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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이 이야기는 모 명문대학의 유명한 자살장소에서 아이디어를 따온것이나,
극적인 요소를 위하여 변형된 것으로, 혹시 일치할지도 모르는 이름이나 사건은 우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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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머리가 햇빛보다도 눈부시게 흩날려,
그 잔재가 님을 이루는 날이면 나는 그대를 찾아가리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님의 곁에 머물러
그날의 빗방울의 향기를 속삭여주는 날이면 나 주저없으리다.
카페인의 농염한 중독으로 나 취하는 날이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님을 찾아 어김없이 떠나리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호수에서 님이 나오는 날이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달빛을 등지고 나는 세상을 떠나리다.
핏빛 눈물이 하얀 안개에 산산조각 흩어지는 때에는
작디작은 우산 아래 투명한 별빛들을 님과 함께 하리다.
‘명심하라. 자신의 가장 커다란 적은 자신임을.
극복하기 어려운 기억을 스스로 지울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는 종족은,
그 어떤 일을 하고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뻔뻔히 살아갈수 있음을.
자신이 자기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 도리는 없다.
혹여 아무리 노력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 있다면 의심해보라.
당신은 어젯밤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Lovers’ Lake (연인들의 호수)
Norah Jones의 Come away with me 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잠든 사린. 그녀는 평범한 얼굴을 지녔지만,
지금 잠든 그녀를 묘하게 비추는 창가의 ‘푸른달’의 빛 덕분에 현재만은 매우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죽음만큼 오묘한 매력이 넘치는 얼굴을 하고서,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그녀.
밖에는 이제서야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집 안의 빨래통 안에는 비에 푹 젖은 원피스가 하나 놓여있었다.
원피스의 주머니 안에서는 무언가가 반짝인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집 안에는 말리는 중인 투명한, 도트가 박힌 예쁘장한 우산이 있기에.
우산을 가지고 나갔었다면 왜 젖은 원피스가 놓여있을까?
사린은 잠결에 뭐라 평화롭게 중얼거리며 뒤척였다. 덕분에 그녀가 안고 자던 새하얀 고양이는 불평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고양이의 눈에 비친 푸른 달.
“야아옹?”
새하얀 빛의 털에 달이 반사되지 않고, 흡수되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푸르게 빛을 발산한다.
“야아옹 –“
고양이의 눈빛이 변한다. 사파이어보다도 더 푸르렀던 그 순종 특유의 눈 색깔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해서,
곧 빛 한점 없는 까만색으로 변해버린다.
고양이가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피고는, 창가쪽으로 다가간다. 사린은 부잣집 딸이다. 덕분에 독립 아닌 독립 후에도,
비싼 전원주택을 선물 받을수 있었다. 그녀의 커다랗디 커다란 방은 2층이다.
고양이라면 충분히 뛰어내릴수 있는 높이다. 뭐 지금 이 순간 이 고양이는 60층에서 떨어져도 푸른달의 영향으로
살아남을수 있는지라, 별로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새까만 눈에 영혼의 빛마냥 푸른 빛을 발산하는 털을 지닌 고양이는 빗소리를 잠깐 듣더니,
약간 열려있는 창문 아래로 고양이 특유의 부드러운 동작을 이용해 들어간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뛰어내린다.
잠시후, 고양이는 다시 창문 틈새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사린의 곁에 눕는다. 잠결에 사린이 쓰다듬는
고양이의 털빛은 이제 다시 하얀색이다.
이슬같이 고양이의 털에 맺혀있는 빗방울. 그러나 사실 그 비는 멈춘지 오래였다. 지금 묻어있는 빗방울들은
필시 고양이가 나갈때 오는듯 오지 않는듯 오던 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고양이가 눈을 감기 전에 보이는 색은 푸른 사파이어 색.
그러나, 잠들기 시작한 고양이의 왼발 주변에는 보일듯말듯 피가 털에 엉겨붙어 굳어가고 있다.
2: 17 a.m. 사린의 꿈 속
사린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회색 도트가 박힌 투명한 우산을 든채 공원을 걷고 있다.
토닥토닥, 그녀의 발걸음과 엇박자로 빗방울이 약간은 세차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우산을 정기적으로 두드린다.
그 하얀 원피스에는 빨간 줄로 테두리가 쳐진, 약간 기울어진 각도의 주머니가 두개 있고, 역시 빨간줄로 그녀의 가슴
아래에 테가 쳐져, 리본이 묶여 있다. 원피스 천 자체에도 같은 빨간 색으로 도트가 쳐져 굉장히 귀여운 느낌을 주고있다.
꿈 속의 사린은 알지 못하지만, 그 원피스는 그녀가 지금 잠들어있는 방 바로 밖에, 푹 젖은 채로 빨래통에 던져져있는
그 원피스와 동일한것.
하지만 지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그 젖은 원피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꿈 속의 원피스는 오른쪽 주머니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리라.
적어도, 아직은.
저쪽, 조금 있으면 달이 뜰 쪽에서,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사린은 왜 이런 날씨에, 사람도 없는
공원에서 저 남자가 있는 것일까 궁금해한다.
자신이야 비를 좋아해서 일부러 나온것이지만은, 저 남자는 왜 우산도 없이 저렇게 처량맞은 산책을 하는것일까?
남자가 다가올수록 사린은 그가 동양인이라는것을 깨닫는다.
꿈 속에서도 이 공원이 자기 집에서 고작 몇 분만 운전하면 되는 거리에 있는 바로 그 공원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린은 미국에 산다. 그리고 그녀가 사는 곳은 웅대한 전원 주택들만 띄엄띄엄 놓여있는 부자마을.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쯤은 모두 꿰고 있다.
그 중에 저만큼 젊은 동양 남자가 사는 집은 없다는것을 알고있다. 누굴까..
남자가 고개를 든다.
번쩍.
사린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꿈에서 깼는데도 사린은 후유증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그 남자의 반쯤 든 얼굴이 눈에서 아른아른거렸다.
이렇게 진짜같은 꿈은 한번도 꿔본적이 없다.
누굴까 ?
사린은 꿈에서 깬 이 와중에서도 궁금했다.
남자는 특별히 잘생긴것은 아니었지만, 오묘한 매력이 있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뭐랄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그제서야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는 꿈속의 남자에게 자신이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빨개진 얼굴을 민망하게 부여잡으며 잠들었다.
더 이상의 꿈은 없었다.
8:48 a.m.
“야아아아옹 –”
고양이의 교태스러운 애교에 사린은 언제나처럼 잠에서 깼다.
“플러피, 잘 잤어?”
부비부비, 사린이 까르르 웃으며, 고양이의 길고 눈처럼 하얀 털에 얼굴을 파묻는다. ‘플러피’라고 불린 그 고양이 역시
그것이 싫지 않은지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아응 – 졸리다. 조금만 있다 깨우지!”
사린이 얄밉지 않은 눈초리로 플러피를 곁눈질하며, 플러피의 발을 장난스럽게 거머쥐었다.
“어라?.. 이게 뭐야 플러피?”
플러피의 발에 묻어있는 적갈색의 어떤 고체는 사린의 손길에 부스러져 하얀 침대보로 떨어졌다. 색의 대비는 미술시간의
보색배치만큼이나 눈이 시릴 정도.
“이거..피..피 아냐?!”
사린이 기겁하며 플러피의 발을 내팽개치듯 내렸다. 플러피는 그녀의 거친 손길에 놀라, 앙칼지게 야옹! 하고 비명지르듯
외치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플러피! 그런 이상한건 어디서 묻혀온거야!”
피를 유난히도 싫어하는 사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오들오들 몸부림치며, 하얀 침대보에 떨어진 그 핏가루들을 응시했다.
이젠 가정부가 올때까지 이 방엔 들어오지도 못할것 같다.
“야아옹!”
플러피가 항의하듯 목청을 돋우었다. 플러피도, 사린도, 온순한 성격이고, 화 한번 내는것을 서로 본적이 없었다.
플러피는 주인이 저렇게 반응하는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자긴 잘못한것이 없는데!
사린은 조심스레 핏가루를 피해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나간다음,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야옹!”
플러피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 방 안에서 들려왔지만, 사린은 숨을 고르기에 바빴다. 피! 핏가루가 내 침대에 있었어!!
하아.하아.
사린이 고르는 숨소리가 온 복도에 메아리쳤다.
‘대체 플러피는 어디서 저런걸 묻혀온거야!! 쥐도 무서워하는 녀석이!’
사린은 정말이지 비명이라도 지를것 같았다.
‘잠깐, 진짜, 어디서 묻혀온거지? 어제 저녁에만 해도 저런건 없었는데다, 나랑 같이 잤는데..’
그제서야 사린은 그 피의 원천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플러피는 소심한 고양이다. 쥐도 잡지 않고,
사린이 없이는 어디에도 잘 가지 않는, 고양이치고는 굉장히 의존적인 녀석이다.
사린만큼 보호된 환경에서 고급스런 음식만 먹고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자는동안 어디에 갔다왔단 말이야? 플러피같지 않은 행동인데..’
하지만 그 가능성밖엔 없었다. 분명히 플러피는 밖에서 피를 묻혀왔을테니.
‘플러피가 대체 그 늦은밤에 혼자 어딜 돌아다니다 온거야..’
‘…………어? 난 근데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플러피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사린, 그제서야 자기도 언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것을 알아냈다.
분명 비가 오는걸 알아채곤, 공원까지 드라이브해서 갔던것까진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이후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 하나도!
사린은 당황한 눈길로 주변을 훑었다.
우연히 그녀의 눈에 빨래통의 구석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서리에 걸쳐져있는 그녀의 원피스…
그녀가 어젯밤 꿈에서 입고 있던 원피스!!
“아!”
사린이 외쳤다. 그녀가 달려가서 잡아챈 그녀의 원피스는, 아직도 약간은 축축한 기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비가 오는건
좋아하지만, 비를 맞는것은 하지 않은지가 벌써 몇년이다.
분명 어제 우산을 차에 넣었던것이 기억난다. 더군다나, 저기에선 그 똑같은 우산이 말리기위해 펴져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데 왜 원피스가 젖어있느냔 말이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심각히 고민시켰다. 내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혹시 납치라도 당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때, 그 꿈이 다시 생각났다.
남자.
묘한 매력을 지니고, 어딘가 푸르스름한 빛을 등진채, 마치 그 빛을 자기 스스로 발산한것마냥 당찬 걸음으로 빗속을 통해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던 남자.
자신이 첫눈에 반한 남자.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 아직까지도 조금 젖어있는 원피스, 그리고 생전 처음 꾸었던 지나치게 생생한 꿈!
그래!
그 꿈이 그날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자신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지 못하나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난것임에 틀림없다.
그 ‘대단한 일’은, 너무나 대단해서, 한번에 다 받아들이기엔 그녀의 마음이 부족했던 것이이라고 사린은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니, 예전 어디선가 너무 커다란 일은 뇌에서 가끔 지우기도 한다는걸 본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꿈을 마저 끝까지 꾸기만하면, 무의식이 기억하는대로 그것을 다시 보기만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알수 있을것이다!
사린은 어서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서 견딜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 옷이 젖은걸로 봐서, 그 남자도 내게 첫눈에 반한 것이 분명해! 그래서 영화의 연인들처럼 내가 우산을
버리고 뛰쳐나가 그 남자의 품에 안긴것이겠지!’
사린은 행복히 생각했다. 이런 사랑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극심한 로맨티스트였던 사린은, 그래서 수많은 남자를 여태 거절해왔다. ‘운명’이 아닐거라는 확신하에.
그녀는 밤을 애타게 기다렸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2: 17 a.m. 사린의 꿈 속
누굴까..
남자가 고개를 든다.
세찬 비가 그의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지는데도 그 남자는 신경쓰지 않은채 사린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둘 다 알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푸른달의 영향이라는것을.
남자는 푸른달을 등진채로 걷고 있어서, 푸른달이 선사하는 악마적인 매력을 발산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이성을 뺏긴다거나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린은 다르다. 그녀는 그 남자가 가리고 있던 푸른달을 이제는 정면으로, 완벽히 받고 있다.
사린은 푸른달의 빛을 받고 있는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다. 여신같은 아름다움.
아니,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여신같이 성스러운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사린의 눈이 서서히 침체되어, 심연같이 새까만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녀의 원피스 주머니 중 오른쪽에, 무언가 반짝거리는것이 생겨났다.
꿈 속의 사린은 이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푸른달에게 이성을 빼앗겨버렸으니까.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현실의 사린도, 이 사실을 모른다.
그녀는 이제 제 3자의 입장에서 이 꿈을 보는것이기 때문에, 푸른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린이 지금 보는것은 자신에게
홀리듯 반해버린 매력적인 남자뿐.
이거다!
운명적인 사랑!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속으로 외치고 싶기만 했다.
남자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사..사랑합니다!”
꿈 속의 사린은 생긋 미소를 짓는다. 치아가 하얗게 빛나, 더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매력에 불가능할 정도의 매력을
불어넣는다. 남자는 차마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뜰수조차 없다.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운명이다! 바로 이 사랑이야!’ 라고 생각한다.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그러니까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저렇게 매력적인 남자가 지금 자기에게 첫눈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런걸 기억못하다니!! 어떻게 그럴수있지? 하고 사린은 아쉽게 생각한다.
“저도, 사랑해요. 이제 내 사랑을 보여줄게요..”
꿈 속의 사린이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사린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높고, 무엇보다도 구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은방울이 굴러가는것만 같다.
탁.
꿈 속의 사린이 우산을 길거리에 떨군다.
번쩍.
사린은 다시 눈을 떠 버렸다.
“안돼!”
그녀가 외쳤다.
안돼, 안돼! 그 남자와 난 어떻게 된거지?
그게 사실로 일어난 일이었다면, 저만큼이나 운명적인 사랑이었다면, 우린 어떻게 된거지? 왜 난 지금 그걸 기억못하는거야? 저 남자를 찾아야하는데!!
그녀는 조급했다.
남자를 꼭 찾아야만한다. 한시가 급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모른다. 혹시나 어느 시각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면 어쩌지?
그래서 그녀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 시간에 나가지 못해서, 남자가 실망해서 떠나버린다면?
다시는 그 남자를 볼수 없다면…?
“안돼!!”
사린이 다시 안타깝게 소리쳤다.
이제 그 남자 없이 산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운명적인 사랑이다. 그녀가 지금 여태 살아온동안,
그러니까 평생을 기다려온 그녀의 소울메이트가 분명한데!
놓칠수없어!
그녀는 초조하게 방을 서성였다. 아까 낮에 가정부가 억지로 씻겨놓아서, 이제는 피가 묻어있지 않은 플러피는,
그런 그녀를 향해 불만스럽게 야옹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만날것인가?
약속시간이 있는지도, 아니면 다른 일이 일어났는지도, 혹시 약속시간이 있기라도 한다면 그게 언제,
어느 장소에서인지도 모르는데!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사는곳도 모른다. 찾아낼수가 없다.
사린은 초조해졌다. 남자를 찾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매우 거슬렸다.
꿈을 마저 다 꾸고 나면 뭔가 알 수 있겠지만, 내일 밤까지 기다릴수는 없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간에 찾아내야만한다.
한시가 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사랑이 떠나버리면 어떡할것인가? 운명의 장난일까?
사린은 자신의 노트북을 찾아와, 다급한 몸놀림으로 켰다.
우우웅 – 소리와 함께 곧 뜨는 네이버.
그녀는 스쳐가는 생각으로, 돈을 더 주고 비싼 컴퓨터를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 어디보자.’
사린이 생각했다.
‘내가 꿈에서 기억하는게 뭐가 있지? 남자를 찾을수 있을만한?’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이한것은 남자의 등 뒤에 있던 푸른달밖에 없었다. 남자가 꿈에서 봤던것처럼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푸른달밤에 만난 어떤 여인에 대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이라도 쓰지 않았을까?
한국인임은 확실하다. 자신에게 한국말로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푸른달’
그녀가 검색어에 쳐넣었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아니, 뜨는것은 몇개 있었으나, 그것은 사전이나 다른 쓸데없는 잡다한 지식인에서 나온 정보로,
푸른달이 뜨는 날이면 평소엔 꿈도 꿀수 없었던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다는 내용에 불과했다.
그녀는 구글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만난 사람이니까, 어쩌면 싸이월드 대신에 myspace (작가 설명: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홈페이지로,
싸이월드같은 대중성을 지니고있음)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Blue moon’
딸칵딸칵거리는 키보드 소리마저 느리게 느껴지는 순간, 검색된 페이지가 떴다.
여러 쓸데없는 사이트와 함께, myspace 에서 발췌된 것이라고 뜨는 어떤 글..
사린은 얼른 그것을 클릭했다.
평범한 myspace 페이지. 그리고, 딱 보아도 정신없는 어떤 글. 아마 일기인것 같았다.
글이 엉망인 이유는…다급해서일까?
“My name is Kyle. I don’t have much time, so I’ll have to do this quickly.
(내 이름은 카일. 시간이 없으니 이걸 빨리 써야해.)
She’s coming for me tonight, I can feel it.
(그녀가 오늘밤 날 데리러 올것을 느껴.)
It’s too late for me, and she’s going to drag me into Lovers’ Lake.
(난 너무 늦었고, 그녀는 이제 나를 연인들의 호수로 끌고가겠지.)
The reason I’m writing this is to save someone else that might have fallen a victim to the Blue Moon.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푸른달의 희생자가 된 다른 이들을 돕고자함이지.)
If you’re reading this, then you probably have been enchanted by the blue moon too, just like me…
(당신이 이걸 읽고 있다면,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푸른달의 마법에 걸렸었겠지…)
And you probably have made a REAL victim yourself…
(그리고 당신은, 아마 ‘진짜’ 희생자를 스스로 만들어냈을거야.)
She’s coming tonight.
(그녀가 오늘밤에 온다.)
It’s the blue moon.
(푸른달 때문이지.)
I didn’t do it.
(내가 한게 아냐.)
Neither did you.
(너도 마찬가지고.)
You’ve got to stop the dream.
(꿈을 멈추어야해.)
They always come after the end of the dream.
(그들은 항상 꿈이 다 끝나고 나면 찾아오니까.)
They’re waiting for you to remember it all.
(네가 다 기억해내길 기다리고 있는거야.)
You’ve got to stop the dream.
(꿈을 멈추어야해.)
It’s the dream, it’s the memory that you have lost…
(꿈 때문이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들…)
Oh, but the memory!
(아, 하지만 그 기억이란!)
How can you possibly stop yourself from dreaming that memory!
(기억들을 담은 그 꿈을 꾸는것을 멈출 의지를 어디서 끌어낼수 있지?)
And my departure with the world is going to be the sweetest goodbye…
(그리고, 내가 할 세상과의 이별은 아마도 내가 겪어본 것 중 가장 달콤한 것이겠지.)
She is coming, I am afraid, but I am also ecstatic.
(그녀가 오고 있어.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기뻐 미칠것같아.)
It is unnatural, I know, but I cannot help it.
(비정상적인걸 알지만, 어쩌겠어.)
Lovers’ Lake, where I will spend eternity with her…
(연인들의 호수, 그녀와 내가 영원을 함께 할 곳..)
You have to stop the dream.
(꿈을 멈추어야해.)
Or else you will be like me, unable to stop anything…
(안 그러면 너도, 아무것도 멈출수 없는 나처럼 되어버릴테니…)
Yes, it is a beautiful ending, but who knows what happens inside the Lovers’ Lake,
where the scream of banshees are heard during the full moons?
(그래, 아름다운 엔딩이긴 하지만, 사실 연인들의 호수 안에선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보름달마다 banshee (작가 설명: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나서 울부짖는다는 전설의 존재) 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 곳에서?)
Stop the dream.
(꿈을 멈춰.)
She’s here.
(그녀가 왔다.)”
“뭐야..?”
사린은 중얼거렸다. 소름이 가득 돋아버린 팔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다른 글들을 클릭해보았지만, 그녀와 비슷하다고
생각될수없는 쓸데없는 정보들만 가득했다.
꿈. 카일이란 사람은 분명히 잃어버린 기억들을 담은 꿈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 기억들을 다 찾으면 뭐가 온다는거야. 그 남자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이 남자는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글을 썼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면 안되는것처럼, 꿈을 멈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 꿈을 멈출수 있어..’
사린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그녀도 모르는 새에, 그녀의 왼쪽 눈에서 떨어져, 그녀의 무릎을 적셨다.
‘드디어 내 운명적인,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을 찾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조차 없도록 내가 그 꿈을
멈출수 있어…’
사린은 본능적으로, 한번만 더 그 꿈을 꾼다면 그 기억이 완성되리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 꿈만 꾸고나면 그 남자를
어떻게든 만날수 있으리라.
그렇게 서로 운명적인 사랑을 알아보고, 속삭인 후에 훗날 만날 기약조차 없이 헤어진다는건 말이 안되니까.
오히려 사린은 안도감이 들었다.
저 말이 맞다면, 꿈만 끝나고나면 어떻게든 그 남자를 볼수 있단 소리다.
하지만, 자기가 희생자를 만들었단 소리는 뭐고, 연인들의 호수로 끌려간다는건 또 무언가?
순간 사린은 어렸을적 일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기억에서 지워냈던 그 일…
“따님은 사랑에 빠지면 죽습니다.”
어렸을적 엄마와 갔던 나들이에서 돌아오는길에 본 점보는 곳. 재미삼아 들어가자는 엄마의 말에 조그만 손으로 엄마의
손을 그러잡고 쫄래쫄래 따라간 곳에서 점쟁이가 했던 말.
재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오려는 엄마의 뒤로 중얼거리는 점쟁이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말에, 어린 사린의 정신은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의 어리던 뇌는 반사적으로 그 기억을 지웠다.
이제서야 그 기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네요.”
그 이후로, 사린은 그 기억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피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 점쟁이의 말이 맞다고 친다면, 그 일기의 글과 맞물린다. 완벽하게.
“And you probably have made a REAL victim yourself…
(그리고 당신은, 아마 ‘진짜’ 희생자를 스스로 만들어냈을거야.)”
“빌어먹을.”
사린이 중얼거렸다.
“어쩌지? 저 사람 말이 맞다면, 점쟁이의 말이 맞다면, 그럼 난 어떻게 되는거지?”
방을 서성거리는 그녀의 초조한 발걸음소리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엇박자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내가 살인마란 말이야? 그것도 내가 평생 사랑해본 단 하나의 남자를 죽인?”
“아니야, 그럴리가 없지.”
“그래, 그럴리가 없어. 인터넷에 나온 말이랑 길거리에서 하는 가짜 점쟁이들 말을 어떻게 믿을수가 있겠어. 그래.
그냥 우연의 일치야.”
합리화라는건 참 무서운것이 아닐까.
“저 카일이란 사람은 분명 그냥 연인들을 놀리기 위해서 저런글을 쓴걸거야.”
그러다, 사린의 머리에 스친 생각.
“하지만, 정말 진실이 있다면, Lovers’ Lake. . .이라는 곳에 뭔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연인들의 호수”를 검색했다.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구글에 들어가서, “Lovers’ Lake”을 치자, 수십건이 검색되었다.
그 중에 가장 위에 있는 글을 클릭하자…
“Lovers’ Lake
(연인들의 호수)
Its original name is Finger Lake, named so because of its shape.
(이 호수의 원래 이름은, 그 모양 때문에 손가락 호수이다.)
It is located near Nell University.
(넬 대학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About 25 people had died so far in this place, but only by suicide.
(25명쯤의 사람들이 여기서 자살했다.)
But the rumor is that they are called to that place by their dead lovers…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죽은 연인들에 의해 불려간다고 한다.)
It is known that those people have died only during full moons,
and the coroners had identified that they all died around 2 a.m.
(그들은 모두 보름달이 떴을때만 죽은것으로 알려져있고, 장의사들에 의하면 다들 새벽 2시경에 죽었다고 한다.)
The locals say that if you walk around that lake alone around 2 a.m, you can hear a small sound,
which suspiciously sounds like the scream of the banshees.
(그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새벽 2시경에 호수 주위를 혼자 거닐면, banshee(작가설명: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울부짖는다고 하는 전설의 존재)들의 울음소리같은 것을 작게 들을수 있다고 한다.)
Despite this fact though (or perhaps because of it), it is known to be a popular dating spot among the lovers,
and so was nicknamed “Lovers’ Lake”.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사실 때문에, 이 곳은 연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데이트 장소가 되었고, 그래서
“연인들의 호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No worries though, the lovers are in no real danger, since no one has died there since 2006, after Kyle Davidson.
(하지만 걱정마시라, 카일 데이비슨이 죽은 2006년 이후로는 아무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연인들은
아무런 위험에 처해있지 않으니까.)
Kyle’s last posting on his myspace, nicknamed “The warning for the future lovers of Blue Moon” among the lovers,
only increased the young lovers’ attention to the place…
(카일이 myspace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은 “푸른달의 연인들에게의 경고”라고 연인들 사이에서 불려지며, 그 글은
역효과로 대중의 관심을 초래하고 말았다…)"
카일 데이비슨..카일. 카일?
탁.
사린은 소리나게 노트북을 덮고 이마를 짚은채 한참 생각했다. 이렇게 지나가기엔 찝찝한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공포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왜 괴물이 있는 곳으로 자꾸 가는지, 그게 불만스러웠던 사린이지만, 그녀 역시 호기심은 이길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묘연한 행방이 걱정되었다. 그가 보고싶었다!
사린은 작은 백팩에 여권과 그 외에 필요할 응급물품들을 대충 쑤셔넣기 시작했다. 플러피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옹, 하고 울어제꼈다.
“플러피, 나 못 참겠어. 찾아야해. 내가 찾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었어!”
그녀가 미친듯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가방을 들쳐매고 거실로 나왔다.
“가정부 아줌마가 밥 줄거야, 알았지 플러피? 집 잘 보고 있어야해!”
우웅.
비행기의 엔진이 용트림을 하며 살아나자, 사린은 몸을 배배 꼬았다.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볼수 있다는 알수없는
설레임이었다.
서부에 살고 있는 그녀로써는 동부에 있는 Nell 대학은 너무나도 멀었고, 공항에 내린 다음에도 구석진 곳에 자리한
그 곳으로 가려면 한두시간은 족히 걸릴듯했다.
그녀의 몸을 담은 저녁 비행기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약 여섯시간 후, 그녀는 그제서야 공항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지는 오래였고, 새벽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시각이었다.
미리 전화를 해 대기시켜놓은 차가 공항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 하나 없는 밤과 맞는 새까만 색에,
보름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외형.
사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그 꿈을 꾼 이후로 보름은 커녕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름달이 뜰 리가 없는 밤이라는것을. 분명 아까 비행기 안에서 좀 더 크게 바라볼수 있었던 달은 보름달과는
먼 모양이었다는것을.
밤인데도 썬글라스를 끼고 기사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남자가 운전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은채,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여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린은, 삼사십분이 지나고, 비싼 디자인으로 인해 흔들림
하나 없이 미끄러지는 차의 움직임에 잠이 들었다.
2: 17 a.m. 사린의 꿈 속
누굴까..
남자가 고개를 든다.
세찬 비가 그의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지는데도 그 남자는 신경쓰지 않은채 사린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둘 다 알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푸른달의 영향이라는것을.
남자는 푸른달을 등진채로 걷고 있어서, 푸른달이 선사하는 악마적인 매력을 발산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이성을 뺏긴다거나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린은 다르다. 그녀는 그 남자가 가리고 있던 푸른달을 이제는 정면으로, 완벽히 받고 있다.
사린은 푸른달의 빛을 받고 있는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다. 여신같은 아름다움.
아니,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여신같이 성스러운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사린의 눈이 서서히 침체되어, 심연같이 새까만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녀의 원피스 주머니 중 오른쪽에, 무언가 반짝거리는것이 생겨났다.
꿈 속의 사린은 이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푸른달에게 이성을 빼앗겨버렸으니까.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현실의 사린도, 이 사실을 모른다.
그녀는 이제 제 3자의 입장에서 이 꿈을 보는것이기 때문에, 푸른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린이 지금 보는것은 자신에게
홀리듯 반해버린 매력적인 남자뿐.
이거다!
운명적인 사랑!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속으로 외치고 싶기만 했다.
남자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사..사랑합니다!”
꿈 속의 사린은 생긋 미소를 짓는다. 치아가 하얗게 빛나, 더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매력에 불가능할 정도의 매력을
불어넣는다. 남자는 차마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뜰수조차 없다.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운명이다! 바로 이 사랑이야!’ 라고 생각한다.
꿈을 꾸고 있는 사린은, 그러니까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저렇게 매력적인 남자가 지금 자기에게 첫눈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런걸 기억못하다니!! 어떻게 그럴수있지? 하고 사린은 아쉽게 생각한다.
“저도, 사랑해요. 이제 내 사랑을 보여줄게요..”
꿈 속의 사린이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사린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높고, 무엇보다도 구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은방울이 굴러가는것만 같다.
탁.
꿈 속의 사린이 우산을 길거리에 떨군다.
그녀가 손을 원피스의 오른쪽 주머니에 습관인것마냥 찔러넣는다. 남자는 그저 행복하도록 홀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사린이 먹이를 포착한 맹수의 유유함으로 그에게 물결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다가가, 그를 안으려는듯한 포즈를 취한다.
남자는 취한듯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그녀를 마주 안으려 하지만.
“흐억!”
곧 쓰러지고야 만다. 그의 배에는 사린의 주머니에서 나온 푸른 칼이 들려있다. 뚝뚝 떨어지는 피에서 김이라도 날듯,
차가운 사린에게 열기가 전해져온다.
“서로의 마음을 보여줄수 있는 사랑.”
그녀가 쓰러진 그에게 몸을 굽혀 속삭인다. 푸른 눈을 하고서.
스윽.
사린은 다시 한번 그의 심장께에 칼을 박고는, 심장을 빼내기라도 하려는듯 칼을 비틀었다 뺐다, 칼을 어루만졌다 한다.
그의 피가 소중한듯,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피를 하나도 남김없이 받으려고, 그 분수의 한 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즐긴다.
“아름다워.”
번쩍.
일순간 꿈 속의 사린의 모습이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인다. 시리도록 푸르른 그녀의 눈은 호수의 빛깔이다.
“아악!!”
어느샌가 멈춘 차 안에서, 사린이 소리를 지르며 깬다. 악몽으로 인해 거칠게 쉬고 있는 숨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숨결이 가쁘다.
“다 왔습니다.”
기사가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그의 목소리에 사린은 오금이 저렸다. 곧 깨져 사라질것만 같은 목소리. 죽어가는 자의 목소리.
사린이 대답하지 않은채 좌석에 얼어붙어있자, 기사가 다시 한번 말 없이 차문을 열고 나간다. 몇초후, 그는 사린쪽 차문을
열어제끼고, 사린에게 나오라는 시늉을 한다.
“왜..왜요.”
꿈의 남자의 모습과 기사의 모습이 자꾸 겹쳐보인다. 사린은 눈을 비비고, 고개를 휘휘 저어보지만, 그의 뒤에서 점점
푸르게 변해가는 달빛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잖아요.”
그가 말하더니, 사린을 잡아끈다. 전율이 인다. 몸부림을 치면서 사린은 남자에게 끌려 호수쪽으로 자꾸만, 자꾸만 걸어간다.
하늘을 비추는 거울보다도 더 맑은 빛깔의 호수는, 잔 파동하나 없이 사린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더 없이 아름다웠고, 그리고 더 없이 추했다.
저 깨끗한 호수의 심연에는 어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 것일까?
“아아, 아파요, 좀 놔요!”
사린이 외치지만, 남자는 완강히 그녀의 손목을 그러쥔채 직선으로 호수를 향해 걸어간다. 왠지 이슬맺힌듯한 차가운
잔디들이 사린의 발목을 뭉툭한 칼날처럼 치고, 점점 추워지는 바람에 뼈가 부서질것만 같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르륵.
둘의 지속적으로 빨라지는 걸음에, 어느새 둘의 발목이 호수에 모두 잠겼다. 보통 호수라면 찰팍거리며 파동이 있어야
정상이건만, 이 호수는 물보다는 비단안으로 만들어진 물의 환상인것마냥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녀를 기다렸다는듯
그 둘의 발목을 열망하는 자의 손짓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보이는 수면 바로 아래의 죽은 자들.
이젠 완연히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달빛 아래서 아름다웠으나, 그 달빛이 사라져버리면, 그 아름다운 외모가 사라져버린다면
그들은 어떻게 변할것인가?
침체된 호수의 심연과 똑같은 빛의 눈을 하고서, 그들은 한결같이 다가왔다. 호수의 일부분이라도 되는것처럼, 바다 안의
해초처럼 사린과 그녀를 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꺄아악!!”
사린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마구 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썬글라스를 벗었다.
그녀가 겉모습만을 보고 운명적인 사랑이라 단정지었던 그 남자였다. 자신이 그렇게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던 남자.
남자가 발악하는 사린을 내려다보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사린이 그를 죽였을 때 내질렀던 신음소리와 같게 잠긴 목소리로, 그가 사린의 귀에 속삭였다. 가슴까지 잠길 정도로 호수 안으로 걸어들어와버린, 아니 빨려들어와버린 그들의 주위로 원을 이루며 수면 아래에 해초같은 죽은자들이 다가왔다.
“사랑해요. 이번엔 내 사랑을 보여줄게요.”
보름달마다 들려오던 그 울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아니었음을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 울음은 푸른달의 환상이 깨져버린 사람들이 그 호수에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소리였다. 사랑은 눈의
단차원적인것으로 결정되는것이 아님을 몰랐던 자들의.
푸른달과 색깔만 다를뿐, 너무나도 비슷한 보름달을 보며 울부짖는, 착각에 빠졌던 옛 연인들의 목소리…
잔재조차 남을수 없도록 핏빛으로 바스라졌던 아련한 환영의 메아리.
첫댓글 넬 대학에서 움찔(←밴드 넬 팬입니당;) 글을 읽으면서 내내 느꼈던 거지만, 시각적인 묘사가 정말 예뻐요. 꿈 속에서나 볼 법한 몽환적인 색의 장면들이 소설 읽으면서 머릿속에 펼쳐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넬은 특유의 한없이 흐느끼는듯한 목소리가 인상깊죠. 전 꿈의 느낌에서 모티브를 많이 얻는답니다 *_*
아 슬프네요. 사랑은 뭘까 괜히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는.. ㅡ_ㅡ; 그리고 google 에 쉼없이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포괄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사랑은 포용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요 -
이거 가로본능이......;
앗 , 정말 그렇네요 . 갑자기 왜 그러지 .. 수정하겠습니다 .
아아...사무실에서 몰래보다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아버렸네요...;; 이따가 퇴근한담에 다시 볼께요 ㅠ_ㅠ
저번에 연재하다 마신 글에 직장 얘기가 나오던데, 혹시 열혈단무지님의 직장생활이 모티브? ㅋㅋ
아따~영어 잘하시네요잉~부럽구마잉~해석 안 달아놓으셨으면 안봤을지도 몰라요-ㅁ-/ 엄청 길었는데 아까 낮에 중간까지 봐서 그런지 금방 읽을 수 있었네요~글 잘쓰는 분들보면 넘 부러워-_ㅠ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영어로 썼습니다. 사실 요번껀 계속 꿈내용만 복사해대서 그리 길지 않았는데, 제 착시현상 속임수입니다 :D
일단 내용이 중복이고...... 영어 부문 proof reading 다시 하셔야 겠어요........
영어 부문 괜찮은데.. 어떤 부분이 editing 이 필요한거 같으세요? 개인적으로 쭉 읽어보니 괜찮던데 ..
아기여우님, 일단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Proof reading 해봤는데 중복된 곳은 없었지만, 관심 감사드려요 !
하늘을날다님,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ㅁ* 두번씩이나 읽는 고역을 치루셔야 했군요 ㅋㅋ
프...리딩-ㅁ-? 뭐라고 쓰신겨;; 아 영어는 역시 정말 어떤 의미로 참 무서운거 같아요-0-
Proof reading은 수학에서 검산하는것과 같은 이치랍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만인의 연인 네이냔 *_* 칵테일님 반갑습니다. 이번 글은 사랑에 대해 쓴다기보다도,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쓰다보니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네요. 저 호수 안에 갇힌 자들은 정말로 사랑했다기보다, 매력적인 얼굴만 보고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사랑이라 착각해버린 사람들입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습니다. 미로님의 글은 정말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달까요? 그렇지만 미로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미로속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_@ 감사합니다, 괴상망측님.