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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60,1-6
제2독서 : 에페 3,2.3ㄴ.5-6
복 음 : 마태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수의 뇌 과학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처음 시작한 지 아직 21일이 되지 않은 행동’에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 그 행동을 입력해 놓을 ‘기억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주 동안 계속했음에도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는 것은 뇌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행동을 뇌가 받아들이고, 그 행동을 습관으로 저장하는 데는 꼬박 ‘21일’이 걸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습관으로 길들이고 싶다면
끈기를 갖고서 21일간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뇌에서 “아! 주인이 이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려나 봐.”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21일 이하면 뇌에서는 ‘아예 결심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습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습관을 통해 계속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이야기도 많아지고 더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습관이 이뤄지지 않으면 늘 주님이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21일 동안이라도 반복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로 예수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인 오늘, 동방박사의 모습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별만을 보고서 메시아를 만나러 이스라엘까지 찾아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가서 헤로데 임금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동방박사들이기에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초라한 마구간에 태어난 이 아기가 온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주님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만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21일의 규칙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이 나의 삶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공현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왕’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왕’은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에 대한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4년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
당시는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03위 시성식과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공식 표어는 ‘이 땅에 빛을’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784년 시작된 교회는 많은 박해를 겪었고, 순교자가 있었지만 신앙을 지켜왔고,
103위 성인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103위 시성식’입니다.
교황님과 사제단이 제대로 입장하는 동안 통로에서 안내를 맡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님의 신학교 방문이었습니다.
저의 자리는 통로 쪽에 있었고, 교황님께서 제대로 입당하실 때 제 옆을 지나가셨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았던 제가 신학교를 잘 마치고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빛이 되신 103위 성인의 전구하심이라 생각합니다.
5년 뒤인 198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세계 성체 대회(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는
전 세계의 성직자, 평신도가 성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높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회입니다.
103위 시성식이 한국교회를 알리는 자리였다면
성체대회는 한국교회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성체대회의 공식 표어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저는 당시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하였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성체대회 폐막미사’입니다.
저는 제단에 올라가서 미사에 참례하였고, 성체 분배를 하였습니다.
5년 전인 시성식 때는 통로 안내를 맡았지만 성체대회에서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괌에서 온 참가자들의 안내였습니다.
덕분에 성체대회의 많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셨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여러 나라의 공연도 보았습니다.
25년 뒤인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
시복식의 공식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세월호 참사’로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세월호 희생자의 손을 잡아 주셨고, 희생자의 가족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
교구청에 있던 저는 감사하게도 방준위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도문 제작’입니다.
교황방한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교회의 인준을 받아서 나누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기억하는 자료집 발간입니다.
함께 하였던 분과위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통로 안내자, 성체 분배자에서 분과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일어나 비추는 것이 제게는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별을 따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세 명의 박사이야기입니다.
멜키올과 발다살 그리고 가스발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인도해준 ‘별’을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 부와 건강이라는 별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별은 참된 진리의 별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남을 속이게 되고, 분쟁과 갈등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별은 무엇이어야 할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무엇이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하는
첫 번째 선물은 첫 예물은 희생이었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인내였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2021년도에는 ‘말씀’의 별을 따라 ‘희생, 인내, 감사’의 선물을 준비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이라는 기쁨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먼저 드러내신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기 개방성인
평화와 기쁨의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떠나
우리들 곁으로 오셨다.
동방박사들도 길을 떠났기에
하느님의 성탄을 만날 수 있었다.
공현은 떠남이다.
집착에서
탐욕에서
떠나는 것이다.
공현은
만나기 위한 떠남이다.
공현은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사랑의 축제이다.
그 축제에서
하느님의 가난함을 만난다.
작은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껴안으신다.
널리 드러내는 공현은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씀의 빛이다.
사랑할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본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가난한 아기의 여정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공현의 본질이며
구원의 실재임을 알려주신다.
모든 삶을
우리들에게 거시는
하느님의 봉헌이
사랑의 공현(共顯)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봉헌이시다.
봉헌이 선물이다.
생존하려는(to be) 사람에겐 당신을 감추시고
살려는(to live) 사람에겐 당신을 드러내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를
묵상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제 주님께서 나의 ‘삶의 의미’가 됩니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으면 그냥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생존하는 사람의 특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나도 죽고 이웃도 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릴 적 길을 잃어 남의 집의 식모로 키워졌습니다.
그 집은 어머니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만 죽도록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생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당엔 보내주었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하도 모질게 당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타서 죽이고 당신도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며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얼굴과 손발이 문드러진 저 나병 환자들을 보아라.
저런 사람들도 사는데 넌 무엇이 모자라 죽으려고 하느냐?”
어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의 의미를 찾으셨습니다.
사람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창조해주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살게 되셨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생존합니다.
생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존이 목적이 되는 이유는 ‘창조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 생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나면 살아갑니다.
그들은 ‘내가 왜 생존하는가?’를 묻습니다.
부모를 보며 ‘아, 부모가 낳아주었으니 사는 거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생존합니다.
나를 창조해 준 부모를 위해 살 때 동물적 생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더는 ‘사는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진짜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냥 살아가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존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처럼 창조자를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알아 그분 때문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래서 살기 위해 창조자를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하지만 대부분은 찾지 않습니다. 그저 생존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그런 사람입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나 참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영표 선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마치고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꿀맛과 같은 2주간의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강원도 어느 곳에서 청년들을 위한 강연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북한 이탈자 청년들도 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며칠을 생각하다 도저히 피곤해서 갈 수가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잘 아는 목사님의 사모가 우연히 자신을 방문했고
또 우연히 북한선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다시 강연하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강연 내용은 그리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 성공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맨 앞의 한 청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지막 질문을 그 청년에게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왜 저희 탈북자 청년들을 좋아하세요?”
이영표 선수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뒤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그때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북한을 나와 남한에 왔는데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를 때 하느님을 안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을 보며 이영표 선수를 한 번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청년이 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이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진짜로 만날 때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진짜 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생존의 삶을 넘어서고 싶어 해야! 합니다.
참삶의 의미를 위해 생존의 도구들을 포기하는 모습이 바로 ‘봉헌’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지니고 강연에 왔던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면 더는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며 생존하게 만드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 때 부모가 삶의 의미가 되어 그렇게 행복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하느님을 만나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표징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희망이 되는지, 아니면 고문이 되는지가
우리가 헤로데의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인지 동방박사인지를 결정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을 찾는다는 증거로 준비해 온 선물이 십일조와 같습니다.
황금은 세속(돈)을, 몰약은 육신(쾌락)을, 유향은 마귀(교만)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세속-육신-마귀를 선택하여 주님께 바치기를 거부한 ‘선악과’와 같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별합니다.
청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연습을 시킨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의 창조자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투자하는 만큼 주님은 당신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사는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주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먼 길을 온 이유는 그들을 놀라게 했던 그 별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유다인들만의 임금으로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현자인 그들이 감지한 것이지요.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누워 있는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충실히 움직이고,
박사들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별을 따라 갑니다.
별은 박사들을 예수님 구유 앞에까지 이끈 뒤 제 역할을 마치고 멈춥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박사들은 기뻐하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애초부터 별을 따라서 떠난 길이니, 그 별이 멈춘 곳이 왕궁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것은 별이니까요.
유다인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분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반겨 맞이하고 엎드려 경배한 존재들은
마굿간 짐승들과 가난하고 투박한 목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제1독서는 온 세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몰려들리라고 예언합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 60,3-4)
저마다 예물을 들고 빛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를 관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더 이상 작은 나라 이스라엘만의 임금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 자비와 구원을 목말라하는 온 세상이 이 모두를 지니신, 빛이신 분께로 나아옵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구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공현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느님과의 계약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상으로 지평이 열립니다.
모든 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또 그분의 신부가 됩니다.
이제 구원의 조건은 인종이나 국적,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실현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마태 2,6)
말씀을 품은 이에게 온 세상의 보화가 물밀듯 밀려들 것입니다.
주님을 품었으니 모든 것을 품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주님께 쏟아지는 경배와 흠숭이 그저 흐뭇하고 기쁠 뿐입니다.
주님 공현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지속됩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의 구유 안에 말씀을 모시고 사는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신분이나 학위, 부나 권력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주님을 모신 영혼 위에 별은 떠오르고, 구원을 고대하는 이들은 이를 감지합니다.
우리를 비추며 사막과 광야를 돌고 돌아 앞서가던 그 별은
저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나 왕궁이 아니라 초라한 마굿간 같은 우리 존재 위에서 멈춥니다.
누추하고 죄스런 우리 마음속 구유 안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말씀이신 분,
그분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시다.
사랑하는 벗님!
나 자신이 가난한 목동 처지여도, 의지할 곳 없은 이방인 처지여도,
마굿간 짐승밖에 못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을 모신 곳에 별은 빛나고 그 빛은 남녀노소, 민족과 국가, 인종과 문화를 넘어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평화를 건넬 것이니,
그저 말씀에 머물러 고통에 찬 세상을 품읍시다.
세속의 멍에와 탐욕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비추는 말씀의 별을 따라 여기까지 오신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제 "일어나 비추십시오."(이사 60,1 참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