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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1독서 : 1요한 5,5-13
복 음 : 루카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노만 쿠신’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병은 뼈를 감싸고 있는 인대에 염증이 생겨서 심해지면 인대가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으로,
점차 내장기관까지 굳어져서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고통 속에서 오래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이 사람의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커다란 좌절에 빠졌고 모든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연히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실컷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가 끝나고 난 뒤에 몸이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 매일 코미디를 즐겨 보면서 적극적으로 웃었습니다.
그 결과 이 불치병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미있는 소리는 육신의 병을 고치고 인간의 정신을 치료한다.”
저 역시 반백 년 이상의 삶을 살면서 깨달은 작은 것이 하나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은 늘 슬프고, 기뻐하는 사람은 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말입니다. 슬픈 사람은 슬픈 이유를, 기쁜 사람은 기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요즘 특히 건강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렇다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고쳐 주기 위해 나병 환자에 손을 대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정결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고
여전히 깨끗하신 상태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병에도 더러워지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나병 환자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같은 마음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될 수 없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은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긍정적인 방향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긍정의 이유만을 찾으십시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하고,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보다 더 앞세우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우리 주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8년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지낼 때입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시돌 피정의 집이 있었습니다.
피정의 집에는 ‘삼뫼소’라는 아담한 호수가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호수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이 호수에 그림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밤에는 하늘의 구름과 달이 호수에 내려왔습니다.
호수의 물이 바람에 출렁거리면 주변의 모습은 호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름과 달도 호수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호수가 잔잔할 때는 그렇게 주변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람이 마음에 불면 이웃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불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바람이 불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음은 차갑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거울은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비추어줍니다.
거울은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울 같은 사람은 비춰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춰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성모님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2021년에는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여름까지 머물 거라고 합니다.
신문의 홍보도 아직은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성지순례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겨울의 끝에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나오듯이,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듯이 희망이 빛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밴쿠버 성 김대건 성당에서 신문 구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림특강을 온라인으로 함께 했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질의 응답시간이 있었고, 신문을 홍보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강의나 피정 후에 신문을 홍보하는 것도 새로운 방법입니다.
LA 지역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하겠다는 모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비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진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좋은 지면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진주와 과자를 주면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맛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양보, 인내, 친절, 겸손, 나눔, 봉사’를 택하라고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들고, 어렵고,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것들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 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두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이
깨끗하게 되는 삶이다.
참된 치유는
주님과의
참된
관계회복에 있다.
참된
관계회복이란
참된 사랑에 있다.
언제나
사랑의 관계 안에
참된 길이 있다.
주님께
나의 아픔과
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픔 속에 치유가 있다.
나의 아픔까지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관계가
건강한 만남이다.
건강한 만남은
서로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생명이 있기에
그에 따르는 치유도 있다.
치유가 있기에
좋은 성장도 있다.
치유를 통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치유이며
깨끗한 정화이다.
우리 모두는 아픔을 딛고
치유와 성장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존재들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의 아픔을
딛고 성장한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 사랑이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하신다.
사랑을 믿기에
살아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랑이 있기에
소중하고
멋진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개의 자유, 늑대의 자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줍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리고 당신도 좀처럼 자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처럼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몰려듦에도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뜻에 나를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율법에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나병이 나으면 율법에 매이게 됩니다.
무엇이 더 자유일까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더 자유 아닐까요?
사실 사람은 나병에 걸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던지, 율법에 매여 나병으로부터 자유롭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몹시 굶주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늑대가 어느 날 숲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고
살이 토실토실한 개를 만났습니다.
늑대: 넌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개: 나랑 같이 가자.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를 좀 봐.
너무 볼품없고 비참해. 그렇게 있다간 굶어 죽고 말 거야.
늑대: 널 따라가면 난 뭘 해야 하는데?
개: 별거 없어. 가끔 사냥도 나가고, 집에서는 주인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주인이 귀여워해 주고 맛있는 음식도 갖다 주지.
늑대: (기쁜 마음으로 개를 따라가다 문득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보며) 그게 뭐야?
개: 이거? 아, 주인이 있다는 뜻의 목걸이야.
늑대: 목걸이! 그럼 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니?
개: 늘 그런 건 아냐. 가끔은 주인이 끄는 대로 가야 해.
대신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늑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자유가 무척 중요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을 준다고 해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바꿀 수 없어.
여러분은 개와 늑대 중에 어떤 것이 더 자유롭게 보이나요?
좀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자유로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는 늑대의 삶이 더 좋아 보이나요,
아니면 그런 것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주인의 목줄을 걸고 다니는 개가 더 좋아 보이나요?
사실 늑대라고 목줄이 없을까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그 나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약해 보이면 안 되고 내가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나의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늑대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나병 환자입니다.
몸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있어 부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개는 배고픔의 욕망을 좇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밥을 주시는 분에게는 순종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 국정농단과 관련하여 삼성 이재용 회장이 법정에서 울먹였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아버지보다 나은 삼성을 만들겠다며 선처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아도 이렇게 마음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진정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법을 지켰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사람은 반드시 어떤 법에는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라 여깁니다.
국정농단 때 이재용 회장은 왜 뇌물을 바쳐야만 했을까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만약 살을 빼야겠다고 결정하면 살이 빠질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자신 안에
그와 반대되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먹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 욕구는 배고플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음식을 더 먹게 만듭니다.
인간은 이렇듯 욕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병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면
차라리 목줄을 채우고라도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목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이 목줄을 채우면 세상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1837년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던 링컨은
정부에서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에게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아마 링컨이 권력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명예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1860년, 링컨은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루었고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마침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흑인 중 어떤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