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이 독립군의 목을 작두로 자를 때 가족들을 교회에 몰아 놓고 불을 지를 때 지진이 났다고 조선인을 사냥해 죽일 때 사내들은 잡아가 탄을 캐게 하고 처녀들을 잡아가 노리개로 삼을 때 쌀은 다 실어가고 콩깻묵을 먹일 때 무슨 공덕으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나 김구를 죽이고 소녀상을 욕보이고 이 나라의 녹을 받으며 왜놈 편이 되는 게냐 배워서 친일하고 정치해서 친일하고 이 나라 군대 계급장 달고 친일하면 누구에게 칭찬 받고 누구에게 충신이 되는 게냐 홍범도가 만주에서 왜놈들을 무찌를 때 총알 하나 보태지 못한 것들이 유관순이 안중근이 옥에서 죽어갈 때 입도 뻥끗 못한 것들이 무슨 낯으로 지금 이 땅에서 푸닥거리나 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냐 —월간 《문장 웹진》 2024년 9월호 --------------------- 전윤호 /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봄날의 서재』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