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의 서유기 -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은 그저 운 좋게 얻어걸린 영화가 아니다. 스토리 구조는 헐거운 듯해도 의외로 탄탄한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심지어 매우 사색적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슬픈 운명적 관점에서 사랑과 폭력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연출은 사랑과 폭력과 운명의 연쇄고리를 의도적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이런 기조는 영화 마지막까지 거의 일관되게 이어진다.
화려한 무공과 신비한 도술은 곧 '힘'으로 해석되고, 이것이 남녀관계에서 작용할 때는 '폭력'으로 조명된다. 힘으로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막 대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도 여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출발점은 다르다.
여성의 폭력은 선천적인 아름다움에서 출발한다. 아름답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구애를 받는다. 여성은 그러한 우월감에 심취하여 남성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하 선사는 사랑스러운 신선의 자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하는 귀찮게 구는 지존보에게 느닷없이 일격을 날리고 그에게서 월광보합을 빼앗는다. 그리고는 장난으로 지존보의 발바닥에 점을 찍는다. 그 후로도 자하는 지존보를 애완견 취급하며 굴욕을 준다. 이런 폭력은 훗날 자하에게 후회를 안겨준다.
남성의 폭력은 권력에서 출발한다. 일단 힘을 얻은 남성은 관계에서 상대방을 마음대로 대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존보는 힘없는 일개 산적에 불과하고 시종일관 당하며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그가 손오공이 되어 큰 힘을 얻자 상황이 뒤집힌다. 손오공은 폭력적으로 자하를 대하고 그녀를 떨쳐낸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 연관된 자들은 모두 폭력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뒤늦게 후회한다. 그러나 후회한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파탄이 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운명"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다시 돌이키려고 미련을 갖는 것은 윤회를 낳고
미련을 끊으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그 뒤에는 인간적인 슬픔이 남는다.
<선리기연>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메시지에 방점을 찍는다.
첫댓글 저도 주성치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아이러니를 다루는 데 탁월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영화는 질리지가 않습니다.
주성치는 아이러니의 웃음 너머에 있는 눈물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코미디인데도 처음부터 연출이 범상치 않죠. 보통 코미디는 작정하고 웃기려고 BGM이든 배경공간이든 웃기고 과장된 걸로 화력을 쏟아붓기 마련인데 월광보합은 반대로 비워버립니다. 배우들은 웃긴 연기를 하는데 배경음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처럼 허무한 바람소리같을 걸 잡고 있어요. 황량한 배경 공간도 그렇고. 절대로 자연스런 연출은 아니죠. 그래서 이건 작품의 주제를 처음부터 의식하고 연출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우의 과잉 웃음과 배경의 슬픈 침묵이 연출적으로도 묘한 아이러니를 만드는 것 같아요.
[식신]의 연출이 일반적인 코미디 방식이죠. 음악도 연신 쿵짝쿵짝 거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도 거창해 보이는 요리 대기업? 그런 곳... 홍콩 시장 패권을 두고 시장쟁탈전도 벌어지고, 맹렬한 분위기의 요리경연도 벌어지고... 다 거창하게 깔고 들어가죠.
그런데 월광보합은 묘하게 흐느끼는 분위기로 연출을 잡고 들어가죠.. 배경공간도 초라하기 짝이 없고...
주성치는 작정하고 만들면 참 대단한게 튀어나오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데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을 보고나면 마음 한켠이 아련하게 아파옵니다.
춘십삼랑 역으로 나온 남결영 씨는 최근 홍콩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안타까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