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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었구나, 그거였구나- 32
권영심
무왕은 선화 공주를 어이 만났을꼬?-
한강토의 긴 역사 속에 백제가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 다. 기원전 18 년(?)에 나타나 660년 8월 29일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강토의 삼국을 이루었습니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있었으나 모두 흡수되고 병합되어 삼국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추모대왕의 아들인 유리로 인해 고구려를 포기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합니다. 오늘날의 인천의 근간입니다.
비류가 죽자 그 신하들과 백성들이 위례로 옮겨오니 비로소 백제국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마한 54개 연맹체 중의 하나 였으나 4세기 중엽 근초고왕때 마한 전체를 통일 .
성왕 16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겨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완전한 전제군주화를 이루었으며, 장자로 왕권이 이어지는 것이 확립이 되었습니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그 태어남이 불분명해서 법왕의 아들이 라고도 하고, 위덕왕의 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성은 부여씨,아 명은 서동. 왕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알수없으나 오직 하나 알려 진 것이 있으니 삼국유사 제 2편 기이편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라 진평왕의 셋 째 따님인 선화공주의 미모가 삼국에 널리 퍼지자, 서동이었던 무왕은 신라로 건너가 마장수 행색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주며 자기가 지은 노래를 가르치는데, 그 내용이 미혼의 공주에게는 치명적 이었습니다.
"선화 공주는 남모르는 짝이 있다네.
밤마다 서동 서방의 품에 안겨 잠을 잔다네."
노래는 온 서라벌에 퍼져 나갔고 마침내 공주는 궁궐을 쫒겨 나갑니다. 시비 하나와 울며 길을 가는 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고, 이윽고 마음과 정이 통한 두 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왕과 왕비 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무왕의 정비는 백제의 대귀족인 사택씨였고, 그것은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서탑 해체중에 발견된 금동 사리 함의 명문에도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은 허구일까요? 그 시대에 두 명의 왕비를 두는 것은 보통이었고, 아마 선화공주는 진평왕에 의해 정략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삼국 시대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남녀 교제가 자유로웠고 미혼으로 사생아를 낳아 기르는 일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지위 또한 대단했었고 신분은 모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모가 신분이 비천하면 왕이 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그런 일이 있었다 해서 쫒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정략 결혼을 은폐하려는 모종의 계략이 있었음직 합니다.
왕권 강화에 힘썼고 대규모 역사를 단행, 630년 사비궁을 중수 하고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을 가졌던 무왕의 꿈은 오늘날 왕궁리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와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과 부소산 성, 부여의 관북 리 유적과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등 8개의 유적군이 2015년 7월 8일, 유네 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습 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바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들이지 요. 사택씨의 자손의 흔적은 역사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무왕과 선화 공주는 굉장히 금실이 좋은 부부였으리라 짐작되어 집니다.
그러니 서동요와 함께 러브스토리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 것이겠지요. 화려하고 우아했던 신라 문화에 반해, 백제 문화는 유려, 섬세했으며 소박하면서도 단아했음을 지금의 시각으로도 알수 있습니다.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신라에 비해 왕궁리의 유물은 얼마되지 않으나, 불교의 권위가 잘 나타나 있는 사비도성의 도시 계획이며 미륵사지를 보면서 사라진 왕국 백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문화 기행의 일환으로 왕궁리 유적을 세 번 돌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인간의 자취는 간 곳 없으나 그래도 남아있는 무엇은 후인의 심금을 울립니다.
무왕과 선화 공주가 어찌 만나 부부가 되었을까도 생각해 보니 참 애틋했습니다. 정략 결혼이든 아니든 두 사람의 사랑이 남달랐기에 긴 세월 동안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게 된 것이겠지요.
실제는 알수없으나 그 사랑이 대단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도 인정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익산은 또한 보석의 도시 이니 그 시대에도 그랬을까요? 온갖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했 을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은 어떠했을지, 보석 박물관을 둘러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