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놀이
정원선
정수기 놀이를 시작하면서
점, 선, 면에 대해 생각한다
이들 간의 거리에는 아나키스트의 정신이 배어 있다
부르는데 목청이 쉬면 곤란하다고 치고
무의미를 무작위라고 여기자
한편에선 의미를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천천히 공룡과 돌도끼가 사라진 백지를 놓고
정수기 놀이를 시작한다
무의미를 반쯤 따른다
그 위에 의미를 따른다
적절히 섞이면 건초가 된다
컵에 따라 마시면 잡초가 된다
물처럼 무의미와 의미를 섞어 마시면 오줌이 마렵다
오줌은 장난꾸러기
오줌발은 보수주의자
정수기 위에 걸린 구름은 비만이다
컵에 숨은 먼지는 미혼모
갑자기 장난꾸러기는 흙탕물이 먹고 싶어진다
미꾸라지가 정수기 주머니 속으로 도망친다
요즘 유행하는 의미는 풍선껌
무의미는 포도주
풍선껌으로 만든 무덤과 포도주로 빚은 소녀상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만나는 소우주가 반갑다
물소리는 무중력을 준비한다
정수기 중턱에서 피가 나온다
더운 피와 차가운 피가 아니라
더러운 피와 좋은 피로 나뉜다
선택은 파란불
컵에 따라 마시면 빨간불로 변한다
오랜만에 만난 소우주는
혼자서도 잘 노는 컵의 혈액형을 따진다
정수기 의식은 파도소리고
무의식은 불꽃놀이다
정수기 놀이를 시작하면서
너울, 불꽃, 음란에 대해 생각한다
이들 간의 거리에서 견자의 혼란이 오고 가는 것이다.
⸺계간 《시와 반시》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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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선 / 1971년 광주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9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