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日依山盡(백일의산진)-해가 뉘엿뉘엿 산에 걸리고
黃河入海流(황하입해류)-황하가 바다로 흘러가네.
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천 리의 먼 곳을 보려면 누각을 한 층 더 올라가야지
更上一層樓(경상일층루)-낮은 곳에 있으면 멀리 바라볼 수 없다.
왕지환(王之渙)
붓글씨나 글을 쓸 줄은 몰라도 읽고 보는 즐거움은 있다
필자는 나이에 비하여 컴퓨터를 일찍 배웠다.
1980년대 말경에 배웠다.
그때는 PC(personal computer)가 MS-DOS(Microsoft-Disk Operating System)
의 운영체제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마우스(mouse)도 없었고, 단축키(shortcut key)도 없었다.
컴퓨터 언어(言語)라는 코볼(COBOL-common business oriented language),
포트란(FORTRAN-formula translator), C언어(C language)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잊어 버려 기억이 안 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 언어들을 많이 알아야 컴퓨터를 잘 사용할 수 있었다.
컴퓨터 학원을 다녀서 배운 것이 아니고 당시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로부터 배웠다.
아들들에게 배우면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책을 읽고 난 후 독후감이나 아내의 병상일기를 노트에 볼펜으로 써왔는데
컴퓨터 자판으로 “아래아 한글”을 입력하니 딴 세상 같았다.
잘못 쓴 것을 고치기도 쉬워 가히 혁명적인 기록 변화를 가져 왔다.
이 “아래아 한글”이 1989년 한글과컴퓨터(주) 설립자인 이찬진(李燦振)씨가 개발한
것이다. 탤런트 김히애씨와 결혼한 사람이다.
1964년대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과학입국(科學立國)에 온 국력을 결집하자는 국민운동을 외칠 때였다.
1962년 한국최초의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를 만든 한양대학교
고(故) 이만영(李晩榮1924~2013)박사가 “한국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면서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한양대 학생들과 청계천변 노점 고물상을 이 잡듯이 뒤졌다는
이야기는 한국 컴퓨터 발전사의 전설이 되었다.
이런 인고(忍苦)의 컴퓨터 발전사 속에서 오늘날 정보통신의 총아(寵兒)로 등장한
모바일(mobile) 스마트폰(smartphone)과 태블릿(tablet)PC 등
웨어러블 컴퓨터(wearable computer)로 발전되어 왔다.
컴퓨터를 배우면서 포트샵, 엑셀, 파워포인트, 오토 캐드, 플래쉬, 동영상등
다양한 기능을 많이 공부하고 사용했는데 지금은 기능들을 사용을 안 하니
거의 잊어 버렸다.
그중 하나가 “카페(cafe). 블로그(blog)”다.
웹사이트(web site) 인터넷카페(internet cafe)가 많이 유행할 때 나도 카페(cafe)를
공부하기 위해 만든 것이 지금까지 11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때 어떤 컴퓨터 전문가가 충고하기를 “컴퓨터를 잘 사용하려면” 컴퓨터와
친구가 되고 문서를 많이 입력하면서 폴더(folder) 파일(file) 정리를 잘하고 기능을
꾸준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그 카페 운영을 공부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글도 써 올리면서 컴퓨터와
친구가 되기를 노력하여 온 것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웹로그(Weblog) 의 환경을 보면,
데스크톱(desktop) 컴퓨터는 모바일(mobile)에 밀려
컴퓨터OS(operating system운영체제)나 응용프로그램(application program)은
전혀 발전이 안 되고 오히려 답보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OS가 모바일(mobile)에 옮겨지고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컴퓨터 배운 이야기를 하다가 두서없이 컴퓨터 발전 과정 쪽으로 잠깐 이야기가
빗나갔다.
아무튼 11년 동안을 카페를 배우기 위해 글과 사진들을 열심히 올렸고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나는 문학도(文學徒)도 아니고 서예가도 아니다.
붓글씨도 고교시절에 약 4년간 오체(五體)를 배우지 못하고 붓잡는 흉내만 내는
정도다.
그 정도 붓글씨라도 글씨를 쓰고 스캔을 하고 포토샵을 거쳐 카페에 올리는 과정이 공부다.
글을 쓰는 것도 원체 문학에 대한 바탕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글로
옮기기가 매우 어렵지만 카페 공부를 잊지 않기 위해 “쥐나 개나”글을 써 올리고 있다. 내가 쓴 글을 되돌아가서 읽어 보아도 참 부끄럽고 앞뒤도 안 맞는 글이 많고
무슨 글을 썼는지 주제(主題)가 뚜렷하지 못한 것도 많다.
만만한 것이 독서로서 얻은 동서양 고전을 인용하고 중국의 명시(名詩)와
우리나라 명현(名賢)들의 한시(漢詩)를 소개하는 것이 그나마 부족한 부분을 감춰주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카페에 계속 글을 쓰는 것은 컴퓨터 창(Computer Windows)이
나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친구는 “말이 통하는 친구”다.
술친구나 잡담 친구는 만나기 쉬워도 차 한 잔 마시며 끝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친구는 쉽지 않다.
“컴퓨터의 창(窓)”과는 나의 일방적인 말 뿐이지만 하고 싶은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상대보다는 훨씬 좋은 친구다.
또 한 가지는 나의 친구 몇 사람이 카페 글을 읽어 보고 “참 재미있다”고
칭찬을 해 주는 것이 초등학생처럼 큰 용기가 되었다.
칭찬이 회초리인줄을 알면서도 주책없는 내 자신이 글 쓰는 욕심을 내게 한다.
사실 카페에 글을 쓰는 것은 “글이라기보다” 치매 예방하는 뇌(腦) 운동이라는
목적이 크다.
사실 이런 영양가 없는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메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거나 붓글씨는 신통치 않아도
책을 읽는 것, 명필들의 붓글씨나 역사 유적지의 문화재를 보고 즐기는
맛에 더 관심이 크다.
시쳇말로 웃기는 것은 전문적인 글 쓰는 사람도 아니면서 남의 글을 읽고
내가 쓴 글에 불만족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혼자서도 입맛을 다실 때가 있다.
며칠 전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힘들 때 쉬면서 읽을 책을 한권 가지고 갔다.
“한국문학전집” 평론(評論)과 수필(隨筆) 집인데 책이 오래되어
책장이 삭을 정도다.
계용묵(桂鎔黙1904~1961)의 수필(隨筆) “효조(曉鳥)”를 읽었는데
내용 중에서 “그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래에 요약하여
내용을 소개한다.
*효조(曉鳥)-아침에 일찍 지저귀는 새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선생 눌인(訥人) 조광진(曹匡振)이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니. 잠자리에서 갓 깨어 일어난 참새들이 뜰 앞 나뭇가지에서
재재거리는 소리에 그만 붓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筆興)
먹을 갈고 붓을 들어(筆墨) 새벽 새라는 뜻인 “효조(曉鳥)” 두자를 제물에 써 버렸다.
※참고 조광진(曺匡振)은
조선후기 3대 서예가의 한사람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이다.
조광진(曺匡振)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고,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명필 신위(申緯)와 김정희(金正喜)가 크게 추천하였는데,
김정희는 조광진(曺匡振) 글씨를 평하기를
蒼雅奇拔(창아기발)-우아하여 뛰어나게 빼어나고
怪偉挺特(괴위정특)-기이하면서 훌륭하고 특출하니
압록강 동쪽에 일찍이 없었다.고 하였다.
계용묵(桂鎔黙)은 조광진(曺匡振)을 추사의 선생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오히려 추사 서체(書體) 문하(門下)의 한사람이다.
이렇게 흥(興)에 겨워 쓰면 언제나 만족(滿足)한 글씨를 얻게 된다.
그런데 흥(興)에 겨워 쓰기는 썼는데도 “효조(曉鳥)”라는 “조(鳥)”자의 맨 넉점을
싸는 취팀이 제대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아래로 축 처져서 심히 마음에 거슬리었다.
그래 다시는 더 거들떠보기도 싫어 문갑(文匣) 밑에다가 되는 대로 밀어 던지고
말았다. 그랬던 것을 하루는 어떤 손님이 찾아와서 글씨를 청하므로 다시
글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것(曉鳥)을 그대로 내어 주고 말았다.
그런지 10년후 조광진(曹匡振)이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귀족의 사랑에서
뜻도 않았던 그 “효조(曉鳥)”의 조(鳥)자 취팀이 처지어 내버리는 셈 치고
그 손님에게 내어 주었던 그 글씨가 중국에서도 유명한 귀족(貴族)의 사랑에
족자로 걸려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조광진(曹匡振)은 그 조(鳥)자의 취팀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거슬리어
주인이 잠간 밖으로 나간 짬을 타서 필묵(筆墨)을 꺼내어 조(鳥)자의 취팀에
가획(加劃)을 하여 처진 취팀을 바싹 올려붙여 놓았다.
그랬더니 주인이 들어와 이것을 보고 남의 귀한 글씨에다가 손질을 해서 버려 놓았다고 꾸짖으며 노(怒)했더라는 것이다. 그래 조광진(曹匡振)의 말이 실인즉 그것이 자기의 글씨인데 조(鳥)자의 취팀이 되지를 않아서 내어 버렸던 것으로 지금 보아도 그게 마음에 몹시 거슬리어 붓을 좀 넣어 본 것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주인은 어성(語聲)을 높이어 하는 말이 당신은 글씨를 쓸 줄만 알고 볼 줄은 모른다고 하면서
“효조(曉鳥)”라면 새벽 새일 테니 잠자리에서 갓 깨어 나온 새가 무슨 흥(興)이 있어서 꼬리가 올라가겠는가, 언제 보아도 새벽 새는 꼬리를 밑으로 처뜨리고 우는 법이라 자기가 이 글씨에 고가(高價)를 주고 사다가 머리맡에 걸고 사랑하는 것도
“효조(曉鳥)”라는 데 있어 조(鳥)자의 취팀을 용하게 밑으로 처뜨린데 가치(價値)를
찾았던 것인데 아까운 글씨를 버렸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 족자를 떼어
던지더라는 것이다.】
계용묵(桂鎔黙)의 이 “효조(曉鳥)” 수필을 읽고 느낀 것은
글자 한자 한자의 바르게(定置) 쓰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전체 조화(調和)의 큰 뜻을
놓친 것이다.
물론 조광진(曹匡振)은 이러한 아픔이 그를 조선 삼대명필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지만, 코만 잘생겼다고 미인이 아니고, 좋은 학교만 나왔다고 지식인이나 인격자라
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글이다.
추사 김정희가 최고의 명필이라 듣는 중요한 요인은 글자 전체를 아우르는
뛰어난 조형미((造形美)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을 하라는 국민적 압박을 받는 것도 “정치조화(政治調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가정도 가족 간의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카페(internet cafe)를 오래도록 잊지 않고 운영하면서
컴퓨터 동반자(compute partner)로 오래 남기 위해서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가 중요한 것을 느끼게 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