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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筆者)가 학창(學窓) 시절(時節)에 배운 내용(內容)에 따르면, 한때 중국(中國)은 청(淸)이었고 동국(東國)은 조선(朝鮮)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별개(別個)의 국가(國家)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結局), 청(淸)과 조선(朝鮮)에 대(對)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中國)이라는 명칭(名稱)은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以前)까지 특정(特定)한 ‘나라 이름’(國名)이 아니었습니다.
1912년 이후(以後) 대륙(大陸)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국명(國名) 또는 국호(國號)가 만들어졌고, 1946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은 공산당(共産黨)에 패배(敗北)하여 대만(臺灣; 타이완) 섬으로 밀려났습니다.
1949년부터는 대륙(大陸)에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라는 국명(國名) 또는 국호(國號)가 공식적(公式的)으로 탄생(誕生)하여 지금(只今)까지 사용(使用)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한국어)>에 따르면, 현재(現在) 중국(中國)은 두 개(個)의 정부(政府) 곧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과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나뉘어 다스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912년 이전(以前)의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이라는 명칭(名稱)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 것이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비교적(比較的) 빈번(頻繁)히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이라는 낱말들이 등장(登場)합니다.
‘中’(중)과 ‘東’(동)이라는 한자(漢字)가 쓰였으므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간 낱말이었을까요?
황제국(皇帝國)이든 제후국(諸侯國)이든 청(淸)과 조선(朝鮮)은 국명(國名) 또는 국호(國號)라고 보입니다. 특(特)히, 조선(朝鮮)은 근세(近世) 이성계(李成桂) 왕조(王朝)의 공식(公式) 국호(國號)이었습니다.
한편,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이라는 낱말은 분명(分明)히 공식적(公式的) 국명(國名) 또는 국호(國號)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 이름’(國名)은 아니고 ‘땅 이름’(地名)에 가깝습니다. 지리적(地理的) 개념(槪念)과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간 낱말들입니다. 이것들은 국명(國名) 또는 국호(國號)와 다른, 별개(別個)의 명칭(名稱) 곧 별칭(別稱)이었다고 보입니다.
동국(東國)을 동방(東方; 東邦)이라고도 합니다. 동방(東方)은 화하(華夏)와 대비(對比)되기도 합니다.
중국(中國)을 중토(中土), 중원(中原), 중방(中邦), 중주(中州)라고도 말합니다.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이라는 낱말에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지리적(地理的)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갔다면,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똑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分明)히 서로 다른 지역(地域) 또는 영역(領域)을 가리킵니다.
특(特)히, 똑같은 역사(歷史) 문헌(文獻)에 두 낱말이 함께 등장(登場)하여 대비(對比)되는 경우(境遇)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중국(中國)을 지리적(地理的) 방향(方向)의 기준(基準)으로 삼으면, 동(東)쪽 지역(地域)에 동국(東國)이 성립(成立)됩니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중국(中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있습니다.
만약(萬若) 중국(中國)을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로 본다면, 동국(東國)은 동(東)-아세아(亞細亞)로 비정(比定)할 수 있겠습니다.
동국(東國)은 각종(各種) 역사(歷史) 기록(記錄)에 나오는 낱말입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과 같이, 동국(東國)이라는 낱말이 제목(題目)에 들어간 책(冊)들도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국(東國)에 대비(對比)되는 서국(西國)이라는 실체(實體)가 각종(各種) 역사(歷史) 기록(記錄)에 있었을까요?
그 동국(東國)과 그 서국(西國)에 대비(對比)되는, 남국(南國)과 북국(北國)이라는 실체(實體) 또한 역사(歷史) 기록(記錄)에 있었을까요?
서국(西國)은 이른바 서역(西域)이었을까요?
말 그대로 동국(東國), 서국(西國), 남국(南國), 북국(北國)이 존재(存在)하였다고 가정(假定)하고, 그것들을 모두 합체(合體)하면 조선(朝鮮)의 사해(四海)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중국(中國)은 조선(朝鮮)의 중심(中心)이었으며, ‘천자(天子)의 땅’ 곧 신주(神州)이었을까요?
혹자(或者)는 대륙(大陸)의 조선(朝鮮)은 곧 동국(東國)이었고, 중국(中國)은 곧 대륙(大陸)의 조선(朝鮮)이었다고 주장(主張)합니다. 동국(東國)과 중국(中國) 모두 조선(朝鮮)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대륙(大陸) 조선(朝鮮)의 강역(疆域) 전체(全體)가 동국(東國)이므로, 결국(結局) 동국(東國)은 조선(朝鮮)의 중심(中心) 지역(地域)인 중국(中國)을 가운데에 포함(包含)한 최대(最大) 영역(領域)이 됩니다. 따라서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을 서로 대비(對比)할 때, 그 방위(方位) 개념(槪念)은 애매(曖昧)합니다.
지금부터는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간 낱말들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예(例)를 들어, 중국(中國) 또는 중원(中原)을 중심(中心)으로 만들어진 사이(四夷)라는 낱말은 지리적(地理的) 방향(方向)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동이(東夷), 서이(西夷), 남이(南夷), 북이(北夷)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낱말들에는 종족(種族)과 방위(方位)의 개념(槪念)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나라 이름’(國名)도 아니고 ‘땅 이름’(地名)도 아니라고 보입니다.
혹자(或者)는 강항(姜沆, 1567년~1618년)이 저술(著述)한 <간양록(看羊錄)>에 동왜(東倭)라는 낱말이 나오기 때문에 서왜(西倭)도 당연(當然)히 존재(存在)하였다고 주장(主張)합니다. 게다가, 그 서왜(西倭)를 서(西)-아세아(亞細亞) 지역(地域)에 비정(比定)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問題)는 동서(東西) 방향(方向)의 기준(基準)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간양록(看羊錄)>의 ‘적중봉소’(賊中封疏)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경서(京西)의 여러 왜(倭)가 이미 우리 나라(=朝鮮)에 와서 지치게 되자, 수길(秀吉; 豊臣 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토요토미 히데요시; 풍신 수길)은 또 경동(京東)의 여러 왜(倭)를 지치게 하고자 하여 동왜(東倭)의 병졸(兵卒)들을 산성주(山城州) 복견리(伏見里) 우치하(宇治河) 가에다가 모두 집합(集合)시키고, 왕경(王京)과의 10리쯤의 거리(距離)에 새로 성(城)을 쌓고 고산(高山)의 마루턱을 무너뜨려서 궁실(宮室)을 지었었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경서(京西)는 왜경(倭京)의 서(西)쪽 지역(地域)을 말하며, 경동(京東)은 왜경(倭京)의 동(東)쪽 지역(地域)을 가리킵니다. 또한 산성주(山城州) 복견리(伏見里) 우치하(宇治河)는 왜국(倭國)의 지명(地名)입니다.
따라서 경서(京西)의 왜(倭)는 곧 서왜(西倭)이고, 경동(京東)의 왜(倭)는 곧 동왜(東倭)입니다.
말 그대로 ‘적중봉소’(賊中封疏) 곧 강항(姜沆)이 3년 동안 왜국(倭國)에 억류(抑留)되었던 때에 조선(朝鮮) 선조(宣祖)에게 그가 보낸 문서(文書)이므로, <간양록(看羊錄)>의 동왜(東倭)는 왜국(倭國)의 왕경(王京)을 기준(基準)으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따라서, 그 방향(方向)의 기준(基準)은 중국(中國)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 동왜(東倭)라는 낱말이 등장(登場)하는 다른 기록(記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다음과 같은 윤안성(尹安性)의 시(詩)가 나옵니다.
“도감은 앉아서 온 배의 쌀을 얻었고 / 都監坐得全船米
만호는 와서 숙배하기를 다투네 / 萬戶來爭肅拜名
만약 이 말이 외국에 들리면 / 若使此言聞塞外
동왜와 북적이 저절로 평정되겠다 / 東倭北狄自然平”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동왜(東倭)는 북적(北狄)이라는 낱말과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동왜(東倭)가 북적(北狄)이라는 낱말과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동왜(東倭)는 동이(東夷)의 또 다른 별칭(別稱)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적(北狄)이라는 낱말은 중국(中國) 또는 중원(中原) 중심(中心)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에서 기원(起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例)를 들어, 동이(東夷)가 조선(朝鮮)을 침범(侵犯)하였다는 기록(記錄)은 동왜(東倭)가 그렇게 한 것으로 해석(解釋)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종(成宗) 5년(1474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근자에 하삼도(下三道)는 호표(虎豹)가 흥행하여 인물(人物)을 잡아 해치고 또 목장(牧場)의 말을 물어 죽여 그 수가 날로 줄어든다 하니, 심히 염려됩니다. 국가에서 소나무의 벌채(伐採)를 금지하는 범령이 매우 엄격하니, 이것을 인연하여 산림(山林)이 무성하고 울밀하여 호표(虎豹)가 은장(隱藏)함을 얻어서 여러 해를 번식하여 떼를 지어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만일 동왜(東倭)와 북적(北狄)이 우리 경계를 침범하여 노약(老弱) 2, 3구(口)를 노략질하여도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국위를 보이는데, 하물며 이러한 악한 범이 인물을 상해(傷害)하여 그침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옛적에 주공(周公)이 호표서상(虎豹犀象)을 몰아낸 것은 백성(百姓)의 해로움을 제거한 것입니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나오는 윤안성(尹安性)의 시(詩)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동왜(東倭)는 북적(北狄)이라는 낱말과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아래와 같은 윤소종(尹紹宗)의 시(詩)가 나옵니다.
“당말에 열린 이 나라가 명이 흥할 때에 이르러 / 唐季開國到明興
현릉께서 곰(아들을 얻을 꿈)꿈ㆍ뱀(딸을 얻을 꿈)꿈 못 꾸어 / 玄陵夢斷維熊虺
31대에 왕통이 끊어지고 / 三十一朝統中絶
신씨 2대를 만인이 분해하던 차 / 辛氏二世人憤悱
상공께서 강후와 양공의 충성을 일으키시어 / 公奮絳侯梁公忠
신손이 반정하여 임금 위에 오르시니 / 神孫反正御丹扆
하늘에 계신 열성들이 다시 제사를 받고 / 在天神聖復血食
혼돈이 거듭 열려 하늘의 해가 밝았네 / 混沌重開天日暐
어진 정치 새로 이루시니 바로 창업과 같고 / 訏謨更化同刱業
충성된 마음 광명하여 흐림이 없어라 / 赤心光明無晻霼
사전을 개혁하여 경계가 바루어지고 / 私田害革經界正
양식 풍족, 군사 증강, 봉록을 올리고 / 食豐兵雄增俸菲
서울이나 지방에나 학당을 설치하여 / 置學京坊盡鄕縣
교관을 뽑아 세우니 문교가 빛났네 / 選立師官文敎煒
서비ㆍ북비에도 모두 글 읽는 소리 / 西鄙北鄙絃歌聲
동왜ㆍ남만이 공물을 바치네 / 東倭南蠻琛厥篚
해륙의 운수가 40년에 다시 트여 / 漕斷陸輓四十年
어렴의 이가 통해 유민들이 모여들고 / 漁鹽利通來流鬼
전쟁에 시달렸던 연변 백성들도 / 萬戰四散沿邊民
고향에 돌아와서 폐허를 개간하고 / 咸還鄕墟墾荊葦
경연의 대유들을 조석으로 모셔서 / 經筵大儒侍朝夕
이제 삼왕을 부지런히 강설하네 / 二帝三王陳亹亹
성덕을 보양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니 / 輔養聖德日日新
주공 뒤에 이런 분 몇이 있었던고 / 周公之後曾有幾
서산연의를 동궁에 내놓고 / 西山衍義進東宮
명덕ㆍ신민을 자초지종 아뢰니 / 明德新民窮首尾
보ㆍ부[벼슬 이름 태보(太保)와 태부(太傅)]와 빈우들이 모두 기와 용[요순(堯舜) 때의 어진 신하]이니 / 保傅賓友盡夔龍
출입 기거에 어찌 소인을 친하랴 / 出入起居寧比匪
만세 대업을 공께서 여시니 / 萬世大平開自公
중흥의 정치를 하늘이 도우시네 / 中興致治實天棐
천자께서 갸륵히 여겨 특히 봉호내리시니 / 帝嘉匡復特勞賜
삼한 충의공 그 이름 빛날씨고 / 三韓忠義公有斐
배사공의 저택과 조보의 당도 / 裴司空第趙普堂
삼대 같은 거룩한 명주 못 모셨으나 / 未擧明主三代韙
상공께서 절하시고 낮을 점쳐서 만세수를 드리오니 / 公拜卜晝獻萬壽
공훈이 이ㆍ주와 함께 길이 크시나이다 / 宗勛永與伊周偉”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동왜(東倭)는 남만(南蠻)이라는 낱말과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나오는 윤안성(尹安性)의 시(詩)와 마찬가지로,
동왜(東倭)가 남만(南蠻)이라는 낱말과 함께 대비(對比)되는 것으로 보아서, 역시(亦是) 동왜(東倭)는 동이(東夷)의 또 다른 표현(表現)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만(南蠻)이라는 낱말도 중국(中國) 또는 중원(中原) 중심(中心)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에서 기원(起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질(性質)이나 성격(性格)이 같은 것끼리 서로 비교(比較)되어야 자연(自然)스럽기 때문에, “동왜(東倭)와 북적(北狄)” 그리고 “동왜(東倭)와 남만(南蠻)”이라는 표현(表現)이 나올 수 있다고 보입니다.
위에 인용(引用)된 윤소종(尹紹宗)의 시(詩)에서는 동왜(東倭)-남만(南蠻)과 더불어 서비(西鄙)-북비(北鄙)가 등장(登場)합니다.
여기서 서비(西鄙)-북비(北鄙)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한자(漢字)의 뜻으로 살펴보면, 조선(朝鮮)의 서(西)쪽과 북(北)쪽에 있었던 변방(邊方) 또는 변경(邊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비(西鄙)와 북비(北鄙)는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이 각각(各各) 활동(活動)하던 지역(地域)일까요?
또한 세조(世祖) 13년(1467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지금 남만(南蠻)이 친히 보고 길이 미담(美談)으로 삼으며, 북적(北狄)이 풍문(風聞)을 듣고서 기세(氣勢)를 다시 떨치지 못하며, 또 포로(捕虜)를 중국(中國; 中原)에 바치고 첩보(捷報)를 동왜(東倭)[동(東)쪽의 왜국(倭國)]에 고(告)하는 때를 당하여, 이에 악무(樂舞)를 정하여 교사(郊祀)와 종묘(宗廟)에 아뢰고, 종정(鍾鼎)에 새겨서 영구히 보이는데, 이것이 어찌 특히 한 시대의 위대한 공적(功績)일 뿐이겠습니까? 신(臣)의 직(職)이 사국(史局)에 있으니, 마땅히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성대한 공렬(功烈)을 기록해야 하겠으므로, 몸이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삼가 《평삭방송(平朔方頌)》 8편(篇)을 찬술(撰述)하여 바치니, 읽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今者南蠻親覩, 永爲美談; 北狄聞風, 氣不復振. 又當獻俘中原, 告捷東倭, 于以定樂舞而奏郊廟, 銘鍾鼎而詔永久, 此豈特一代之偉績也哉? 臣職忝史局, 當大書特書, 以紀茂烈, 不揆鄙拙, 謹撰《平朔方頌》八篇以獻, 伏惟垂覽.”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여기에서도 동왜(東倭)는 남만(南蠻) 및 북적(北狄)과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기록(記錄)에 나오는 동왜(東倭)에 관(關)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위에 일부(一部) 인용(引用)된 <난중잡록(亂中雜錄)>, <동문선(東文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동왜(東倭)의 방향(方向) 기준(基準)은 <간양록(看羊錄)>의 그것과 다르다고 보입니다.
동왜(東倭)라는 똑같은 낱말인데도 그 방향(方向)의 기준(基準)이 다르므로 100%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간양록(看羊錄)>의 ‘적중봉소’(賊中封疏)에 나오는 경서(京西)의 왜(倭) 곧 서왜(西倭)와 경동(京東)의 왜(倭) 곧 동왜(東倭)는 어디까지나 왜국(倭國) 안에서 왜경(倭京)을 중심(中心)으로 동서(東西)로 구분(區分)되는 명칭(名稱)에 불과(不過)합니다.
따라서 동왜(東倭)와 마찬가지로, 각종(各種) 역사(歷史) 기록(記錄)에서 서왜(西倭)라는 낱말 자체(自體)가 북적(北狄)이나 남만(南蠻)이라는 낱말과 함께 나오거나 대비(對比)된다면, “중국(中國)의 서(西)쪽 지역(地域)에 왜(倭)가 있었다”는 주장(主張)의 유력(有力)한 증거(證據)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서로(西虜)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서비(西鄙)와 서새(西塞)도 나오는데, 이것은 평안도(平安道)의 변지(邊地) 또는 변경(邊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서로(西虜)를 서왜(西倭)로 간주(看做)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남왜(南倭)에 관(關)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연산군(燕山君) 5년(1499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우리 나라(=朝鮮)의 방어(防禦)는 남왜(南倭)·북적(北狄)이 한 가지인데 경상도(慶尙道)에는 4대장, 전라도(全羅道)에는 3대장으로 모두 하루 이틀 거리 안에 포열(布列)되어 있으며, 함경도(咸鏡道) 역시 남·북도에 대장을 두어 수시(隨時) 응변(應變)하여 지금껏 유지하였는데 어찌 유독 이 도(=平安道)만이 불가(不可)하겠습니까. 신이 좌·우도 병사를 두어서 방어(防禦)하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어리석은 신의 망령된 의사만이 아니요 이것이 조종조의 옛 법이며 다른 도도 같은 바입니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남왜(南倭)는 북적(北狄)이라는 낱말과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퇴계집(退溪集)>, <만운집(晩雲集)>, <운학집(雲壑集)>, <중봉집(重峰集)>에서도 남왜(南倭)와 북적(北狄)은 함께 대비(對比)되어 나옵니다.
또한, 선조(宣祖) 30년(1597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우리 나라(=朝鮮)가 걱정하는 것은 남왜(南倭)와 북호(北胡)인데, 지난날 고려(高麗) 때의 윤관(尹瓘)이 변경(邊境)을 개척하여 드디어 북호(北胡)의 원망을 불러일으켰으나 본지(本地)만 침범하고 끝내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왜적(倭賊)은 경기(京畿)와 하삼도(下三道) 등을 유린하여 천리에 다시 인연(人烟)이 끊기게 한 적이 한두 번 뿐만이 아니니, 그 화는 북호(北胡)보다 훨씬 심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조총(鳥銃)까지 보태었으니 더욱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거침없이 횡행하여 평양(平壤)에까지 곧장 들이닥쳤으니, 북호(北胡)의 화는 비교한다면 사지(四肢)의 화이고 남왜(南倭)의 화는 심장부(心臟部)에 와 있는 것입니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남왜(南倭)는 북호(北胡)라는 낱말과 함께 나옵니다.
<월정집(月汀集)>, <청음집(淸陰集)>, <염헌집(恬軒集)>,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도 남왜(南倭)와 북호(北胡)는 함께 등장(登場)합니다.
<서애집(西厓集)>, <오봉집(五峯集)>, <선원유고(仙源遺稿)>, <서석집(瑞石集)>, <만정당집(晩靜堂集)>, <소재집(疎齋集)>, <죽천집(竹泉集)>, <번암집(樊巖集)>, <해좌집(海左集)>, <학송집(鶴松集)>에서는 남왜(南倭)와 북로(北虜)가 함께 나옵니다.
북호(北胡) 또는 북로(北虜)는 북적(北狄)과 같은 낱말이고, 곧 북이(北夷)에 해당(該當)됩니다.
특(特)히, <청음집(淸陰集)>에서는 남왜(南倭)와 함께 서로(西虜)가 나옵니다.
서로(西虜)는 서(西)쪽의 오랑캐인데, 곧 서이(西夷)에 해당(該當)됩니다.
서로(西虜), 서적(西賊), 서융(西戎), 서구(西寇), 서추(西醜)는 모두 같은 뜻의 낱말들입니다.
그리고 <한음문고(漢陰文稿)>에서는 남왜(南倭)가 북비(北鄙)라는 낱말과 함께 나옵니다. 여기서 북비(北鄙)는 북호(北胡), 북로(北虜), 북적(北狄)과 같은 뜻의 낱말일까요?
<입재유고(立齋遺稿)>에서는 남왜(南倭)가 동진(東眞), 동말(東靺), 북갈(北羯)이라는 낱말과 함께 나옵니다.
여기서 동진(東眞), 동말(東靺), 북갈(北羯)은 무엇일까요?
‘靺’(말)과 ‘羯’(갈)은 ‘오랑캐’라는 뜻인데, 이른바 ‘靺鞨’(말갈)에서 유래(由來)한 것일까요?
동진(東眞)의 ‘眞’(진)은 ‘女眞’(여진)의 ‘眞’(진)을 가리킬까요?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女眞’(여진)은 만주(滿洲) 동북(東北)쪽에 살던 퉁구스(Tungus; 通古斯) 계통(系統)의 종족(種族)이라고 합니다.
‘靺鞨’(말갈)과 ‘女眞’(여진)은 ‘肅愼’(숙신), ‘挹婁’(읍루), ‘勿吉’(물길)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남왜(南倭), 동진(東眞), 동말(東靺), 북갈(北羯)은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간 낱말들인데, 그 방향(方向)의 중심(中心) 또는 기준(基準)은 어디일까요?
이번에는 남왜(南倭)가 곧 남이(南夷)인지의 여부(與否)를 살펴보겠습니다.
중종(中宗) 9년(1514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우리 나라(=朝鮮)는 북적(北狄)과 남이(南夷)를 모두 화친(和親)하였습니다. 비록 계학(溪壑)의 욕심이라 다 좇을 수 없고 또 엄중히 다스리어 변란(變亂)이 일어나게 할 수도 없으나 마땅히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힘써 신칙하고 격려하여 우리 국세(國勢)를 당당하게 하여야지, 하찮은 것들이라 하여 가벼이 할 수 없습니다. 근래 남방(南方)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왜구(倭寇)를 경시하여 경계하지 아니함은 매우 잘못입니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그리고 중종(中宗) 10년(1515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지난번에 남방(南方)에서 왜란(倭亂)이 일어나게 될 형세(形勢)를 말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조정(朝廷)에서는 근심이 없다 하며 별로 조치를 하지 않다가 ‘경오년의 난’을 가져와서 성(城)이 함락되고 장수(將帥)가 살해되며 남방(南方) 사람들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남이(南夷)는 북적(北狄)만큼 막기가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북방(北方)의 식량(食糧)을 넉넉하게 하고, 병마(兵馬)를 넉넉하게 하는 계책(計策)이 지금의 급무(急務)인데, 번거롭게 의논(議論)만하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병식(兵食)과 말이 어떻게 넉넉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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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북적(北狄)과 남이(南夷)가 함께 나옵니다.
위에 인용(引用)된 내용(內容)에서, 남이(南夷)는 남방(南方)의 왜구(倭寇) 또는 왜적(倭賊)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남이(南夷)는 곧 남왜(南倭)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송천유집(松川遺集)>, <사암집(思菴集)>, <아계유고(鵝溪遺稿)>, <속잡록(續雜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봉집(重峰集)>, <수몽집(守夢集)>, <석루유고(石樓遺稿)>, <학호집(鶴湖集)>, <용주유고(龍洲遺稿)>, <고산유고(孤山遺稿)>, <죽천집(竹泉集)>, <면암집(勉菴集)>에서도 북적(北狄)과 남이(南夷)가 함께 대비(對比)되어 나옵니다.
이러한 내용(內容)은 <난중잡록(亂中雜錄)> 윤안성(尹安性)의 시(詩)와 성종(成宗) 5년(1474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동왜(東倭)가 북적(北狄)이라는 낱말과 함께 나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동왜(東倭)는 곧 동이(東夷)라고 해석(解釋)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남왜(南倭)=남이(南夷)”, “동왜(東倭)=동이(東夷)”라는 등식(等式)이 성립(成立)됩니다.
역사(歷史) 문헌(文獻)에 다수(多數) 등장(登場)하는 각종(各種) 명칭(名稱)들을 해석(解釋)할 경우에는, 다른 기록(記錄)들과 대조(對照)하면서, 그 기록자(記錄者)들이 당시(當時)에 본래(本來) 의도(意圖)하였던 취지(趣旨)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正確)히 파악(把握)하는 것이 필요(必要)합니다.
한자(漢字)로 구성(構成)된 낱말들은 특성상(特性上) 대부분(大部分) 간략(簡略)하기 때문에, 똑같은 표기(表記)인데도 불구(不拘)하고 그 의미(意味)나 뉘앙스(Nuance)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特)히,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方位) 개념(槪念)이 들어간 낱말들은 그 방향(方向)의 기준(基準)은 어디인지, 그 낱말들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使用)한 주체(主體)는 누구인지, 구체적(具體的)으로 무엇을 지칭(指稱)한 것인지 등(等)을 세밀(細密)하게 분석(分析)하는 것이 중요(重要)합니다.
다시 강조(强調)하지만,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또는 동이(東夷)-서이(西夷)-남이(南夷)-북이(北夷)라는 낱말들은 이른바 ‘중국’(中國) 또는 ‘중원’(中原)을 기준(基準)으로 만들어진 어휘(語彙)입니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오랑캐’(夷-戎-蠻-狄)의 정체(正體)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인(朝鮮人)들은 무슨 이유(理由)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낱말들을 각종(各種) 기록(記錄)에 사용(使用)하였을까요?
중국(中國) 중심(中心)의 동왜(東倭)와 남왜(南倭)는 기록(記錄)에 낱말 그대로 나타나는데, 중국(中國) 중심(中心)의 서왜(西倭)와 북왜(北倭)라는 낱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서로(西虜)-서융(西戎)과 북로(北虜)-북적(北狄)을 각각(各各) 중국(中國) 중심(中心)의 서왜(西倭)와 북왜(北倭)로 간주(看做)할 수 있을까요?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라는 낱말들은 시대(時代)를 불문(不問)하고 똑같은 대상(對象)을 가리켰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고유명사(固有名詞)가 아니었고, 시대(時代)에 따라 여러 장소(場所)에서 사용(使用)된 보통명사(普通名詞)이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方向)의 기준(基準) 또는 중심(中心)이 각종(各種) 기록(記錄)의 시대(時代)에 따라 각각(各各) 다른 것이었을까요?
역사상(歷史上) 한반도(韓半島)에서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낱말들이 사용(使用)되었을까요?
이러한 의문(疑問)들을 말끔히 해소(解消)하려면 더 넓고 더 깊은 조사(調査) 및 연구(硏究)가 필요(必要)하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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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최남석 선생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홍필님의 논리정연한 글은 많은 도움을 줍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운성 선생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여...동이가 동왜라...?...동이의 영역에 왜(倭)가 포함됀단 말은 들었어도...동이(東夷)가 곧 동왜(東倭)라 했단 사서 얘긴 전 못 들었습니다...귓꾸녕이 멕혀 따로..너절허니 여러 자료들 갔다 붙이는 구절들 빼고 간단허니...반론글 올리겠습니다.
홍진영 선생님, 제 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글을 꼼꼼히 숙독하셨습니까? 반론을 제기하셨으므로, 저도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충고의 말씀을 드리면, 본색을 드러낸다는 표현은 삼가하시길 바랍니다. 예전에도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무슨 나쁜 의도로 글을 올린다는 뉘앙스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수한 아마추어 연구자입니다.
역사 연구는 저의 취미 생활 중 하나입니다.
제 글에 나오는 인용 자료나 분석 논리에 문제가 있으면, 그 자체를 문제삼아 반론을 제기하시면 됩니다. 다른 이야기는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