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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그렇게 매력이 없는 곳인가?
- '현오와 걷는 지리산 '서문 중에서
저에게 있어 지리산은 이런 곳인데....
수도권 3인, 대전 2인, 현지 2인 등 7명으로 대원이 꾸려집니다.
Rocky moon님이나 산수팀 그리고 홀대장님은 지태智太까지 하신 분들이고 현지팀인 고남님이나 선배님은 매주 지리산을 쑤시고 다니시는 분들이니 진행의 어려움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원고 정리 문제로 3주간 제대로 된 산행을 못한 제가 문제라면 문제 같습니다.
사실 국립공원지역은 산방기간이기도 해서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것도 보기 안 좋습니다.
그저 평소같이 혼자 훌쩍 지리로 들었으면 그뿐이었는데 영랑대와 소년대를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보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공지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단촐하게 지리에 듭니다.
오늘 구간 내용은 곧 출간하게 될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많이 발췌하였습니다.
원래 12월 초에는 출간할 예정이었는데 원고가 900쪽 분량이라 대촉 수정하여야 하기에 내년 초로 미뤄지게 됐습니다.
오늘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위치한 벽송사능선과 두류능선을 진행합니다.
산방기간만 아니라면 하봉에서 중봉을 거쳐 천왕봉 ~ 제석봉 ~ 창암능선~ 추성동 주차장으로 진행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치밭목대피소가 가까이 있는 중봉을 통과하기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더욱이 천왕봉에는 많은 산꾼들이 북적거릴 것은 뻔하기 때문에 그분들의 눈길을 피한다는 것도 그릴 달갑지 않습니다.
오지 않은 듯 살짝 다녀가는 것이 지리산 신령님이나 산신께도 예의일 것이니 추성동 ~ 벽송사 능선 ~ 새봉 ~ 덕천지맥(동부능선) ~ 하봉(영랑대) ~ 두류능선 ~ 추성동으로 잡습니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Rocky moon님과 홀대장님은을 만나 인월로 이동합니다.
그제 송년회로 진하게 마신 여파로 2시간 푹 잡니다.
인월터미널 펀의점에서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고 추성동으로 아동합니다.
03:52
장비를 챙기고 도로를 따라 의탄마을 부근에 있는 벽송사로 향합니다.
벽송사 길은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과 연결된 길이기도 합니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 중에서
그런데 오늘 구간 중 상당한 거리를 점필재 김종직(1431~1492)과 함깨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점필재는 1431년 6월 성균관 사예司藝(성균관유생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관직)를 지낸 부 김숙자의 아들로 태어나 143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8년 문과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러다 1470년 유자광의 현판을 불사른 게 화근이 되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되는 화를 입었으나 우리나라 유학의 종조로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1472년 중앙 관직에서 밀려나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지리산 산행에 나섰고 그 산행기를 담은 글이 유두류록입니다.
그런데 부임지인 함양의 학사루에는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면서 지었던 시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를 본 점필재가,
결국 그 현판은 철거되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이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자 출신으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유자광은 더욱 점필재를 증오하게 된다.
1472년 8월 14일 ~ 같은 달 18일까지 진행한 선생의 발자취를 가끔씩 만나는 곳에서는 뒤따라가 봅니다.
지리산 주위의 여느 마을이 안 그러겠냐마는 이 의탄마을은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540년 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보고는 바로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점필재를 잠깐 만나볼까? 항상 지리산행에 목말라 하던 그가 함양군수로 부임한 해가 1471년이다.
무릉도원이라 여겨졌던 의탄마을
그래서 그는 부임 이듬해인 음력 4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이 의탄마을에 당도해 그의 심경을 이렇게 남겼다.
점필재를 유혹했던 곳이 바로 이 의탄마을이다. 점필재는 동행했던 유호인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에서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와 어우러져 으뜸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1611년 4월 3일 남원부사로 근무하던 어우당 유몽인도 인월쪽에서 백장암 ~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전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 도중에 이 의탄촌을 지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며 점필재를 회상하기도 했다.
04:17
서암정사를 거쳐 벽송사로 오릅니다.
새벽예불은 3시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벌써 끝났나요?
조용합니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도 명색이 우리나라 선불교의 종가를 자처하는 곳인데...
예전 앨범에서 가져왔습니다.
벽송사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미인송과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을 보고 벽송사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장승 두 기가 서 있다. 예전에는 사찰 밖에 서 있던 것을 청허당 바로 뒤로 옮기고 각閣을 세운 것 같다. 좌측 장승은 금호장군禁護將軍, 우측 장승은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명찰을 각 달고 있다. 이는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를 막는 이른바 토속신앙의 비보裨補역할을 수행하는 신장상神將像이다.
그러니 이는 ‘법우화상’의 설화와 실상사 입구의 상원주장군 등의 석장승과 함께 지리산의 토착적 고유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사찰에서 이 목장승이나 실상사의 석장승에게 행하는 의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한편 이 장승은 우리나라의 산신숭배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 신앙은 잡신을 거쳐 수목신앙樹木信仰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단군의 신단수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마을 어귀의 ①솟대나 ②장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③서낭당으로 발전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솟대는 삼한 시대의 소도蘇塗의 다른 말로서 개인이 가정에서 임시로 세우는 신간神竿이나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세우는 것도 있겠지만 삼한시대에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비록 도망자라 할지라도 체포할 수 없다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는 취지의 기능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신의 역할도 하게 되었고 수살목水殺木도 되었다.
또한 수목신앙은 장승으로도 발전하게 되는데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하여 마을 입구(벽사辟邪장승), 사찰 입구(사원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비보장승)에 많이 세웠다. 사실 보통 장승이라면 이정표나 마을의 수호신, 사찰의 경우에는 경계표지의 역할(노표장승)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승들도 지리산으로 오면 그 역할이 달라진다. 즉 불교가 지리산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데 가령 실상사의 석장승 3기나 벽송사의 목장승 2기 등이 토속신앙과 불교를 이어주는 예이다.
한편 남창 손진태(1900 ~ ? )는 선왕당이나 적석단을 누석단 즉 서낭당으로 명명하면서 “(서낭당은) 고대의 산신사 또는 산신제단이며 또 길 가는 이의 부적이기도 했으며, 마을 간의 경계였으며 그 자체로 신神이기도 했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지리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누석단 즉 서낭당의 신과 산신은 여신이고 성황신이나 칠성신은 남신으로 이해하면서 전자는 우리 고유의 신이며 후자는 중국 전래의 신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좀 주의할 게 있다. 이렇듯 지리산신은 여자이어서 이에 터 잡아 성모신앙이 발전하게 된 것인데 제석봉의 제석당 만큼은 남신인 천신을 섬겼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부계 사회의 산물로 지리산도 고조선 이전 부족사회의 성모를 섬기는 모계사회에서 천신을 섬기는 부계사회로의 변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니 천왕성모는 그 전환기의 민간신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낮에 본 벽송사. 제 앨범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자처하는 벽송사로 오르는 길이다. 경암의 벽송암기에 의하면 벽송사는 벽송암이었다. 벽송사의 창건주 벽송대사가 도 닦은 얘기 한 토막을 들어보기로 하자.
서산대사의 벽송사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과거시험 무과에 응시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여 조정에서는 북벌 계획까지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적군과 싸우는 등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많은 번뇌와 씨름하다가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서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해 왔다. 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 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자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란 지암은 대사에게 돌아가서는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 손을 높이 하늘로 치켜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이때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 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절을 짓고 벽송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때가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이었다.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한 벽송사는 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타 불시에 기습, 불을 질러 당시 입원 중이던 인민군 환자가 많이 죽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인골이 간혹 발견된다고 한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수행을 하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한국전쟁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
그런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1520~1604) 휴정이다. 이 절집의 청허당은 강원講院으로서 휴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다. 벽송대사는 선종 60조로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이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기이다. 서산대사하면 빠뜨리기 어려운 게 바로 삼가귀감三家龜鑑이고 단속사며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서산은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삼가귀감과 단속사 그리고 성여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사 성여신이 혈기왕성한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이 삼가귀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삼가 중 유가儒家의 글이 맨 뒤에 편철되어 있는 것과 사찰에 형상이 괴이한 사천왕 등 불상을 조성한데 격분하여 불경을 간행하는데 쓰이는 목판은 물론 절에 불까지 질렀다는 것이다.
한편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벽송사가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다.
벽송사에
은거하며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곳 지리에 밝은
최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럴
때 추성리며 칠선 계곡 그리고 국골 등의 지명이 나오기도 했다.
벽송사 우측의 등로를 따라 오르다 부용암 입구를 지납니다.
그러고는 이내 벽송사능선에 다다릅니다.
안부에서 지리산 둘레길을 떠나보내고 이제부터는 온전하게 지리산 능선으로 붙습니다.
05:05
대단히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경고판을 지납니다.
06:22
아직도 날이 밝아오지를 않으니 와불산에서의 조망이 어려울 것 같아 상당한 시간을 쉬는데 할애합니다.
전에 올다가 조망터 두어 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기던 생각이 나더군요.
하봉에서의 흐름도 만끽하고 향운대도 찾아보고 그랬었는데.....
06:30
그렇게 여유있게 조망을 즐기며 오르다가.....
이 붉은색 글씨를 눈여겨 봐야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곳입니다.
이곳에서 좌틀하여 삼거리까지 진행한 다음 다시 좌틀하여 바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홀대장님 표현에 의하면 '저자직강'이라고 합니다.
제가 직접 해설을 하니 그럴 법도 한 표현입니다.
고등학교 때 써먹든 말이죠?
대단한 재치입니다.
우선 사진 하나 봅니다.
이곳이 바로 이 와불臥佛 즉 부처님이 입적을 하실 때 편안하게 누운 모습의 머리부분입니다.
이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송전리 송내동에 있는 견불사見佛寺이고 마을이 엄천 건너 견불동見佛洞입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지금 이곳인 1164.9봉이 아닌 1213.9봉에 와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곧 점필재길을 만나게 될 것인데 잠시 1480년 8월 14일로 돌아가 봅니다.
창원마을의 둘레길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마을 외곽으로 통과하게끔 길이 개설되어 있다. 사당을 지나 당산나무가 서 있는 조망터로 오면 지리의 전모를 훤하게 볼 수 있다. 천왕봉에서 좌측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바로 지리동부능선이면서 덕천지맥이기도 하고, 지리태극종주 루트이기도 하며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줄기는 중봉, 하봉을 거쳐 쑥밭재를 지나 와불산臥佛山1213.9m으로 내려와 의탄리나 운서리 혹은 동강리로 진행하게 된다. 그 와불산 바로 앞쪽으로 ‘독녀암1117.5m’으로 불리는 '함양 독바위'가 명백하다.
점필재 김종직은 저 바위를 지나면서 "내 일찍이 산음(산청)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여러 봉우리와 함께 우뚝 솟아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때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었다."고 하여 아울러 그 유래도 설명하였다.
저 동부능선에는 '진주 독바위'라는 독바위가 하나 더 있다. 참고로 악양 뒤편에 있는 지리남부능선 상의 삼신산 ~ 쇠통바위 옆 독바위는 '하동 독바위'라 부른다.
와불산臥佛山은 미타봉彌陀峰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와불산에 대해서 논의가 있다. 와불산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와불산을 상내봉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또 국제신문이나 부산일보 산행 안내 개념도에는 1164.9봉에 상내봉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며 2003년도 제작한 ‘사람과 산’ 지도에는 삼거리 부근을 상내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등 제각각이다. 어찌된 일일까?
먼저 옛 선인들은 이 부근의 지형을 어떻게 봤을까? 선조들이 부른 이름 그대로 불러주면 될 것이니 꼼꼼하게 산행 기록을 챙긴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을 보는 게 아무래도 믿음이 간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문제의 대목이다. 의론대 삼반석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향로봉과 미타봉이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 봉우리가 다리 밑에 있었다.”는 말은 점필재가 산행기를 작성할 때 착각 내지는 착오로 인한 표현 같다. 실제 현장에 임해보면 의론대 앞의 능선은 벽송사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그 능선에는 문제의 석봉 이외에는 이렇다 할 봉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좌측 사진의 A는 1164.9봉이며, B는 덕천(웅석)지맥의 새봉에서 가지를 치는 벽송단맥에서 독녀암 능선을 가지 치는 삼거리, 그리고 C는 1213.9봉으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와불산으로 표기된 봉우리 그리고 D는 독녀암1117.5m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처님이 입적할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는 명백하게 ‘A'의 곳이다. 굳이 와불산이라고 한다면 A'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함양군에서도 이 1164.9봉에 ‘臥佛山1161m’라는 정상석을 세워놓기도 하였고 그 들머리에는 누군가가 ‘와불’이라고 바위에 표기까지 해 놓았으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부처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니 ‘1164.9봉=와불산=와불’이라는 데 별 의심이 들지 않는다.
한편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 보면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는 까닭에 무릇 이 열두 곳의 명산을 사찰이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고 적었을 만큼 우리나라의 산 이름은 불교식 이름이 많다(불교지명설). 산에 사찰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모습같이 생긴 봉우리도 승려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일반적으로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통상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불인 비로자나불과 현생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미래불인 아미타불로 구분되는데 이 아미타불을 그냥 미타불로도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려들 특히 점필재 김종직의 산행에 지로승 역할을 하고 있는 해공과 법종은 당연히 미타봉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1164.9봉=와불산=와불=부처바위=미타봉’으로 보면 될 것이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미타봉은 해결되었다. 문제는 의론대에서 본 두 개의 봉우리 중 이제 남은 향로봉이다. 그리고 이 향로봉은 점필재가 한꺼번에 거론한 만큼 두 봉우리는 인접한 봉우리에 있어야 한다. 실제 산행에 임하면 위 참고도의 1213.9봉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오뚝이같이 생긴 바위가 뚜렷하게 조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혹시나 그 위로 안개구름이 피어오르거나 사람이 올라서서 두 손을 뻗는 모습을 한다면 영락없이 향로와 같은 모양새이다. 그러면 산 이름으로서의 향로봉과 상내봉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문제는 이곳이 경상남도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힌트는 지리남부능선 상에 있는 악양의 진산 형제봉이 주었다. 즉 형제봉을 성제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형>성' 같이 ‘ㅎ’이 ‘ㅅ’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킨단다. 그러니 향로봉도 향로봉>상로봉>상내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쉽게 수긍을 할 수 있다.
정리를 하자면 ‘A’는 와불산 = 와봉 = 미타봉 = 1164.9m, ‘B'는 지금 부르는 대로 ’상내봉 갈림길‘, ’C‘ = 향로봉 = 상내봉 = 1213.9m로 보면 되겠다.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와불산에 올랐으나.....
시간이 너무 이릅니다.
그저 멀리 중봉 ~ 천왕봉 ~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봅니다.
바로 아래는 덕천지맥으로 아직 진주독바위는 보이지 않고....
미세 먼지인가 아니면 흐린건가?
그날ㄷ호 미세먼지 때문에 조망은 그저 그랬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보았었는데....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독녀암은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얘기해 줍니다.
이게 바로 홀대장님이 얘기하는 저자직강著者直講?
왕산과 필봉산....
08:06
와불산을 나와 향로봉(=상내봉)과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의 와불산까지 확인하고 삼거리를 거쳐 새봉으로 나옵니다.
새봉을 오르기 전 지나온 향로봉과 와불산을 봅니다.
08:31
새봉으로 올라섭니다.
부근에 새재니 위새재니하는 고개 있어서 새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낯이 익으시다구요?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겁니다.
지태를 동진하다보면 여기서 우틀하지 않고 무작정 직진한다는 얘기죠?
대원들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기억이 새록새록 나도록 해드리죠
어쨌든 이제 지리동부능선이자 덕천지맥에 올라섰습니다.
이제부터 쑥밭재까지는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참, 그전에 들러야 할 곳이있죠?
지태를 서진으로 하시는 분들이 그냥 지나쳐야 하는 곳.
바로 독바위입니다.
다람쥐님이 빨리 가자고 성화(?)시네요.
아무럼요.
독바위로 가는 길은 의외로 편합니다.
로프를 잡고 올라야죠.
조망 시작.
가까이는 도토리봉 그리고 멀리는 웅석봉이 드디어 눈에 들어옵니다.
도토리봉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태의 남부군은 물론 이병주의 지리산에도 나오는 지명입니다.
그리고 웅석봉이라...
웅석봉으로 오른다. 웅석산에 오르면 우선 숨이 멎게 된다. 갑자기 세상의 정상에 올라온 느낌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지 머리가 멍해질 따름이다. 그저 두 군데의 전망대를 오가며 살펴보는데 이마저도 시원치 않고 만족할 수 없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침착해져야 한다. 그러고는 아무래도 올라온 곳부터 살펴보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슬쩍 둔철산으로 눈길을 준다. 그런데 둔철산은 혼자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의령지맥의 한우산과 자굴산까지 함께 데리고 온다. 차근차근 그 줄기를 따라 우측으로 눈길을 옮기면 꾼들의 눈은 자잘한 봉우리들을 지나 그래도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백마봉과 집현산을 지나 남강을 따라 진양호에서 머물게 된다.
웅석봉에서 봐야 비로소 지리산이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된다.
다시 왕산에서 좌측을 보면 법화산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짐이 보이고 그 앞으로 와불산에서 새봉. 그 앞의 도토리봉이 보이니 이제는 동부능선의 봉우리들이 한 번에 읽힌다. 눈길은 천왕봉으로 간다. 천왕봉에서 중봉으로 내려온 능선이 좌측으로 황금능선을 타고 구곡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그리면 그 좌측 뒤로 촛대봉이 보이고 왕시루봉까지 보인다. 낙남정맥의 흐름까지 느끼면 이방산과 수양산에서 달뜨기능선을 따라 이리로 올라오는 것을 다 볼 수 있으니 웅석봉에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존경하는 글쟁이 산악인 박인식은 웅석봉을 이렇게 얘기한다. “지리산은 어디서 보아도 그 산세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넓은 산자락 탓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지리산은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인식되기 쉽다.(중략) 웅석봉에서 바라보아야 지리산은 추상화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웅석봉은 이런 봉우리이다. 어디서 보아도 지리산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웅석봉에서 만큼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인식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웅석봉이 정리됨을 느낀다.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서 웅석봉이라고?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바위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산이나 커다란 바위 등과 관련하여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山’, ‘劍巖’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한 산’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웅석봉에서의 진행은 2등급삼각점(산청26)을 확인한 다음 초소방향으로 나간다. 헬기장을 나가면 바로 삼거리이다, 여기서 삼장면을 만나는데 좌측 삼장면과 단성면의 면계가 이른바 달뜨기 능선이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 뇌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병주의 ‘지리산’ 7권에도 빨치산이 황석산을 넘어 둔철봉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달뜨기능선을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그리고 천왕봉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써리봉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화대종주 능선길이 뚜렸합니다.
화대종주華大縱走라...
한때 산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가 있었다.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배낭의 무게 등으로 일시종주가 어려웠던 때 지리의 가장 긴 능선으로 알려진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코스로 줄여서 ‘화대종주’라 불렸다. 43.3km나 되는 그 긴 거리를 당시 꾼들은 1박2일, 2박 3일로 걸었다. 그렇게 난이도 있는 코스로 알려졌다. 아직 ‘extreme'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거리를 일시에 종주한다는 건 아무래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리라. 그런데 체력도 좋아졌고 장비도 좋아진 지금 그 ‘화대종주’를 ‘일시종주’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코스가 됐다. 이 화대종주의 43.3km는 공단에서 측정한 숫자이므로 이제 화대종주 43.3km는 공식 거리로 못 박으면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이 코스는 대원사 ~ 무제치기폭포 ~ 치밭목대피소 ~ 중봉 ~ 천왕봉의 대원사 코스와 지리 주릉 그리고 주릉의 코재 ~ 화엄사의 이음이다. 생각해보면 산경표가 알려지기 이전인 1990년 까지는 중거리 산행을 꿈꾸는 이들이 꼭 한 번쯤은 걷고 싶어 하고 동경하던 그런 종주코스였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정맥, 지맥 산행이 일반화 되면서 예전의 명성은 약간 빛을 바랜 느낌은 있다. 하지만 매년 시행되는 ‘화대종주 산악마라톤 대회’와 항상 지리산을 그리거나 예전 시절을 꿈꾸는 올드팬들로 꾸준하게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지리산하면 그래도 ‘화대종주’이기 때문이다.
연기조사가 창건한 양대 사찰은 산청군과 구례군을 대표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화엄사는 544년, 대원사는 548년으로 창건 연대는 각 다르지만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종찰로, 대원사는 선불간경도량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도 유명한 대원사가 있는 유평계곡은 지리산 중봉과 새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덕천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그 길이만 해도 약 12km 정도 되니 그 계곡의 아름다움이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 대원사 앞 덕천강을 건너는 대원교 앞에 노루목 같이 쑥 고개를 내민 곳이 있다. 그 고개를 장항치라고 부르니 이 부근이 장항동인 것 같다. 그런데 진양지에서 보는 장항동은 이곳만을 특정해서 이르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삼장리 탑동塔洞 서쪽에 있다. 골짜기 입구가 아득하고 깊어 30여 리나 된다. 산수가 기이하고 험준하여 산속에서 더욱 절경인 곳이다. 시내는 지리산 동쪽에서 발원하는데 구름에 스며들고 바위에 부딪히며 동쪽 삼장리로 들어간다. 10여 명이 앉을만한 반석이 있다”
그러니 장항동은 지리산 동쪽의 산수 기운이 모인 곳이다. 장항동은 남명 조식의 문집에도 실려 있고 또 겸재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읊은 시에도 나온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던 겸재의 시를 한 번 들어볼까? 그는 장항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天秋日暮肅無雲 (천추일모숙무운) 가을 하늘 해가 지고 구름 없이 맑은데,
洞別巖奇絶世紛 (동별암기절세분) 골짜기를 구분지은 바위 기이하여 어지러운 세상과 끊어주네.
禹稷若知山水趣 (우직약지산수취) 우와 직이 만약 산수 맛을 알았다면
無人陶鑄舜乾坤 (무인도주순건곤) 아무도 순임금의 세상 만들지 못했으리.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항동은 그윽하고, 깊고, 고요하며 인적이 없어 우왕이나 직왕이 이 장항동을 알았더라면 이곳에 푹 빠져 세상살이도 잊었을 정도로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계속해서 월촌月村 하달홍(1809~1877)의 얘기를 그의 장항동기에서 들어보자.
“금년 봄 내가 두류 동쪽 기슭에 놀러 갔을 때 장항동이라고 하는 곳을 물어보았지만 산속 늙은이나 마을 노인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 같아 몹시 서운하였다. 대원암에서 자는데 벽에 쓰여진 시를 보고는 비로소 바로 여기가 장항동임을 알았다. 암자 앞에 장항치獐項峙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은 것 같다. (대원암은) 강희(1662-1722)연간에 승려 운권이 세웠다고 법우화상이 말하였다. 암자의 북쪽에는 계곡물이 부딪쳐 폭포가 쌓여 있고 (폭포의) 웅덩이는 맑고 투명하며 거울 같은 바위는 모두 흰색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뻐하여 종일토록 떠나지 못하게 한다. 또 양쪽 계곡은 푸른 산이 천길 벼랑으로 서 있어, 추연惆然히 선생의 기상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두류에는 숨어 있지만 칭할 만한 곳이 많은데 한녹사의 삽암이나 최문창의 쌍계 같은 곳이 그것이다. 신라 ‧ 고려 이래로 그윽한 곳을 찾는 무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 골짜기를 특별하게 뛰어난 곳으로 여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반드시 명옹이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그래서 이 땅과 선생의 조우遭遇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다만 대원암만 알고 장항동은 모르니 이 땅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땅의 행 ‧ 불행에 관하여 진실로 사무치는 감정이 있는 자이며, 또 선현이 이곳에 남긴 아름다운 향기가 사라져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에 기록한다.”
여기서 선생은 명옹이라 하였으니 남명 조식을 말하며 한녹사는 고려 때의 한유한韓惟漢을 말하는데 한유한은 벼슬을 마다하고 가족과 함께 지리산에 숨어들은 인물로 도교사상과 연관하여 둘레길 제13구간 하동군 악양면을 지나면서 이미 자세히 봤다.
이 반석과 관련하여 송정 하수일은 '유덕산장항동반석기'에서 “덕천서원에서 시내를 건너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자 장항동이 있었다. 위아래에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곧은 모습이 화살 같았다. 여기에서 작은 암자를 지나 동북쪽으로 수십 보를 걸어가니 네모지고 넓으며 평평한 반석이 있었다. 좌우에 물을 두르고 있었는데 패옥佩玉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예전에 남명이 소 옆구리처럼 생긴 지리산을 답파하면서 여기에서 시를 짓고 이곳을 사랑했다. 이런 까닭으로 제군이 사모하여 곧은 소나무를 보면서 그분의 기상을 우러렀고 패옥 같은 물소리를 들을 적에는 그분의 말씀을 상상했다.”고 적었다.
“남명의 소 옆구리 운운"은 남명 조식이 유두류록에서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과의 헤어짐 그리고 지리산에는 들었으나 자신의 뜻한 바를 일구어 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등을 표현한 말이다. 즉 남명의 "누렁 소 옆구리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가 바로 그 글귀다.
그렇다면 장항동獐項洞은 유평리 입구에서 유평리를 거쳐 새재마을에 이르는 유평계곡 전 구간을 장항동이라 부른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 팀원 중 '화대종주'를 하지 않은 대원이 '홀대장님' 한 분인 것 같습니다.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시는군요.
花代는 안다고 합니다.
즉석에서 화대종주 계획이 잡힙니다.
산수님이 일정을 잡아서 올리겠다고 하는군요.
제가 15시간 조금 더 걸렸으니까 그 정도로 잡으면 되겠죠.
참고로 화대종주 그 끝을 볼까요?
그렇게 산꾼들은 43.3km를 마무리하고 기념촬영을 하면 그 긴 거리를 걸었다는 고단함보다는 상상으로만 걷던 ‘화대종주’가 현실이 되었다는 만족감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버킷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였을 ’지리화대종주‘.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화대종주가 주는 만족감을. 그런데 이런 뿌듯함에 약간 초(?)를 치는 일이 남아 있다. 버스정류장까지는 2km를 더 걸어야 한다. 포장도로로 말이다. 이럴 때는 실컷 푸념을 하면서 걸어도 뭐라 그럴 사람 없다. 그러니 맘껏 불평불만을 털어놓자.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내가 앞으로 이 지리산 다시 오나봐라!”
좁게는 조개골.
넓게는 대원사계곡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 물이 덕천강이 되어 남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이 덕천지맥의 맥이 다하게 되겠죠.
덕천지맥의 그 거리가 54.5km나 되니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써리봉과 그 끝인 구곡산까지 여기서 볼 수가 있으니...
저 능선이 황금능선이죠?
산천재를 나와 원리교로 향한다. 좌측으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덕산 문화의 집’을 보면 그 뒤로 구곡산961m이 크게 보이고 그 우측 뒤로는 천왕봉이며 중봉이 연이어 보인다. 구곡산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줄기가 바로 구곡능선이라 불리던 황금능선이다.
치밭목 대피소를 당겨봅니다.
치밭목 대피소의 이력은 진주사람 민병태 부부와 함께 한다. 1971년 정부의 국립공원 산장 설치 계획의 일환으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가장 늦게 개발된 동쪽 코스에 있는 대피소이다. 이 부근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이홍이 등이 1963년 말이나 되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등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인산장으로 장기간 방치되던 이곳을 지킨 이가 바로 민병태 님으로 1986년부터 이 대피소를 보수하여 관리하였다. 최근 필자가 이곳을 들렀는데 최신식 건물로 개축되어 있었다. 혹시나 이곳도 노고단 대피소의 고 함태식 님 같이 민병태씨는 공단 직영의 미명하에 또 밀려난 것은 아닐까?
추성동 쪽 방향은 그저 이렇고.....
중간 능선이 아까 올라온 벽송사 능선.
와불산의 모습이 아까보다 못합니다.
새봉.
그윽하게 눈으로 진행할 방향을 그어봅니다.
우측으로 쭉 올라가는 능선이 덕천지맥으로 국골사거리로 오르게 되겠죠.
오늘은 매일 능선만 타는 분들을 위하여 하봉옛길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마암馬巖도 구경시켜 드리고 그런 다음 영랑대로 오르기로 하죠.
마암과 하봉옛길을 그려드리니 또 서두르시는군요.
내려가죠.
그런데 저 소나무는 바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오늘 행복들 하셨습니까?
내려와서는 독바위를 구경하고.....
09:30
허공다리골로 빠지는 길은 좀 조심하여야 할 곳이죠.
누군가 직진하는 지맥길은 오히려 진입금지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09:43
그러고는 쑥밭재입니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국골사거리로 진행하여 두류능선을 타고 천왕봉으로 오르거나 반대로 추성리로 하산할 수 있습니다.
지리산 덕천지맥에는 크게 다섯 개의 고개가 있습니다.
지리동부능선에는 이 밤머리재를 포함해 다섯 개의 고개가 있다. 쑥밭재(청이당고개), 새재, 외고개, 왕등재 등이 그것들이다. 비교적 능선까지 거리가 짧고 오르내리기 쉬워 이 고개들을 통해 남쪽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장德山場과 북쪽의 금서今西, 산청장山淸場의 문물이 활발하게 오갔을 것이다. 그뿐인가 덕산에 살던 남명도 덕계 오건을 만나러 오고가던 고개가 바로 이 밤머리재이다. 그렇게 한때는 지리산 동부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들이었는데, 무상한 세월 속에 이제는 길도 희미하고 잡초만 무성할 이 길들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덕천지맥을 싸고 있는 북쪽의 임천과 남강 그리고 남쪽의 덕천강 주위의 산군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문제는 이 쑥밭재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엉뚱한 곳에 표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도 어름터의 독가獨家로 갈 수 있는 길이긴 하지만 조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큰 관심 없이 장소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습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됩니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 > 쑥박재 > 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 수긍이 갑니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금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선생 설에 한 표를 던집니다.
이 쑥밭재에서 우틀하면 옛 두류암터를 지나 석상요 대장 묘도 볼 수있고 그러고는 독가에 이르게 되겠죠.
저희들은 좌틀합니다.
덕천강 상류의 이 물은 산꾼들에게는 아주 요긴한 물입니다.
대부분 여기서 요기를 하고 갑니다.
점필재 선생은 어땠을까요?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여기서 봉선封禪은 고대 제왕이 천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봉선의기는 봉선에 관한 의례를 기록한 글을 가리킨다. - 최석기 주석
진행은 직진을 하여 국골사거리로 진행하여 두류능선을 이용해도 되지만 지름길인 하봉 옛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지리 구석구석 다니시는 분.
11:09
그러고는 마암입니다.
마천이 '馬'자가 들어가는 동네이고 추성리에 '말달릴 평전'이나 이 '마암'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과 상당히 긴밀한관계에 있는 마을이었을 것입니다.
무론 '馬'거 高, 頭의 뜻도 있어 높다'라는 취지의 의미 가령 백두대간에 있는 마산이 높은 곳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여기는 그런 취지가 아닌 것 같다.
여기 마암이라고 쓴 각자도 있다고 하던데 탖지 못하여 함께 찾아보니,
사람 이름인 듯한 글도 보이고....
고남님이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바위가 마암인 것은 틀림없숩니다.
점필재가 이곳부터 영랑재에 이르는 곳은 된비알이라고 하듯 정말로 가파른 곳입니다.
자, 이제 우리도 올라가야죠.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그야말로 지리 제일의 조망터이다.
영랑대와 소년대는 하봉에 있는 바위봉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영랑대에서 소년대를 가자면 로프를 잡고 주의를 기울여 진행해야 한다. 하봉에서 초암능선을 내려서기도 한다는데 오금이 저려서 내려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중봉과 천왕봉이 지척이다. 주변을 조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 사실 이곳이다.
두류봉 삼거리에 접속합니다.
두류능선에 붙은 것이죠.
"여길 지날 때 이 우측으로 빠지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였던 곳인데...."
다람쥐 님이 지리태극종주를 할 때 신경을 많이 썼던 곳이라 합니다.
즉 우틀하면 바로 알바라고 생각했던 곳이라는 얘기죠.
조금 비알을 올라 드디어 영랑재입니다.
확실한 시료에 의한 얘기는 아니지만 원효대사가 화랑의 영랑출신이라 합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화엄사상을 바로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던 백제는 신라에 비해 워낙 수준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지금의 화성지맥(신산경표에서는 태행지맥) 부근에서 해골물을 마시고는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어쨌든 원효는 그때도 백제의 비자를 받지 않고 화성지맥으로 당항성(지금의 서신면 상안리)으로 갔듯 이번에도 무비자로 마천을 이용하여 영랑대를 지나 천왕봉(ㅣ때만해도 중봉, 하봉이라는 이름이 없었음)이 오른 후 지리 주릉을 경유 화엄사로 가서는 화엄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일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을 배운 의상이 돌아와 원효에게 자기가 배운 화엄사상을 자랑하려 하는데 이미 원효는 상당한 수준에 있는 바, 이유를 물어보니 위와 같은 얘기를 듣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의상도 같은 루트를 이용하여 화엄사에 가서 백제 승려들에게 화엄 사상을 토론하였다는 얘기인데.....
이런 일을 인연으로 의상은 이 화엄사에 장육전丈六殿을 세우게 된 것이죠.
[Daum백과] 화엄사, 각황전
국골....
그 좌측 줄기가 초암능선이니 그 너머에 칠선계곡이 있고 그 좌측 능선이 창암능선이니 그 우측으로 창암산이 높게 서 있습니다.
우측은 조금 이따 진행할 두류능선.
두류능선과 그 너머 임천 건너 임천지맥.
행복하십니까?
산수님과 홀가분님.
좌측 하봉의 소년대 그리고 중봉과 천왕봉.
천왕봉과 지리주릉.
영신봉과 춧대봉 가지고 많은 얘기 나눕니다.
반야봉.
그뿐인가! 저 반야는 불교적 의미 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반야봉은 흡사 여자의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젖무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일까. 남도 땅에서는 제일 큰 산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모양은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은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리산의 여신령은 자궁을 많이 지니고 있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가.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지리산 동계 대공세' 중에서
소갈비....
남명 조식 선생 시 한 수 읊습니다.
두류십파황우협 頭流十破黃牛脇 누렁 소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가수삼초한작거 嘉樹三巢寒鵲居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오늘은 그저 이렇지만,
얼마 전에는 이런 날 올랐습니다.
소년대에서 본 영랑대.
기념 촬영 한 번 하시죠.
치밭목 대피소.
아쉽지만 하산하려는데.....
덕유가 한눈에 들어오는군요.
그것도 머리만....
비둘기봉과 멀리 웅석봉.
반야....
13:04
시간을 물쓰듯 쓰고는 국골사거리로 내려옵니다.
진행방향의 영용봉을 바라보고....
13:35
영용봉은 사면치기로 지나고,
13:38
이런 암봉은 서너 개 지나는 걸로 기억이 되고....
14:04
석문을 그냥 통과하여야 하는데 여기서 좌틀하는 바람에 좀 돌고....
14:13
무난하게 하산 길 모드입니다.
낙엽때문에 상당히 힘이든다고 하소연들 하는데.....
난들 어쩝니까?
14:44
1072.8봉을 향하여 ㅈ니행하는데 좀처럼 고도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15:04
지난 번 새벽에 여길 지났더라도 기억이 나는 곳이군요.
15:13
성안 마을.
15:36
임도로 떨어져 우틀하여,
멀리 벽송사를 바라보면서 진행합니다.
바위 많은 암자도 지나고....
16:08
그러고는 추성리 주차장입니다.
오늘 시간 맞추느라 일부러 쉬고...먹으며 쉬고...떠들며 쉬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화대 한 번 하시죠.
첫댓글 지리의 산행기 너무 감동있게 읽고 갑니다.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자주 자주 다시 일러봐야 겠습니다.
수고 하셧습니다.
현오님 산행기 많이 기다렸는데 무지 반갑네요. 어제 친구들이랑 박산행하면서 현오님 산행기가 무척 그립다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심전심이었나 봅미다ㅋ 항상 응원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며칠전에 함양독바위와 와불산을
다녀 왔는데 산행 하느라 지나쳐
온걸 현오님의 후기글을 보고
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ㅎ
오늘또 많은걸 배우고 갑니다..
방대한 역사적 자료와 사진등으로 멋지게 설명하여 집에서도마치여행하는 듯 싶고 신비한 장소가 많아 가보고 싶은 코스입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