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서 만나는 토정 이지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가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는 토지가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로 이어져 생선과 소금 그리고 쌀을 거래하는 사람이 많으며 (……) 충청도 안에서는 오직 보령의 산천이 가장 빼어나게 아름다우니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가 오래도록 그 몸을 편안하게 보존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토정 이지함과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보, 이산해 등이 태어났다.
1992년 8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곳에 이지함의 묘가 있는 것은 여러 설이 있다. 이지함이 생전에 미리 터를 정해두었다고도 하고, 이지함의 3형제가 모친의 상을 당하여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고도 한다.
낮은 산허리에 있는 이 묘는,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으며, 유언대로 비문은 간략하고 문석인은 치장이 거의 없는 매우 검소한 묘이다.
묘비 전면에는 ‘土亭先生李公之墓 恭人完山李氏俯左’라 음각되어 있다.
서울 마포대교 북단 마포동과 합정동 사이 약 3.3킬로미터의 길이 토정로(土亭路)로다. 현재의 용강동에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흙으로 언덕을 쌓아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亭舍)를 지어 스스로 토정(土亭)이라 이름 하였다.’라는 <선조수정실록> 에 실린 글 때문에 이곳에 토정로를 지은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고 기인(奇人)인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역학과 의학·수학과,천문·지리에 해박하였던 그는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였다.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으며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던 이지함의 조카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산해다.
이지함의 형인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5세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겨우 포대기를 떼었을 때 이미 글자와 발음을 이해하였다. 이웃 하나가 ‘집 우宇’자 형태로 귤을 벗겨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대답하시를 “‘황黃’자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농부가 농기구를 가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산山’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작은아버지인 토정 이지함이 태극도 한마디를 가르치니, 문득 천지음양의 이치를 깨닫고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지함이 글 읽기를 그만두고 식사를 하도록 명령하니 시를 지어 이렇게 노래하였다.
밥이 늦어지는 것도 가엾거늘 하물며 배움이 늦어짐에랴.
배가 고픈 것도 가엾거늘 하물며 마음이 고픔에랴.
가난한 집안에 마음을 다스리는 약이 있으니,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리리.
한음 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였다. 조선 5백 년 역사상 장인과 사위가 영의정을 지낸 경우는 이산해와 이덕형밖에 없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李瀷은 우리나라 최고의 천재를 김시습. 이산해를 꼽았다.
이지함은 자신의 조차 이산해를 잘 가르쳤고, 그 공을 잊지 않은 이산해는 <숙부묘갈명>에서 작은 아버지 이지함의 행적을 ‘숙부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오늘의 이 시대에 우리나라를 걷고 답사하는 사람들의 롤 모델이 바로 토정 이지함이 아닐까?
신정일의 <서해랑 길 인문기행> 중
2024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