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우주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한번 배부르면 살찐 듯하고
배고프면 곧 죽겠다는 듯 참을성이 없다면
천한 짐승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어디 있을까?
생각이 좁은 사람은
오늘 당장
마음같이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의욕을 잃고 눈물을 짜다가도
다음날 뜻대로 일이 된다면 금방 빙글거리며
낯색을 펴곤 한다.
근심하고 유쾌해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느끼고 성내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감정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이다.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녕 비웃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소동파가,
‘속된 눈으로 보면 너무 낫고
하늘을 통하는 눈으로 보면 너무 높기만 하다.’
하였으되,
일찍 죽는 것과 오래 사는 것을 똑같이 보고
죽고 사는 것을 한 가지로 보는 것은
너무 높은 생각이다.
요컨대 아침에 햇볕을 빤하게 받는 위치는
저녁때 그늘이 빨리 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들음도 빨리 오는 것이어서,
바람이 거세게 불면
한 시각도
멈추어 있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을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자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016
출처 > 도서 [내 아들 딸들아 세상은 너의 것이다]
다산 정약용 편// 안장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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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유성 박한곤
우리가 처한 사회를 통찰洞察하고
각자 세심洗心하지 않으면
인구 절벽이 아닌 숱한 절벽이 우리를 위협함을 알자!
멀리 보고, 높이 보고, 깊게 보는
마음에 우주를 담을 수 있는 삶에는
요즘 흔한 생활 상生活相,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감탄고토甘呑苦吐>”
라는 속담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쓸쓸한 유배지에서
나라와 자식의 앞날을 염려하며 밤을 지새웠을
민족의 스승이신 다산의
따스하고 근엄한 입김으로 자식에게 보냈던 서한에서
“일찍 죽는 것과 오래 사는 것을 똑같이 보고
죽고 사는 것을 한 가지로 보는 것은
너무 높은 생각이다.”<본문>
“하늘을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서”<본문>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희망의 절대적 끈이며
능동적 생존-能動的生動을 위한 동아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니
갑진년 새봄에 잔설처럼 남은 새벽 한기寒氣를
살포시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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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스승 담계覃溪 옹방강도 존경한 소동파는 어떤 사람이었나,
소동파Ssu Tungp'o , 蘇東坡 1036. 12. 19~ 1101. 7. 28 < 중국, 송(宋)>
요약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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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다음 백과>
<추사 김정희는 젊은 시절 아버지인 김노경(1766~1837)을 따라 사행에 참가해 청의 저명한 노학자이자 관료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ㆍ1733~1818)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중 지식인의 교류가 확대되었다.
1810년 연행에서 옹방강과 인연을 맺고 김정희가 돌아 온 뒤, 서울 문인들 사이에서 옹방강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으며
사행을 가는 문사들은 옹방강을 만나고자 노력했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귀한 글과 영상 감사드립니다
봄이 온 듯 하지만 밤낮 기온 차가 심하니
더욱 건강유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