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정희 철학을 잠시 접어두고 박정희와 전두화의 관계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내일이 5.18광주항쟁이 일어난지 26년째 되는 날이잖아요..
당시 항쟁의 역사적 배경을 되짚어보는 의미에서 마련한 쉬어가는 페이지입니다..
전두환하면 하나회를 빼놓을 수 없죠.
그래서 하나회를 결성하게 된 배경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죠.
5.16이후 4년간 일곱차례에 걸쳐 반혁명 유형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군대관리에 사활을 걸게 됩니다.
많은 자금을 동원했으며 실력자들을 상호 견제시키는 충성경쟁을 벌이게 만듭니다.
5.16의 중심세력이었던 육사 5기를 육사 8로 제압했으며 육사 8기가 다시 비대해지자 견제책으로 육사 11기의 영남인맥을 동원하기 위해 하나회를 조직하게 합니다.
1972년 5월 보안사령과 강창성에게 만일 군대 내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게 된다면 어느 기관의 어떤 인물이 주축이 될 수 있는지 그 순서와 이유를 연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당시 박정희가 키운 육사 8기의 선두주자는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이었습니다.
설날 육군 대장이 소장인 윤필용의 집으로 찾아와 세배를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다소 엇갈린 주장이 있습니다. 윤필용의 평가는 주로 박정희 때 나온 것으로 그는 패배자여서 다소 폄하당하는 쪽으로 체택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윤필용은 박정희에게 제법 입바른 소리를 한 인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아무튼 군대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윤필용을 박정희가 겁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적인 예로 춘천에서 육사 8기생들과 술자리 회합을 가진 자리에서 박정희는 “너희들이 윤필용이 동기생들이구먼.……겁나는 것은 김대중이 아니야. 윤필용이가 겁나.”하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안사가 주축이 되어 윤필용의 제거 작업에 들어갑니다.
사건의 내용은 윤필용이 측근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물러나야 하고 후임자를 물색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겁니다. 이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의 정권 승계 발언까지 더해지면서 사건이 확대됩니다.
1973년 3월 윤필용은 같은 동기인 보안사령관 강창성에게 고문을 받고 구속당합니다.
"윤필용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윤필용이 부정부패와 월권행위로 얼룩진 비리군인이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윤필용의 술자리 이야기는 빠지고 추상적인 단어로 판결문이 채워졌으며 총 31명의 장교가 군대에서 쫓겨납니다. 결국 15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던 윤필용은 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에는 알려지지 않는 또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바로 전두환이죠.
5.16때 대위였던 전두환이 육사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데모를 벌인 것을 높이 평가한 박정희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의 영남출신 장교를 의도적으로 키웁니다.
1963년 2월18일 최고회의 의장 신분이었던 박정희가 민정 불참을 선언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육사 11기생들이 원대복귀를 만류하기 위해 의장 공관으로 박정희를 찾아갑니다.
이때 박정희가 자신을 도와 달라면서 사실상의 사조직 결성을 지시합니다.
이후 1973년 1월 전두환이 장군으로 진급하자 박정희가 직접 축하 파티를 열어주고 고급 승용차까지 선물로 줍니다. 이런 총애는 박정희의 양아들이란 소문과 함께 또하나의 권력으로 되어갑니다.
그럼 육사 11기는 어떤 존재들이었는지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죠.
육사 10기가 임관할 무렵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갑종간부학교 출신들까지 합해도 초급장교가 부족하자-당시 최전방 지휘관이었던 육사 8기의 젊은 장교 사망율이 40%를 넘었음- 일시적으로 육사를 폐지하고 속성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종합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래서 1950년 10월부터 10개월 동안 7천여명의 육군소위가 배출됩니다. 그후 1951년 10월 육사가 진해에서 다시 개교해서 4년제 정규 학생인 11기를 배출하기까지 10기생과 5년의 격차가 있었고 그 공백을 육군종합학교 출신들이 대신 합니다.
하지만 11기생들은 종합학교 출신들을 단기 교육생이라고 깔봤으며 종합학교 출신들은 11기생들이 실전 경험이 없는 허깨비라고 상호비방을 하는 등 갈등의 요소가 많았습니다. 또 11기부터 13기까지 진해와 부산에서 교육이 실시된 관계로 영남 출신이 많이 입교를 합니다. 이것은 훗날 한국 역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요소로 자리를 잡습니다,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죠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전두환은 1964년 하나회를 조직합니다.
하나로 뭉치고 단결한다는 것과 대통령을 위하고 조국을 위한 하나의 마음이란 뜻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하나회는 정규 육사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전두환이 장악하는데 돕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대구공고 출신이어서 학연이 약했고 축구 외에는 잘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북극성회에서 리더십을 발휘 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먼저 공략해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기로 하고 각 기수별로 회원을 뽑았습니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윤필용이 하나회의 대부역할을 합니다. 즉 박정희가 나설 수 없었으므로 당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윤필용이 대신 박정희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당시 북극성회는 우등생을 중심으로 한 청죽회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생도시절부터 동기 선 후배간 모범생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경기도나 이북 출신들이 많았고 근무지도 서울이었습니다. 반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중하위권 성적으로 영남 출신이었으며 근무지는 주로 야전이었습니다.
이후 박정희의 하나회 우대 정책에 밀려 청죽회는 사라져 버립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군대 내의 인사 적체는 1970년대 초반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정규 육사 출신이 의무 복부기간인 5년을 채우고 장기 복무에 들어갈 경우 매 기수별 절반 정도만이 상위 계급으로 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회 회원들은 진급과 보직의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군대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단결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되어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던 보안사령부에서 무리수를 둡니다.
윤필용 사건이 마무리되자마자 그 배후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보안사령관 강창성을 별다른 이유없이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시켜버립니다.
박정희는 집권당시 끊임없이 쿠테타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군대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으며 하나의 권력을 키우지 않고 반드시 견제 세력을 만들어 충성 경쟁을 유도했으며 군대를 떠난 후에도 국가 기관이나 국영 기업체 간부, 유정회 회원 등으로 일하게 하면서 친위 근위병 노릇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윤필용 사건은 또하나의 견제세력인 하나회를 키우기 위한 견제책이었던 것입니다. 즉 박정희는 육사 8기를 제거하고 11기를 전면에 부각시키기위해 윤필용 사건을 만들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육사 8기를 제거 합니다.
역사에서 만일이란 부질없는 짓거리이지만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다면 11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0.26이 일어나고 박정희의 보호가 없어지자 군에서는 제일 먼저 하나회 제거 작업을 실시합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의 지시로 하나회 장교의 분산 배치 대책이 논의되고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전두환의 보직 변경을 건의합니다.
당시 육군은 육사 8기, 9기, 10기, 종합학교 출신의 선임자, 11기가 소장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기에서 밀릴 경우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었습니다.
그래서 영관급 장교중 육사 17기-당시 대한민국 육군 연대장의 50%를 차지-의 하나회 세력이 11기를 뒷받침하면서 12.12사태라는 군부 쿠테타를 일으키고 그 이듬해 5월 광주 학살이라는 비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첫댓글 박정희와 전두환을 아는데 좋은 자료가 되겠네요...붉은노을님 말씀마따나 박정희와 전두환은 태어난 그 자체가 불법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건간,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