 한국정부에 알렌을 소개하였고
그 이후에도 알렌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 상륙하였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신분으로 일하게되었고
영국, 중국, 일본 영사관의 공의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몰렌돌프의 호의에 보답하려는 뜻에서 제물포 세관의 촉탁의사 직도 겸임하였다
알렌은 의사의 일만해도 바쁜 시간이었지만 한국어의 학습을 위해 열심이었으며
매일 기도와 예배드리는 일을 규칙적으로 시행하여 신앙 생활에 아주 충실하였다.
이와같이 알렌은 선교가 아직 정식으로 허락되지 않은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 의료업무로 시작하였으며,
그는 한국에 주재하는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의료선교사 알렌
알렌은 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복음전파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교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일련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곧 유명한 갑신정변이다.
알렌의 선교사업 전개를 위하여 그의 위치를 유리하게 이끈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말한다.
개화파의 주요인물인 박영효,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은
신흥국가 일본의 새 문물을 도입하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고쳐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혁신적 기운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앞에는 보수세력이 도사리고 있어 혁신을 방해함으로 일이 진척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를 일거에 제거하여 성사를 기하고자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이었다.
거사는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이용하여 요로 대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자객을 통해 대상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날밤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불이야]하는 소리에 장내가 수라장이 되었다.
민비의조카인 보수 세력의 거두 민영익은 몸에 7군데나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동맥이 끊기는 중상을 입어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려들여 출혈을 막으려 했으나 효과를 보지못하였다.
알렌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하고 있는 모습
몰렌돌프는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옮긴 후 알렌을 불러 응급수술을 하게 하였다.
알렌은 밤을 새가며 수술을 하여 바늘질한 상처만도 27 여곳의 중상이었으나
일단 출혈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알렌은 계속하여 3개월동안을 민영익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그의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정변 직후 시국은 너무나 불안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외국인들은 모두가 인천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알렌은 환자 남아 있으면서
[나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또 갈 수 있다하여도 가지않겠다]라는 비장한 말과 함께
사생결단하고 치료에 임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의술이 실패하게 된다면 조정의 원망과 불평이 닥쳐 올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민영익은 빨리 회복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웠다.
민영익은 알렌 의사에게 일금 10만량을 감사의 예물로 전달하였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인정받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궁중의 신임은 한결같이 알렌에게 집중되었으며
마침내 그는 국왕의 시의가 되었다.
게다가 고종이 알렌에게 태극일등훈장을 수여하였다.
알렌 의사의 가슴속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에게 병원 설립의 허가를 요청하여 가납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성 북쪽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하사하였고
이름도 광혜원( Widespriad Relidf House)이라고 지어주었다.
당시 광혜원의 모습
연세대학교 내에 복원된 광혜원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이 집행되어 그의 집은 몰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2월 25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이 개설되고
3월 12일에는 제중원(Univensal Helpfulness House)이라고 개칭을 보았다.
알렌은 중신, 귀족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병도 잘 치료하여
환자는 늘어나 어떤날은 하루에 26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병원을 출입하였다.
1885년 4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에 이어
6월에는 헤론 의사가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런던 중 알렌은 1887년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관의 서기가 되었다.
1895년 8월부터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관리로 봉직하게 되었으며
1897년에는 공사관의 대리공사 그리고 1901년에는 총영사가 되었다.
알렌은 1884년 한국에 온 이래로 1905년에 한국을 떠날때까지
20여년을 선교사로, 의사로, 공사로 혹은 대사로 눈부시게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을 향해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겨루고 있는 정치적 압력을
교묘히 헤치면서 한미간의 국교를 두텁게하는데 공헌했으며
또한 미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땅에서 펴게하여
한국 선교의 길을 여는데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
<2>
알렌 (Horace N.Allen,安 運)은 미국 북장로회 외지선교부의 의료선
교사로서의 1883년 중국에 도착하여 상하이에 남경 등지를 왕래하면
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돌료선교사인 헨델슨으로부
터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타진을 받았다. 헨델슨은 한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있는 몰렌돌프 (Mollendorf,)와 가까운 사이여서
한국에 관한 사정을 잘알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알렌은 그뜻에 응
락하면서도 확답을 아니하고 한국 제물포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핫스
(Joseph Hass)에게 의사가 필요한지의 여부를 문의하였다. 그후 뜻을
정한 알렌은 1884년 6월 8일 선교본부를 향해 한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7월 22일 선교회부터 허락을 받
았다.
때마침 알렌은 미국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민영익일행을 만나게 되어,
알렌은 그들을 통하여 한국의 사정을 더 잘알게 되었으며 한국선교를
위한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 알렌의 한국행을 위해 많이 애쓴 사람은
몰렌돌프이다. 몰렌돌프는 한국정부에 알렌을 소개하였고 그 이후에
도 알렌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알렌은 1884
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 상륙하였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
는 신분으로 일하게되었고 영국, 중국, 일본 영사관의 공의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몰렌돌프의 호의에 보답하려는 뜻에서 제물포 세관의촉
착의사 직도 겸임하였다 알렌은 의사의 일만해도 바쁜 시간이었지만
한국어의 학습을 위해 열심이었으며 매일 기도와 예배드리는 일을 규
칙적으로 시행하여 신앙 생활에 아주 충실하였다. (L.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P.90) 이와같이 알
렌은 선교가 아직 정식으로 허락되지 않은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의
료사업부터 발족케 하였으며, 그는 한국에 주재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알렌이 10월 1일 미국 선교회 본부에 발송한 보고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가 이곳에 온지 2주간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공식 활동이 허락되지 아니하여 공사관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불원 장래에 선교의문이 열릴 것이라 믿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
습니다] (H.A.Rhodos, Letters form Korea, 1884,The 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 P.78)
알렌은 무엇을 하던지 복음전도의 본신사명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한국어 교사인 이하영에게 비밀히 전도하였다.
(Allen D. Cl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P 40)
어느사이에 알렌이 기독교 선교사라는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갔다.
고종은 푸우트 미국공사를 불러 이의 진부를 타진하였다. 푸우트 공
사는 [알렌은 공사관 소속의 틀림없는 의사]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
이다. (Allen Papers, Allen`s Letter to F.F.Ellinwood, Seoul Oc-
t 8. 1884)
알렌 의사는 환경과 배경이 좋았던 것이 그의 사업 진행에 큰 도움
이 되었다. 한국정부로부터 신임받고 있는 몰렌돌프가 그의후견인이
었고 그의 본국인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에 침략 야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위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부동항을 얻으려고혈
안이이었으며 영국도 세계제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의 극동정책은 필리핀을 지키기 위하여 아시아 각
국과 우호를 지키면서, 그것만으로 만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한국인이 가진 미국공사나 관리에 대한 신임도는 상당히높
았다.
알렌은 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복음전달의 기회를 포착하고
자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교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일련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곧 유명한 갑신정변
이다.
알렌의 선교사업 전개를 위하여 그의 위치를 유리하게 이끈 사건이 발
생하였다. 그 것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말한다. 개화파의 주
요인물인 박영효, 김옥균,서광봄,홍영식 등은 신흥국가 일본의 새 문물
을 도입하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고쳐 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혁신
적 기운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앞에는 보수세력이 도살이고 있
어 혁신을 방해함으로 일이 진척되지 아니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일거
에 제거하여 성사를 기하고자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 쿠데타이었다.
거사는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이용하여 요로 대관들을 초청한 자
리에서 자객을 통해 대상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날밤 연회가 무
르익어갈 무렵 [불이야]하는 소리에 장내가 수라장이 되었다. 민비의조
카인 보수 세력의 거두 민영익은 몸에 7군데나 칼을 맞고 쓸어졌다.
그는 동맥이 끊기는 중상을 입어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
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려들여 출혈을 막으려시
도하였으나 효력을 보지못하였다.
몰렌돌프는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옮긴다면 알렌을 불러 응급수술을
가하게 하였다. 알렌은 밤을 새가며 수술을 하여 바늘질한 상처만도 27
처의 중상이었으나 일단 출혈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알렌은 계속하여 3
개월동안을 민영익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그
의 생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정변 직후 시국은 너무나 불안
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외국인들은 모두가 인천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알렌은 환자 남아 있으면서 [나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또
갈 수 있다하여도 가지않게다]라는 비장한 말과 함께 사생결단하고 치
료에 임하였던 것이다. (The Foreign Missionary for March,1885,P429)
만약 그의 의술이 실패하게 된다면 조정의 원망과 불평이 일시에 닥쳐
올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민영익은 빨리 회복되었
다. 이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웠다. 민영익은 알렌 의사에게 일금 10
만량을 감사의 예물로 전달하였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은 한국인들사
이에서 완전히 인정받게되는 행운을 만났다. 궁중의 신임은 한결같이알
렌에게 집중되었으며 마침내 그는 국왕의 시의가 되는 영예를 차지 하
였다. 거기에다가 고종 국왕이 알렌에게 티극일등훈장을 수여하였음은
더 큰 보상이었다.(Charles A.Sauer,Whithin the Gate, P97)
알렌 의사의 가슴속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에게 병원 설립의 허가를 요
청하여 가납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성 북쪽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하
사하였고 이름도 광혜원 Widespriad Relidf House)이라고 지어주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이 집행되어 그의 집은 몰수되어 있
었다. 그리하여 2월 25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이 개설되고 3월
12일에는 제중원(Univensal Helpfulness House)이라고 개칭을 보았다.
알렌은 중신, 귀족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병도 잘 치료하여 환자는
늘어나 어떤날은 하루에 26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병원을 출입하였
다. 1885년 4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에 이어 6월에는 헤론 의사
가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런던 중 알렌은 1887년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관의 서기가 되었다.
1895년 8월부터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관리로 봉직하게 되었으며
1897년에는 공사관의 대리공사 그리고 총영사가 되었는가 하면 1901년
하였다.
알렌은 1884년 한국에 도래한 이래로 1905년에 한국을 떠날때까지 20
여년을 선교사로, 의사로, 공사로 혹은 대사로 분주히 그리고 눈부시
게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을 향해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겨루고 있는 정치적 압력을 교묘히 헤치면서 한미간의 국교
를 두텁게하는데 공헌했으며 또한 미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
땅에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땅에서 펴게하여 한국 선교의 출발을 획
하게 하는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
<3>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올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 설립 110주년을 맞아 근대의료 관련 유물 6건을 19일자로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 한다.
이번에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근대 의료 유물 6건은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되던 근대시기의 진료도구 2건, 의료관련 서류 3건, 유리원판 필름 1건으로, 근대기 서양의학의 도입 및 발전과 관련해 역사적․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제중원 의사 알렌의 진단서. |
‘제중원 의사 알렌의 진단서’는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H. N. Allen, 1858~1932)이 발급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다.
이 진단서는 1885. 9. 13 알렌이 직원 웰쉬(C. A. Welsch)에게 발급한 것으로 1~2주간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7군데에 칼을 맞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내어 고종의 총애를 얻은 의사이자 선교사였으며 외교관으로도 활약하며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 |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첫 해(1885. 4. 10~1886. 4. 10) 활동 보고서로 알렌이 제중원 개원 1주년을 맞아 작성한 것이며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표지 상단의 ‘Compliments H. N. Allen’이라 적은 알렌의 서명이 있어 의학사적·사료적 가치가 크다.
▲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의 수술 유리원판 필름. |
‘세브란스병원장 에비슨의 수술 유리원판 필름’은 에비슨(O. R. Avison, 1860~1956)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유리원판 필름으로 특히 박서양(朴瑞陽, 1885-?)은 백정(白丁)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도와 의료활동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대한의원 개원 칙서. |
‘대한의원 개원 칙서’는 1908. 10. 24 대한의원 개원일에 황제 순종이 내린 칙서(勅書, 임금이 훈계하거나 알릴 내용을 적은 글)로, 백성들에게 의료의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이 담겨 있으며, 가로 세로 11cm 크기의 ‘칙명지보(勅命之寶)’ 국새(國璽)가 찍혀있다. 이 칙서는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공식 문서로서 의학사적·상징적 가치가 크다.
▲ 분쉬가 사용한 외과도구(동은의학박물관 소장) ▲ 제중원 의사 알렌의 검안경 |
그 밖에 ‘제중원 의사 알렌의 검안경’ ‘분쉬가 사용한 외과도구(동은의학박물관 소장)’도 의학사적 가치가 인정돼 문화재 등록 대상에 포함됐다.
이번에 의료 관련 유물의 문화재 등록은 문화재청이 2008년도에 실시한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조사 용역을 바탕으로 유물에 대한 일괄 조사를 통한 비교·평가, 관계전문가 현지조사와 검토회의 등 충분한 검토·논의 과정을 거쳐 추진됐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문화재 등록예고 공고를 통해 소유자를 비롯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등록문화재로 공식 등록할 계획이다.
<4>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이 내한한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명성왕후와 인연을 맺게 된 알렌은 고종의 후원으로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곧 개명)을 설립하였다.
의학교육은 1893년 내한한 에비슨에 의해 크게 성장하였고, 1900년 미국의 세브란스가 기부한 기금으로 서울역 앞에 새 병원을 지으면서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하였다. 이후 일제 지배의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한국인이 중심이 된 의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선도하는 한편 간호학 및 치과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알렌 선교사는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넘은 12월 어느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에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 되었다. 그 후 이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 알렌이 세운 최초의 병원 광혜원 >
"Amazing! Now, finally I believe it(놀라워요! 이제서야 믿어지네요)." 9일 오전 9시, 연세대학교에 들어서던 두 미국 여성은 넓은 캠퍼스를 본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전날 저녁 한국에 온 리디아 알렌(63)씨와 마사 알렌(48)씨였다. 두 사람은 오전 내내 학교 곳곳을 둘러보며 "Amazing(놀랍다)!"을 연발했다. "이렇게 큰 학교인 줄 몰랐어요. 사진으로 본 옛 학교는 작고 허름한 모습이었는데…." 이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자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광혜원)을 설립한 호러스 알렌의 증손녀들. 알렌의 후손이 한국을 찾은 것은 그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지 103년 만에 처음이다. 두 사람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을 맞아 연세대 의과대학의 초청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알렌' 성을 가진 200여 명에게 편지
알렌 박사는 개화기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이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의학 교육을 시킨 인물이다. 1884년 조선에 발을 들인 뒤 21년간 머물렀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습격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때, 서양 의술을 동원해 석 달 만에 생명을 구해낸 것이 계기가 돼 고종의 어의(御醫)로 임명됐다.
1885년 제중원을 세운 뒤론 개원 1년 만에 1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했고, 조선인들의 질병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의학 보고서를 최초로 펴내기도 했다. 이후 고종의 외교 자문 역할을 하며 박정양 공사 일행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조선공사관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년 만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주(駐)조선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출발해 공사 자리까지 올랐다.
알렌은 끝까지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사람이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 가쓰라태프트협정(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통치를,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인정한다는 밀약)이 맺어지자, 미국으로 달려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격론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해임 소환했고, 알렌은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는 말을 남긴 채 그 해 한국을 떠났다.
알렌은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톨리도로 돌아간 뒤 'Things Korean'(한국적인 것들)이란 책을 썼다. 그는 책의 서문에 "불행하게도 미국은 한국의 신의를 저버렸다. 양국은 1882년 '한 나라가 외세 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나라가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지만, 미국은 이 신성한 맹약을 지키지 않아 조선인들의 분노와 반감을 샀다. 필자의 진심 어린 동정과 애정을 조선인에게 표하며…"라고 썼다.
그가 귀국한 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손들은 한국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1985년 연세대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학교를 세운 주역들의 후손을 초청했지만, 알렌의 후손들은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이후 가족들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을 찾아낸 것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허정(70)씨였다. 허씨는 정형외과를 운영하다 5년 전 은퇴한 뒤, 재미(在美) 동문들을 위해 학교 앨범을 만들다가, 알렌의 생애를 접하고 감동해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톨리도 근방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국, 도서관에 문의를 하고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알렌'이란 성을 가진 사람 200여 명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샘 알렌'이란 이름의 남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지만, 톨리도 지역의 역사 잡지에 기고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허씨는 당장 "알렌이 세운 학교가 문을 연 지 123주년, 알렌 탄생 150주년을 후손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 며칠 뒤, 알렌 둘째 손부(孫婦)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
가족들은 톨리도 지역 근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알렌은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고, 중소기업 부회장을 역임한 장남은 아들이 셋, 변호사였던 차남은 후손이 없었다. 세 손자 아래엔 증손녀만 5명. 생존해 있는 이는 큰손부(93)와 증손녀들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후손들에겐 '알렌의 피'가 흘렀다. 큰손자는 심장을 전공한 내과 의사였고, 나머지 두 손자도 2차 대전 때 전장에서 위생병으로 부상병들을 돌봤다.
증손녀 마사씨와 그 여동생은 소방서 응급구조대원이고, 리디아씨는 식물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자폐아들을 치료하는 원예치료사로 병원에서 일한다. 마사씨의 언니도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리디아씨는 "의사였던 아버지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줬고, 새로운 의료기기를 만드는 연구에 골몰해 있는 날이 많았다"며 "우연인지 아니면 알렌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몰라도 가족들 대부분이 남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종이 선물한 은 그릇과, 명성황후가 시해 된 뒤 상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알렌이 입었던 관복의 흉배, 향로, 꽹과리 등도 소장하고 있다. 두 증손녀는 이 중 알렌이 생전에 썼던 금테 안경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들은 10일 연세대 창립 123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11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마사씨는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에 심은 작은 씨앗이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니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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