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자취가 서린 익산 나바우 성당의 십자각 바우,
“인생을 흥미로운 것으로 보는 습관, ‘인생에서 찾아낸 진귀한 발견에 감탄하는 습관’ 이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고통을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괴로워하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야.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일들을 간직하고 있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당신을 만난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예기치 못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경우가 그랬다.
1845년에 중국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불뤼신부를 비롯한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인천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불행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몰라도 거센 풍랑을 만나 밀리고 밀려서 제주도 모슬포 부근 용수포구에 도착했다. 다시 부서진 배를 손질해서 타고 육지로 나왔는데, 그때 선택했던 장소가 강경포였다.
그런데 강경은 나라 안에 이름이 난 번잡한 포구였다. 그런 연유로 계획을 바꿔서 강경의 초입 나바우도착한 것은 10월 12일이었고, 김대건이 첫발을 디딘 곳이 십자각 바우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는 일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첫발자국을 뗀 곳에 서학의 상징인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일인가?
나바우를 거쳐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펴던 김대건은. 1846년 5월 14일 황해도에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4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 다음 날인 9월 16일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군문 효수형으로 참수되었다.
김대건은 죽기 직전 배교를 종용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시종일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 달라.”
그 당시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그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 김대건의 시신을 파묻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다. 그가 순교한 지 40일 만에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민식을 비롯한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빼내 이민식의 고향인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미리내에 안장했다.
”나는 내 키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네,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것이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실린 글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인데, 김대건의 운명이 바뀐 것은 프랑스 출신의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를 만나서 신학생으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김대건 신부가 불시착했던 용수포구에는 용수성당이 세워졌고, 익산 나바우 성당에는 나바우 서당이 세워졌으며, 김대건 신부가 도착한 나바우에는 지금도 선명하게 십자가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으니,
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살고 있는가?
2024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