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수(尹東洙)-도망아(悼亡兒)(죽은 아이를 애도하다)(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可憐天氣復陽廻(가련천기부양회) 가련하여라, 하늘은 다시 생기를 회복했건만
一去何如汝不來(일거하여여불래) 한번 가더니 어찌하여 너는 오지 않는 게냐
異質爭稱終遠到(이질쟁칭종원도) 자질이 뛰어나 큰일 하리라 칭찬들 했는데
芳年誰意奄斯摧(방년수의엄사최)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떠날 줄 뉘 알았으랴
應知逝者無歡慽(응지서자무환척) 죽은 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는 걸 알지만
不耐生人獨疚哀(불내생인독구애) 산 사람 홀로 사무치는 슬픔 견딜 수 없구나
泉裏相隨嗟豈遠(천리상수차기원) 아, 저승에서 서로 만날 날이 어찌 멀겠느냐
自從喪爾日衰頹(자종상이일쇠퇴) 너를 보내고부터 날마다 쇠잔해만 가는 것을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경암집敬庵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윤동수는 농은農隱 윤추尹推의 손자로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종손이다. 처음에는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으나 얼마 뒤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부인인 전의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윤광겸尹光謙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 시는 바로 윤동수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작품이다. 죽은 달은 3월이라고 한다. 양력으로는 4월 봄날의 어느 날쯤 되지 않을가 싶다. 요즘 17세의 4월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한창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이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가서 어떻게 재미있게 놀지를 상의하느라 들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17세는 지금과는 달리 성인으로 대접받고 행동하던 나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혼인을 하여 한 가정을 꾸렸을 수도 있다. 그러하니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에게 자식은 나이와 상관없이 늘 어린 존재이고 보살핌의 대상이다.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고들 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옛날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 중 가장 큰 불효로 보았던 것이다. 자식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눈이 멀 정도의 아픔과 같다 하여 상명喪明이라고 한다.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어린 나이의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을 과연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까?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월 것이다. 그저 함께 슬퍼하며 그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번 가면 한 번 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천지의 기운도 가라앉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생기를 되찾는데, 우리 아이는 한번 가더니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자식이야 영특하든 영특하지 않든 다 똑같이 사랑스럽지만 주변의 칭찬이 남달랐던 아이라 자꾸만 옆에서 기억을 떠올리게 하니 더욱 슬프다. 죽은 사람이야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부모는 그 슬픔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죽은 것이 어찌 아이뿐이겠는가?. 자식을 보낸 순간부터 부모의 마음도 함께 죽어 생기를 잃고서 이미 저승에 가 있는 것을.
봄에 떠난 아이를 생각하면 화려하게 꽃이 핀 봄이 더더욱 슬프기만 하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윤동수[尹東洙, 1674년(현종 15) ~ 1739년(영조 1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달(士達) 또는 대원(大源), 호는 경암(敬庵)]-조선 후기의 학자. 윤선거(尹宣擧)의 증손자로 윤자교(尹自敎)의 아들이다. 처음 부모의 명에 따라 과시(科試)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뒤 그 뜻을 버리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1710년 시강원자의, 이듬 해에 종부시주부를 거쳐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가 되고, 1716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그러나 사문시비(斯文是非)에 관계되어 파직되었다가 한 달만에 복직되었다.
이듬 해 증조부 윤선거와 종조부 윤증(尹拯)에게 추탈(追脫)의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1722년(경종 2)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이 복위되고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사헌부지평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으로 옮겼다가 이듬 해 사헌부장령에 강직(講職)을 겸하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거쳐 단양군수로 나갔다. 1724년 하차은 사건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고, 1727년(영조 3)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 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유고(敬庵遺稿)』가 있다.
*奄(엄) : 문득 엄, 1.문득, 갑자기, 2.오래, 3.고자(鼓子), 환관(宦官)
*斯(사) : 이 사/천할 사, 1.이, 이것, 2.잠시(暫時), 잠깐, 3.죄다, 모두, 𣂕(고자)
*摧(최) : 꺾을 최, 꼴 좌, 1.(꺾을 최), 2.꺾다, 깨뜨리다, 3.꺾이다, 부러지다
*慽(척) : 근심할 척, 1.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2.서러워하다, 3.슬퍼하다
*疚(구) : 고질병 구, 1.고질병(痼疾病), 오랜 병(病), 2.상(喪), 거상(居喪: 상중(喪中)에 있음), 3.병으로 오래 고생하다
*嗟(차) : 탄식할 차, 1.탄식하다, 2.감탄하다, 3.탄식(歎息ㆍ嘆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