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자소(自笑)(내 자신이 우수워서)(쉴 때는 쉬어야)
病裏園碁如不炳(병리원기여불병) 병중에 바둑을 두니, 아픈 사람 맞나 싶고
閑中覓句亦無閑(한중멱구역무한) 한가할 때도 시구를 찾느라 한가롭지 않네
求閑養病都無用(구한양병도무용) 한가로움 찾고 요양하는 것, 다 소용없으니
嬴被旁人拍手看(영피방인박수간) 한껏 사람들의 웃음거리 되었다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사가집四佳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권경열님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저명한 문장가였던 사가四佳 서거정의 시다.
그는 20년 이상을 대제학으로 지냈는데, 외교 문서 등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기술하는 문장 모두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장가로서 많은 일들을 담당하였다.
게다가 행정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우리나라 문장을 집대성한 ‘동문선’,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역사서인 ‘동국통감’ 등 방대한 양의 문헌들이 모두 그의 주도하에 편찬되고 완성되었다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으로 오는 사신들은 일부러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 선발하였는데,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도 문화 수준을 과시하기 위해 문장에 능한 신하들을 선발하여 그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게 하였는데, 그 선봉에 서서 명나라 사신들이 혀를 내두르게 한 이가 서거정이다.
그렇다 보니 그에게는 한가로울 틈이 없었다. 병이 나거나 특별히 휴가를 얻었을 경우에만 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막상 병이 들어서 요양해야 할 때에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바둑을 둔다. 치열하게 수를 계산하다 보면 병들기 전 일처리로 골몰할 때나 다를 것이 없다. 휴가를 내어 한가롭게 쉬려다가도 시상을 떠올리느라 머리와 마음을 혹사시킨다. 평소에 그처럼 갈망했던 휴식이 주어졌는데도, 의도했던 대로 지내지 못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우연히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시인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짓는다.
시를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과연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가까이에 있는데, 우리가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과연 제대로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누구나 한가로운 삶을 갈구하지만 정작 한가로워졌을 때, 그 한가로움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한 번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한가로움에 당황하기 일쑤다. 그만큼 평소에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잘 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 번갈아 가며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나고, 신록이 싱그럽게 우거지고, 단풍이 곱게 물들고,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다. 가볍게 오를 만한 명산들도 도심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얼마든지 있다. 한가로움을 즐기는 연습도 해 볼 겸 가볍게 가까운 교외로라도 나가 보는 건 어떨까?.”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시호 문충(文忠)]-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嬴(영) : 찰 영, 1.차다, 가득하다, 2.지다, 짊어지다, 3. 남다,여유가 있다.
*旁(방) : 곁 방, 달릴 팽, 1.(곁 방), 2.곁, 옆, 3.널리, 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